78화. 말 잘 듣는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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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말 잘 듣는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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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말 잘 듣는 남편
2023.06.30.
V자 라인으로 빠진 반지는 꼭 왕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라인을 따라서 촘촘하게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는 왕관의 권위를 드높여주는 느낌이었다.
만약 이 반지로 프러포즈한다면 ‘당신을 나의 여왕님으로 모시겠다.’라는 뜻이 될 듯했다.
“우아하고 세련되어서 문나영이랑 잘 어울릴 거야.”
심플하지만 결코 심심해 보이지 않는 반지를 태혁은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았다.
저 반지가 나영의 손가락에 끼워진 상상을 하니 결혼이 처음으로 실감 났다.
병원 안에서 그를 피해 도망 다닌 나영을 쫓아다녔던 게 불과 몇 개월 전이었다.
“나 진짜 결혼하는 거야?”
태혁이 묻자 차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려면 문나영이 네 프러포즈를 받아줘야지.”
승희도 대학 때부터 친구였던 나영이 이렇게 빨리 결혼한다니까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녀는 힐긋 태혁의 옆에 서 있는 차현을 보았다.
역시 그녀와는 딴 세상 이야기라고 생각하니 한숨이 나오려고 해서 꾹 참았다.
직원이 반지를 꺼내서 태혁의 앞에 놓아주었다.
“프러포즈는 어디서 할 거예요?”
승희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물어도 태혁은 반지에만 신경 쓰며 가르쳐 주지 않았다.
***
태영건설 전무실.
문성철은 뜻밖의 손님이 방문했다는 보고를 비서한테 듣고 미간을 좁혔다.
“어떻게 할까요?”
비서가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 유명한 차현 감독도 거의 쫓아내려고 했으니 이 사람은 분명 안 만날 게 뻔했다.
“모시고 와.”
그런데 문성철 전무가 선뜻 최남기를 만나겠다고 하자 비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마 뒤, 비서의 안내를 받고 최남기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허름한 차림새만 보면 누구도 그가 대한민국 갑부 서열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알 수 없었다.
최남기라는 이름만 알고 누군지 몰랐던 시절 문성철도 깜빡 속았었다.
“오랜만이네. 문 전무.”
사업상의 자리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랬기 때문인지 최남기는 예전과 다른 눈빛이었다. 오로지 최태혁의 할아버지로 이 자리에 왔다는 듯이.
“앉으시죠.”
문성철이 자리를 권하자 최남기는 소파에 앉았다. 문성철은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비서에게 차를 부탁했다.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박재수 형사의 경찰수첩을 보고 최태혁에 대한 마음은 바뀌었지만, 최남기는 아니었다.
그가 최남기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문 전무에게 알려줄 게 있어서.”
최남기는 함께 온 수행원한테 눈짓했다.
그러자 그가 서류를 문성철 앞에 내려놓았다.
그건 기부 명단이었다.
“지금 저한테 기부하신 거 자랑하시는 겁니까?”
문성철이 차갑게 묻는 말에 최남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아들이 하는 거네.”
최남기의 아들이라면 최태혁의 아버지였다. 이미 최태혁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는 걸 알기에 문성철은 찌푸린 눈으로 최남기를 쳐다보았다.
“자네가 날 어찌 생각하는지는 잘 알고 있네. 나도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어. 그런데 태혁은 최남기의 손자이기도 하지만, 최정훈의 아들이기도 하네. 그러니 자네가 내 아들 최정훈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꼭 알아야 할 거 같아서 말이지.”
문성철은 말없이 주름진 최남기의 얼굴을 쳐다만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도 최태혁의 뒷조사를 하면서 최남기에 대해서만 철저하게 조사했지, 최태혁 아버지의 이름조차 제대로 보지 않았다. 어차피 죽은 사람이었기에.
그런데 그 죽은 사람의 존재는 어디에나 있었다.
박재수 형사의 경찰수첩에도, 최남기가 들고 온 기부 명단에도.
“태혁이 아버지는, 그러니까 내 아들은 성격이 정의롭고 착해서 나의 잘못을 절대 눈감아 주지 않았어. 그래서 집을 나가서 경찰이 되었지. 내가 지은 죄만큼 본인이 갚으면서 살고자 했으니까. 결국 내가 괴롭히던 사람을 지키려다가 내 아들이 죽었네. 나 때문에 태혁이는 아비 없는 아이로 살아야 했지. 그래서 난 내 아들이 미처 못 하고 끝낸 일을 대신 해야만 했기에 저 기부를 계속하고 있는 거네. 내 아들은, 그러니까 태혁이 아버지는 살아서도 사람들을 끝까지 도왔고, 죽어서도 사람들을 돕고 있어. 그러니 자네가 태혁이를 내 손자로만 보지 말고. 최정훈의 아들로도 봐주게. 그래 줄 수 있겠나?”
최남기의 말을 다 들은 문성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그래야만 한다는 걸 문성철도 깨달았다.
***
그녀의 인생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우선 무사히 레지던트 끝내는 게 목표였는데, 레지던트 첫날 최태혁 교수를 만나면서 틀어졌다.
어찌어찌 최태혁 교수의 꼬임에 넘어가서 그래도 연애는 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자마자 이주아의 고자질로 아버지가 두 사람 사이를 알게 되는 바람에 한차례 태풍을 겪고 어느새 결혼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어차피 최태혁 교수는 결혼할 나이가 맞았지만, 나영은 자신이 과연 지금 결혼할 나이가 맞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최태혁 교수의 프러포즈가 하루씩 늦어질 때마다 그 고민은 더 깊어졌다.
만약 지금 결혼했다가 레지던트 기간에 아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그건 연애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인생의 반전이었다.
나영은 임신과 함께 레지던트 과정을 밟는 상상을 해보았다가 몸서리를 쳤다.
역시 그건 무리였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결혼을 미룬다고 하면 아버지가 어떻게 나올지도 불안하긴 했다.
그럼 결혼이 아니라 약혼을 하는 것도 방법이었다.
그녀 혼자 인생 계획을 거기까지 세웠을 때, 태혁이 연락했다.
[내일 10시까지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
드디어 프러포즈하려나 보다.
그녀가 먼저 찔러서 받게 되는 거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프러포즈 받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올랐다.
내일이 그녀의 인생에 새로운 한 페이지가 될 거 같은 낭만적인 예감이었다.
나영은 곰 인형을 붙잡고 말했다.
“호랑이 아빠가 프러포즈를 어떻게 할까?”
승희와 차현이랑 같이 반지 사러 간 건 승희한테 들었다.
하지만 어디로 갈지는 죽어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분명 홍식 씨한테 뭔가 시켰을 거야.”
나영은 혼자 다 짐작하고 피식 웃었다.
살면서 행복하다는 말을 잘 써 본 적이 없는데, 이 순간 행복한 느낌이 가득했다.
마치 오랫동안 내린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추는 것만 같은 나날이었다.
나영은 곰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이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
태혁은 청명하게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가 너무 좋은 게 왜 난 불안할까?”
그가 소풍 갈 때 날씨 좋았던 날이 거의 없었다. 하늘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프러포즈하는 날 이리 화창하다니.
“교수님.”
나영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내려 앞을 본 태혁은 웨딩드레스처럼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심장이 금세 뜨거워졌다.
안 그래도 피부가 혈관까지 비칠 정도로 투명한데, 옷까지 그리 입으니 첫눈처럼 고결하고 고왔다.
몸 안에서 욕망이 불쑥 치솟는 걸 억지로 눌렀다.
오늘은 프러포즈하는 날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사여야 했다.
“오늘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녀가 그의 앞까지 다가와 묻는 목소리는 솜사탕처럼 폭신했다.
태혁은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가보면 알아.”
태혁이 그녀한테도 안 가르쳐주자 나영은 살짝 그를 흘겨보고는 차에 올라탔다.
태혁은 운전석에 올라타 바로 차를 출발했다.
“음악 들을래?”
생전 안 하던 말을 하는 그를 보고 나영은 짧게 웃었다.
“네, 한번 틀어 보세요.”
태혁은 손을 뻗어 차 오디오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나랑 결혼해 줄래~
노래를 틀자마자 나오는 가사에 나영은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노래로 먼저 저 세뇌하려는 거죠?”
“노래가 좋아서 튼 거야.”
태혁은 딱 잡아뗐다.
그런 거치고 노래는 계속 청혼가만 나왔다.
나영은 한국에 이렇게 많은 청혼가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계속 듣고 있으려니 마음이 들떴다.
그리고 차는 강원도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설마 그때 그 바닷가 가는 거예요?”
“응.”
그곳에서 태혁은 나영에게 마음을 열어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곳에서 그녀에게 결혼해 달라고 프러포즈를 할 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일출 보고 올래요?”
그녀가 일출을 보고 싶다고 하자 태혁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만 해준다면 뭐든 못 해주겠는가.
“그럼 오늘은 바다가 보이는 호텔에 묵자.”
그것도 좋았기에 나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 때문에 앞으로 바다에 자주 가겠네요.”
태혁은 나영의 반응을 살피며 물었다.
“그래서 귀찮아?”
나영은 고개를 저었다.
“함께할 수 있는 게 있어서 좋아요.”
그와 많은 것을 나누고 싶었다.
태혁도 그녀의 마음과 똑같다는 듯이 그녀와 같이하고 싶은 걸 말했다.
“그럼 조개구이집에서 라면도 같이 먹어.”
또 라면을 찾는 그의 말에 나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운전하는 태혁을 쳐다보았다.
“저랑 결혼하면 교수님은 라면부터 끊어야 해요.”
“뭐?”
태혁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왜요? 못 하시겠어요?”
그가 대답을 안 하자 나영은 손을 뻗어서 음악을 껐다.
차 안에 갑자기 정적이 흐르니 태혁은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차분한 어조로 또박또박 그의 귀에 말을 때려 박았다.
“저는 제 말 잘 듣는 남편을 원해요. 괜찮으시겠어요?”
태혁은 처음으로 결혼이라는 험난하고 거친 바다를 마주친 기분이 되었다.
낭만적인 건 딱 프러포즈 때까지만일지도 모른다.
“나만 네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서로 맞추어 가는 거지.”
태혁은 풀고 풀어서 말했다. 오늘 같은 날 불공정 계약 같다고 따질 수는 없었다.
“어차피 병원에서는 제가 교수님 말에 다 따라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집에서는 교수님이 제 말을 따르세요.”
아주 단호하고 확고한 의지였다.
태혁은 잠시 이대로 결혼해도 괜찮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영의 부모님은 이미 두 사람이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고 계시고, 그도 프러포즈 반지를 샀고, 지금은 프러포즈하러 가는 차 안이었고, 홍식이는 먼저 강원도에 가서 폭죽을 준비하고 있었다.
태혁은 고개를 돌려 나영을 보았다.
이런 불편한 말을 하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참 예뻤다.
과연 사랑으로 어디까지 극복할 수 있는지 그도 궁금하기는 했다.
“그래.”
그가 순순히 대답할 때, 빠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나게 큰 트럭 경적이 울렸다.
태혁은 빠르게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대형트럭이 작은 차들을 피하며 이쪽으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태혁은 본능적으로 나영의 몸을 팔로 막았다.
그리고 힘껏 핸들을 꺾었다.
끼이이이이익!
차가 크게 회전할 때 거대한 트럭은 코앞까지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