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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프러포즈란 무엇인가 (77/84)


77화. 프러포즈란 무엇인가
2023.06.26.


태혁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가 없어서 차현을 보았다.

차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뉴질랜드에서 박재수 형사님 부인을 만나 경찰수첩을 받았어. 거기 네 이름이 적혀 있었고. 네 아버지한테 남기는 편지 형식이었어.”

결국 증거를 찾아냈다는 차현의 말에 태혁은 속에서 뜨거운 게 치받아 왔다.

그건 기쁨보다 서러움에 가까웠다.

당연히 증거 따위는 남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포기했을 때는 차라리 담담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증거를 찾아내니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할아버지의 허물과 문성철이 했던 모진 말이 떠오르며 모두 그의 서러움이 되었다.

이 가슴을 때리는 듯한 마음은 그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눈가가 타오르듯이 붉어지는 태혁을 보며 문성철은 사과했다.


“미안하네. 내가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어.”

모든 사람이 태혁을 욕했어도 그만은 그를 욕하면 안 되었었다.

그런데 그가 앞장서서 그를 비난했다. 그의 잘못도 아니고, 그의 할아버지의 과오로.

몰라서 한 일이라고 해도 문성철은 후회가 사무쳤다.

최태혁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 장수호가 말리고, 나영이 화냈는데도 문성철은 귀를 닫고 오로지 자신이 맞다고만 생각했다.

그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렇게 모질게 나가야 한다고.


“정말 미안해.”

문성철이 결국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숙이자 태혁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태혁은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문성철에게 사과를 듣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 딸을 구해줘서 고맙네.”

문성철의 입에서 나온 감사의 인사가 지뢰밭 인생을 지나오면서 거칠고 단단해졌던 그의 마음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당장이라도 누군가 건드리면 그대로 터질 거 같았는데.

탁 탁 탁.

급하게 뛰어온 나영이 문 앞에 나타났다.


“아버지!”

차현이 병원에 도착해서 나영에게 문성철 전무와 함께 간다고 미리 메시지를 남겼기에, 나영은 서둘러 달려온 것이었다.

혹시라도 병원에서 아버지가 태혁을 해코지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그런데 분위기가 너무 이상했다.

아버지도, 태혁도 생전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마치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 것처럼.

나영도 자연스럽게 이게 어찌 된 일이냐며 차현을 보는데.

차현이 웃으며 말했다.


“좋은 이야기는 좋아하는 사람 입을 통해서 들어요.”

성큼성큼.

나영에게 걸어간 태혁은 두 팔로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 최태혁 교수의 행동에 병원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일이야?

문나영의 백수 남친이 설마 최도혁 교수였다고?

그게 말이 돼?

다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은 빠르게 병원에 퍼져나갔다.

최태혁 교수가 사실 문나영의 목숨을 구한 사람이라서 그녀의 아버지가 직접 병원까지 찾아와 두 사람 사이를 허락했다는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였다.

아무도 감히 두 사람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간담췌 외과 2년 차 남호진만이 끝까지 이건 음모가 있다고 의심했다. 독사가 그럴 리가 없다며.

***

나영의 어머니 연희는 소식을 전해 듣고 눈물부터 쏟아냈다.

사슴 같은 눈망울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그를 반기는 건 사실 태혁에게는 아주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오히려 문성철 전무가 더 편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최 교수님이 우리 나영이 구해준 사람이라면서요? 그 말 듣고야 내가 기억이 났어요. 그때 박 형사님이 병실에 데려왔던 호랑이 탈 쓴 사람이 최 교수 맞는 거죠? 내가 진작 알아봤어야 했는데. 바로 눈앞에 두고도 몰라서 그 고생을 시키고. 너무 미안해요. 그리고 정말 고마워요.”

문성철 전무도, 나영도 남의 일 구경하듯이 멀뚱히 쳐다만 보니 그가 서연희를 달래주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거 참 죽을 맛이었다.

태혁은 테이블에 있는 티슈를 여러 장 뽑아서 서연희에게 건넸다.


“저는 괜찮으니 그만 우십시오.”

“흑흑. 나영이가 왜 꼭 최 교수여야 한다고 고집했는지 이제야 알았어요. 두 사람 정말 운명인가 봐.”

그만 울라니까 더 심하게 울었다.

태혁은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옆집 불구경하는 눈빛이었다.

둘이 왜 부녀 사이인지 이제야 알 거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정말 당장 결혼할 생각인 건가?”

문성철 전무의 한마디에 태혁과 나영은 깜짝 놀랐고, 서연희도 눈물을 멈추었다.

연희는 티슈로 눈가를 우아하게 닦으며 물었다.


“어머! 두 사람 진짜 결혼하는 거야?”

태혁과 나영은 서로 쳐다보았다.

설마 어쩌다 말한 결혼이 현실이 될 줄은 둘 다 상상을 못 했다.

여기서 그때는 임시방편으로 말한 거라고 하면 겨우 되찾은 문성철의 호의가 깎일지도 몰랐기에 태혁은 함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머리 아프게 생각하고 있을 때 나영이 먼저 말했다.


“교수님이 아직 프러포즈를 안 했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방금까지도 울면서 그에게 감사하던 연희가 어쩜 그럴 수 있느냐는 눈으로 태혁을 보았다.


“당연히 프러포즈는 해야지. 여자는 그런 기억이 평생 간다고.”

그야 1분 전까지는 그들이 결혼하게 될 줄 몰랐으니까.

태혁은 나영을 쳐다보았는데, 그녀는 오히려 대답 잘하라는 눈빛으로 그를 조용히 압박했다.

정말 주인님과 노예 사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게, 준비 중입니다.”

태혁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문성철은 헛기침하며 결혼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었다.

“그럼 결혼은 자네가 프러포즈 제대로 한 다음에 정식으로 이야기하지.”

공짜로 내 딸은 못 보낸다는 뜻이 문성철의 말에 담겨 있었다.

아버지는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 있었다.

분명 그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는데, 끝났을 때 가장 지친 사람은 그였다.

***

사람들의 눈동자가 바쁘게 양옆을 오갔다.

이쪽에는 최태혁 교수가 있었고, 저쪽에는 문나영이 있었다.

문나영의 백수 남친이 사실은 최태혁 교수였다는 게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일하고 있었다.

문나영에게 직접 물어도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상대가 최태혁 교수였기에 누구도 감히 먼저 나서서 두 사람의 사이를 축하하지 못했다.

그러다 독사한테 봉변당할 수도 있었기에.

그러나 입이 근질거려 죽겠다. 누구라도 빨리 두 사람 진짜 사귀는 사이냐고 용기 있게 물어봤으면 좋겠다.

퍽.

누군가 최태혁 교수의 어깨를 딱딱한 물건으로 치자 그는 바로 화난 눈으로 돌아보았다.


“어떤 자식이!”

박 과장인 걸 알고 태혁은 멈칫했다.


“너 연애한다면서?”

모두가 궁금해하던 걸 드디어 물어보는 사람이 나왔다.

레지던트들은 환희의 표정을 지었다.


“그게 과장님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최태혁 교수의 대답은 역시나 삐딱했다.

그런데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정말 문나영과 연애를 한다는 소리였다.


“내가 너 다시 미국으로 보낼 수도 있다.”

박 과장의 협박에 태혁은 바로 자세를 낮추었다.


“연애도 잘하고, 병원 일도 뼈가 부서지도록 하겠습니다.”

한껏 유순해진 그를 보고 박 과장은 만족해서 껄껄 웃었다.


“역시 사람은 지킬 게 생겨야 좀 꺾이는구먼.”

뒷짐을 지고 걸어가는 박 과장의 뒷모습을 태혁은 찝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문성철 전무가 더 이상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세상에 그를 사랑하는 사람만 있는 게 결코 아니었다.

그가 돌아보자 레지던트들이 빠르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째 다들 그를 보고 즐거워하는 거 같아서 태혁은 계속 기분이 찝찝했다.

***

프러포즈란 무엇인가.

태혁에게 던져진 일생일대의 숙제였다.

이건 차현도 그에게 확실한 답을 줄 수 없었다.

어차피 바람둥이 차현도 프러포즈는 한 번도 안 해봤을 테니까.

그래서 태혁은 집단지성의 힘을 모으기로 했다.


<프러포즈는 어떻게 하는 거야?>

그가 질문을 던지니 채팅방에 답변이 하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가장 첫 번째는 홍식이었다.


<형님, 제가 10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준비하겠습니다.>

그거 끼면 손가락이 부러지겠다.

세상에 어떤 남자가 프러포즈하면서 여자 손가락을 부러뜨린단 말인가.

오승준이 말했다.


<무조건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꽃다발이랑 오케스트라 준비하고 식사해야지.>

나쁘지 않지만 특별하지도 않아서 태혁은 썩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차현이 말했다.


<반지는 나랑 같이 사러 가.>

홍식이 차현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속 아무 응답이 없는 장수호에게 태혁은 따졌다.


<너한테 기대하는 건 하나도 없지만, 뭐라도 말해. 안 그럼 쫓아낸다.>

장수호가 그제야 답변을 남겼다.


<저라면 두 사람의 추억이 있는 장소로 가겠습니다.>

그 말에 태혁은 떠오르는 장소가 하나 있었다.

그래, 거기가 좋겠네.

우선 프러포즈 반지를 사야 했다. 태혁은 차현과 반지를 사러 가기로 했다.

반지를 사기로 한 날, 차현은 오승희까지 온 것을 보고 태혁에게 귓속말로 따졌다.


“왜 오승희 온다는 말 안 했어?”

“그럼 너 안 올 테니까.”

태혁은 지금 두 사람의 도움이 다 필요했다.

차현이 그를 노려보고 있을 때 승희가 차현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감독님. 무전기는 잘 가지고 계시죠?”

차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여자 앞에서 서툰 남자처럼.

그가 제대로 대답하지 않자 승희는 그에게 다가오며 조곤조곤 묻기 시작했다.


“무전기는 잘 작동되고 있나요? 고장 안 난 거 맞죠? 설마 일부러 꺼놓으신 건 아니죠?”

“오늘은 반지에 집중하죠.”

차현은 태혁을 끌고 쥬얼리샵 안으로 들어갔다.

승희는 서운한 눈으로 차현의 뒤통수를 흘겨보며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갔다.


“어서 오십시오. 감독님.”

명품 쥬얼리샵 직원은 단골손님을 대하듯이 차현한테 인사했다.


“평소에 여자한테 이런 선물 많이 하시나 봐요.”

승희가 못마땅한 눈으로 차현을 쳐다보며 말했는데 대답한 사람은 반지를 보고 있는 태혁이었다.


“그랬으면 널 데려왔겠냐.”

“교수님 말고요.”

승희가 짜증을 내자 태혁도 야단쳤다.


“내가 너 연애질하라고 데려온 줄 알아! 빨리 반지 골라.”

승희는 할 수 없이 반지가 진열된 진열대에 코를 박고 반지를 보았다.


“저는 저 하트 모양 반지가 귀여운 거 같아요.”

“네 취향 말고 나영이 취향으로 고르라고.”

“나영이는 심플한 거 좋아해요. 그냥 또 링 반지 고르세요.”

태혁은 욕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승희를 노려보았다.

그때 차현이 반지 하나를 가리켰다.


“저건 어때?”

태혁과 승희는 동시에 차현이 가리킨 반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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