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자네가 내 딸을 구한 게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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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자네가 내 딸을 구한 게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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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자네가 내 딸을 구한 게 맞나?
2023.06.23.
“내 딸이랑 뭘 한다고?”
문성철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태혁은 이미 말을 뱉었기에 무를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하게 될 결혼입니다. 전무님도 언젠가 인정하게 되실 겁니다.”
태혁의 당당함에 문성철은 더 화가 나서 그를 향해 다가가다가 나영이 태혁의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멈추어 서야만 했다.
“난 아버지가 반대해도 교수님이랑 결혼할 거예요.”
그녀까지 합세해서 결혼을 강행하겠다고 하자 문성철은 할 말을 잃었다.
나영이 이런 식으로 반항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랬기에 그 충격은 대단히 컸다.
당장이라도 두 사람을 갈라놓고 싶었지만, 문성철은 자기 손으로 직접 딸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그건 그의 가족을 완벽하게 보호하려고 했던 그의 책임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기에.
문성철은 그대로 두 사람을 지나쳐 관용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차는 문성철 전무를 태우고 바로 떠나버렸다.
차가 더 이상 안 보일 때까지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나영은 고개를 들어 최태혁 교수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영은 그의 손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정말 저랑 결혼할 거예요?”
태혁이 그녀의 입을 막으려고 꺼낸 말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 진심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녀는 실망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도 그가 결혼할 거라는 말을 꺼냈을 때 뜨거워진 심장은 전혀 거짓말이 아니었다.
태혁이 고개를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는 웃는 듯이 올라갔지만, 눈매는 찌푸려졌다.
“그 말 때문에 네 아버지가 더 날 싫어하게 된 거 같은데.”
안 그래도 싫은 놈이 다짜고짜 딸과 결혼하겠다고 했으니 좋아 보일 리가 없었다.
패기가 아니라 객기로 보였을 거다.
나영은 두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내가 그만큼 사랑으로 채워줄게요.”
얼음공주 문나영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싶은 정도로 달콤한 말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닥쳐올 고난에 걱정하기보다는 이 사랑에 그저 취하고 싶었다.
태혁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감싸 안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그 사랑 1005호에서 보여줄래?”
사랑의 밀어를 알아들은 나영은 금세 귓가가 붉게 변했다.
그녀의 반질거리는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들뜨게 하는 시선이었다.
“네.”
그녀가 기꺼이 허락하자 태혁은 심장이 붉게 타올랐다.
그래서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서 그가 치러야 할 대가가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그 고난을 뚫고 그녀에게 가리라.
***
태영건설.
문성철은 출근하자마자 장수호를 불렀다.
“그 서류 최태혁한테 주면서 내 말 전했나?”
장수호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문성철은 더 화가 났다.
“그런데도 그놈이 감히 내 앞에서 내 딸과 결혼하겠다고 했다고!”
장수호는 어제 나영이 왜 회사까지 찾아왔는지 알고 있었다.
문성철 전무에게 유괴 사건의 진실을 전부 말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그걸 막은 것도 최태혁이었는데, 문성철 전무는 그것 때문에 더 그를 싫어하게 되었다.
정말 최태혁 교수는 본인 말처럼 재수가 없는 거 같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와 짧게 보고했다.
“차현 감독님이 전무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찾아왔습니다.”
뜻밖의 손님에 문성철은 미간이 찌푸려졌고, 장수호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차현이 뉴질랜드에서 돌아왔다.
“바쁘니까 돌아가라고 해.”
지금은 그 누구도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문성철은 단번에 거절했다.
문성철의 지시에 비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차현 감독처럼 유명인을 이리 홀대하면 어떤 입소문이 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반드시 만나셔야 합니다.”
그런데 장수호가 그답지 않게 강경하게 나왔다.
문성철은 고개를 들어 건조한 시선으로 장수호를 쳐다보았다.
“내가 왜?”
“안 그럼 평생 후회하시게 될 겁니다.”
평생이란 말에 문성철은 미간을 구겼다.
어제 그의 앞에서 최태혁이 당당하게 그의 딸과 결혼할 거라는 말을 한 것만큼이나 불쾌한 말이었다.
“나가 봐.”
문성철은 그에게 완전히 신뢰가 깨진 눈빛이었다.
이미 그를 자기 딸과 맞선보게 한 것도 후회하는 거 같았다.
그래도 장수호는 어떻게든 차현과 문성철 전무를 만나게 해야 했다. 그것마저 할 수 없으면 정말 자신이 가치 없는 인간처럼 느껴질 거 같았으니까.
“제 자리를 걸겠습니다. 제발 만나 주십시오.”
본인의 자리까지 건다는 장수호의 말에 문가에 서 있던 비서까지 기함했다.
문성철은 차가운 눈으로 장수호를 쳐다보다가 비서에게 지시했다.
“모셔 와.”
이게 문성철이 장수호에게 해주는 마지막 배려였다. 더 이상은 없었다.
그리고 10분 뒤 차현은 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차현은 거리낌 없이 자신을 영화감독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최태혁의 친구 차현이라고 합니다.”
그의 소개를 듣고 문성철은 쓴 표정을 지었다.
이미 최태혁에 대한 미움은 한계치를 넘었기에 그 친구가 아무리 유명한 감독이라고 해도 똑같이 꼴 보기 싫었다.
“당장 내 사무실에서!”
“뉴질랜드에서 박재수 형사의 부인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바로 차현을 쫓아내려고 했던 문성철은 차현이 만나고 왔다는 사람을 듣고 멈칫했다.
오래전에 연락이 끊겨서 그도 8년 동안이나 보지 못했던 이였다.
차현은 가방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내 문성철 전무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부인한테서 받은 박재수 형사의 경찰수첩입니다.”
문성철의 시선이 낡은 수첩으로 떨어졌다. 수첩의 표지에는 휘갈겨 쓴 글씨체로 ‘박재수’라고 적혀 있었다.
이 글씨를 문성철은 기억하고 있었다.
“따님이 유괴되었던 날짜로 찾아서 읽어보십시오.”
문성철이 고개를 들어 차현을 노려보았다.
“내가 왜 굳이 그날의 기록을 봐야 하지?”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걸 봐야 따님이 최태혁 교수를 고집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눈에 나영은 그냥 남자에 미쳐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니.
문성철은 전혀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그 말을 거리낌 없이 하려면 경찰수첩을 봐야만 했다.
문성철은 따갑게 숨을 들이켜고는 수첩을 펼쳤다.
그리고 나영이 납치되었던 날짜가 나올 때까지 계속 종이를 넘겼다.
경찰수첩은 날짜별로 그날의 사건에 대해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찾는 날짜가 나오자 문성철의 손이 멈추었다.
그날 나영의 유괴 사건에 대해 상세히 적혀 있는 글을 읽으려니 속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못 보겠다고 여겼을 때 그 이름이 나왔다.
<형님, 태혁이가 오늘 여자아이를 구했습니다. 트렁크에서 소리가 나서 오토바이로 그 먼 길을 끝까지 쫓아갔다는군요. 태혁이가 아니었으면 그 여자아이는 아마 오늘 죽었을 겁니다. 그럼 그 아이의 부모는 평생 지옥을 품고 살아야 했겠죠. 그러니 사람들은 몰라도 형님만은 꼭 아셔야죠. 형님의 아들이니까요. 오늘은 태혁이가 참 잘했습니다. 제가 형님 대신 칭찬해 줄 테니 너무 아쉬워 마세요.>
문성철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자신이 무얼 읽었나 싶어서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그 경찰수첩에 태혁이 이름은 다른 곳에도 나옵니다. 의심되시면 더 찾아보셔도 됩니다.”
차현은 비행기 안에서 경찰수첩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보았다.
태혁은 나영만 구한 게 아니었다. 수첩 안에서 태혁의 이름은 17번이나 나왔다.
그 시절 태혁은 끝없이 누군가를 구하며, 자신을 구했다.
그중 누구도 태혁에게 보답한 사람은 없었다.
“그날 따님을 구한 사람은 최태혁이 맞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러니 그냥 믿어주는 것만이라도 할 수 없냐고, 차현은 간절히 빌었다.
***
1005호에서 눈을 떴을 때 정말 병원에 출근하기 싫었지만, 나영은 이미 씻어서 옷까지 다 입은 상태로 그를 깨우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사랑이 식었냐고 물었더니, 나영이 도도하게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주일 동안 제 노예잖아요. 당장 일어나요.”
채찍을 손에 들었으면 바로 후려칠 기세였기에 태혁은 순순히 일어나서 병원으로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병원은 언제나처럼 바빴다.
하필 오늘은 외래진료가 있는 날이라서 그는 진료실 의자에 앉아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야만 했다.
그가 쉬는 꼴은 절대 볼 수 없다는 듯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오는 환자와 보호자를 만나느라 지쳐가고 있을 때, 갑자기 오승희가 문 뒤에서 튀어나오며 그에게 물었다.
“차현 감독님이랑 전화하셨어요?”
“뉴질랜드에서 양 치고 있다니까.”
“어제 돌아오셨어요. 무전기로 연락했다니까요.”
그 무전기가 진짜 작동했다는 말이 더 신기해서 태혁은 오승희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최태혁 교수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승희는 실망만 하고 떠나갔다.
태혁은 힐긋 핸드폰을 보았다.
‘돌아왔다고?’
외래진료만 끝나면 전화해야겠다.
차현이 뉴질랜드 있는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았다.
차현의 말을 들으면 도움이 될 테니까.
차현은 그의 사고다발지역 같은 인생에 등대 같은 존재였다.
그가 길을 모를 때,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할 때, 항상 일깨워주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 믿었다.
태혁은 오전 환자 진료가 끝나자 나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노예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콜해 주십시오. 주인님.>
이게 은근히 재미있었다.
모두의 마음에 변태가 조금씩은 있나 보다.
핸드폰 보며 혼자 웃다가 간호사와 눈이 마주치자 태혁은 바로 핸드폰을 뒤집어서 내려놓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간호사 눈치를 보며 자리를 뜨려고 했는데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어머! 차현 감독이야.”
“와! 진짜네!”
차현?
차현이 사람 번잡한 외래진료 시간에 그를 만나러 올 리가 없었다.
지금처럼 소란이 일어날 게 뻔했으니까.
그런데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정말 그의 친구 차현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그가 의아해서 묻자 차현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리고 문 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태혁은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었다.
문성철 전무였다.
태혁은 기습당한 사람처럼 크게 당황해서 차현을 보았다.
이 망할 자식. 뉴질랜드에 돌아오자마자 나에게 이리 큰 폭탄을!
그가 눈으로 차현을 욕하고 있을 때 문성철 전무가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분명 그의 결혼 선언에 화가 나서 따지러 온 거라 여기고 태혁은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가 되었는데,
“자네가 내 딸을 구한 게 맞나?”
언제나 단호했던 문성철 전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태혁은 순간 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