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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헤어질 거냐? (75/84)


75화. 헤어질 거냐?
2023.06.19.



 
태혁은 정말 반성문에 충실했을 뿐인데, 어느새 흥분했다.

머슴이라고 했으면 일주일 동안 일만 죽어라 했을 거 같은데, 노예는 일주일 동안 주인님 밤 시중만 열심히 들면 될 거 같은 게 썩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에 막 닿으려는 찰나 그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그는 낮게 욕을 뱉어내고, 나영은 눈을 번쩍 떴다.

태혁은 핸드폰을 꺼내어 발신자를 보고 더 발끈했다.

병원 호출 콜도 아니고 홍식의 전화였다.


“이 자식이. 눈치도 없이.”

태혁은 짜증을 내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너 앞으로 나한테 전화하지 마.”

전화를 받자마자 전화 금지라고 못을 박는데, 전화기 안에서 홍식이 충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장수호란 사람이 형님 이름을 대며 어르신을 찾아왔는데, 형님도 아셔야 할 거 같아서 전화했습니다.]

장수호가 그도 건너뛰고 그의 할아버지를 찾아갔다는 말에 태혁은 눈썹이 단번에 위로 치솟았다.

***

최남기는 재벌총수처럼 제대로 된 직함이 없이 그저 ‘어르신’으로 불릴 뿐이었지만, 그래도 아무나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선거에 출마하는 정치인도 몇 달을 공을 들여야 그와 식사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최남기가 불쑥 찾아온 건설회사 풋내기를 만나준 건 장수호가 그의 손자 이름을 댔기 때문이었다.

그건 지금껏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왜냐하면 태혁이 머리가 굵어진 뒤로는 철저하게 자기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숨겨서 이제는 그의 손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최남기가 아는 태혁의 친구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차현이 유일했다.


“내 손자랑 무슨 사이인가?”

최남기는 그저 그게 궁금해서 시간을 내서 장수호를 독대한 것이었다.

장수호의 이미지가 성실한 건설맨이라서 더더욱 태혁과 어울리는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좋은 사이는 아닙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내 손자가 자네한테 합의금 받을 짓이라도 한 건가?”

태혁이 친 사고 때문에 그가 지금껏 물어준 합의금만 모아도 작은 건물 한 채는 올릴 수 있었다.


“아닙니다.”

“그럼 왜 날 찾아왔어?”

합의금 받으러 온 게 아니라면 최남기도 별로 흥미가 없었다.


“만약 이번에 누군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면 최태혁 교수가 아니라 어르신이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택이란 말에 최남기는 주름진 눈을 찌푸렸다.


“제 상사인 문성철 전무님의 딸과 어르신의 손자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최남기는 처음 알게 된 이야기였기에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남의 말만 듣고 바로 믿기에는 살아온 세월이 녹록지 않았으니까.


“전무님은 최태혁 교수가 어르신의 손자라 반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전무님의 딸과 최태혁 교수를 갈라놓기 위해서 이걸 준비하셨고요.”

장수호는 서류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최남기 앞으로 내밀었다.

최남기는 서류에 적힌 글자를 보고 눈빛이 일그러졌다.


“이걸 최태혁 교수한테 전해주었다면 선택해야 할 겁니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와 그의 유일한 가족 중 한 명을.”

그래서 장수호는 차마 최태혁한테 갈 수 없어서 최남기를 찾아왔다.


“그 선택 어르신이 대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최남기에 대해 들은 건 모조리 다 비인간적인 성공 스토리였다. 그럼에도 최남기에게 일말의 희망을 품고 찾아온 건,


“손자분과 비자금 중 뭘 선택하시겠습니까?”

가족이란 서로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믿음이 장수호에게 있었기에.

최남기는 대답 없이 그의 눈만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 놈을 어찌 처리해야 하나 생각하는 사람처럼.


“당연히 돈이겠지.”

대답이 들려온 건 응접실 입구 쪽이었다.

장수호가 돌아보았을 때 태혁이 뚜벅뚜벅 응접실 안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내 할아버지라는 사람은 자기 신을 양말 살 돈도 아까워서 기워 신는 분이야. 그런데 몇백억이나 되는 비자금을 포기하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태혁의 목소리는 가벼웠으나 말의 내용은 전혀 가벼울 수 없었다.

태혁은 장수호가 최남기에게 넘기려고 했던 서류를 낚아채듯이 집어 들었다.


“이번에도 또 번지수 잘못 찾았다고. 장수호.”

장수호는 난감한 눈으로 서류를 넘기는 태혁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가 갑자기 이 시간에 이 집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나와. 여기서 헛짓거리하지 말고.”

태혁이 서류를 들고 그대로 나가버리려고 하자 그제야 최남기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전무 딸과는 헤어질 거냐?”

우뚝.

태혁의 걸음이 멈추었다.

장수호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는 태혁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

나영은 걱정이 되었다. 집에 일이 생겼다면서 급하게 떠난 최태혁 교수가.

하지만 그가 가면서 전화가 힘들 수도 있다고 못을 박았기에 먼저 전화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가 먼저 전화하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자 나영은 1초가 지날 때마다 답답함이 1g씩 늘어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혹시라도 그녀의 아버지와 관련 있을까 봐 불안했다.

정말 그런 거라면 미안해서 최태혁 교수 얼굴을 어떻게 보나 싶었다.

나영은 더 이상 참고 기다리기만 할 수 없어서 장수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약 그녀의 아버지가 관련이 있다면 장수호는 분명 알고 있을 테니까.

한참이나 전화벨이 가다가 장수호가 받았다.


[여보세요.]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게 그녀의 착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저 문나영이에요. 혹시 아버지가 또 최 교수님한테 뭐라고 했나요?”

[…….]

장수호가 대답하지 않자 나영은 불안감이 옥죄어왔다.


“맞아요? 오늘 교수님이 집에 간 게 우리 아버지 때문이에요?”

[아마 이번 일로 최태혁 교수가 검찰에 불려갈 수도 있습니다.]

나영은 충격에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할아버지 대신 자기가 뒤집어쓰겠다는군요.]

그녀가 넘어지는 소리를 듣고 방문을 연 연희는 하얗게 질린 나영을 보고 놀라서 다가왔다.


“나영아. 괜찮아? 왜 그래? 어디 아파?”

[죄송합니다. 제가 도울 수도, 말릴 수도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목소리와 장수호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여 들려왔다.


[최태혁이란 사람은 이번에도 자기 방식대로 지키려나 봅니다. 본인 빼고 전부를요.]

나영의 몸이 쏟아지는 비를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래서도 안 되었다.

그 어둡고 무서운 세상 속에서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그녀 때문에 감옥에 가게 할 수는 절대 없었다.

나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영아! 너 어디 가?”

연희는 심상찮은 기세로 나가는 나영이 걱정되어서 쫓아 나왔다.


“너 이대로 나가면 안 돼.”

어머니가 팔을 붙잡자 나영은 그 손을 뿌리치며 단호히 말했다.


“아버지한테 가서 말해야겠어.”

“뭘 말해?”

“전부 다!”

증거 따위 없어도 상관없었다.

아무도 안 믿어줘도 말해야만 했다.

태혁이 자기 방식으로 그리 또 지뢰밭 길을 가려고 한다면,

그녀는 그녀의 방식으로 그를 지켜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 그의 보호만 받는다면, 이게 어떻게 사랑일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집을 뛰쳐나온 나영은 택시를 잡아탔다.


“태영건설로 가주세요.”

그녀를 태운 택시는 불빛의 거리를 지나 아버지의 회사로 달려갔다.

마치 그날처럼.

그날은 아버지께 상처를 준 죄책감으로 그녀가 쓰러졌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버지가 납득할 때까지 결코 먼저 무너지지 않을 거다.

***

태영건설 본사 건물 앞에 택시가 멈추자 나영은 차에서 내려 건물로 걸어갔다.

하지만 정문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팔을 거세게 잡아당겨 몸이 크게 회전하며 뒤로 끌려갔다.

그녀를 붙잡은 사람은 태혁이었다.

급하게 달려온 듯 그의 숨이 거칠었다.


“이거 놔요.”

나영은 그라는 걸 알고도 손을 뿌리치기 위해서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태혁은 더 단단히 그녀를 붙잡았다.


“당장 놔요! 아버지한테 가서 다 말할 거야! 나 구해준 사람이 교수님이라고.”

그럴까 봐 태혁은 연희의 전화를 받자마자 달려온 것이었다.

태혁은 나영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순간 불어온 바람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 사건으로 너만 상처받은 게 아냐. 네 어머니도, 네 아버지도 똑같이 상처였어. 네 아버지가 나한테 이러는 건 또다시 그런 상처를 겪을 수 없다는 방어기제야. 그런데 딸인 네가 그 상처를 더 아프게 후벼파면 어쩌겠다는 거야.”

“내가 말 안 하면! 아버지가 교수님한테 무슨 짓을 하는데! 나한테 말할 생각은 있었어요? 끝까지 숨길 작정이었잖아! 나만 바보같이 아무것도 모르게!”

“어차피 돈 문제야. 차라리 그걸로 깔끔하게 끝내는 게 낫지. 굳이 그 재수 없던 사건을 네 손으로 다시 꺼내놔야겠어?”

“그래도 말할 거야. 교수님이 아무리 말려도 아버지한테 말할 거라고요!”

나영은 아버지한테 유괴사건에 대해 말하러 가겠다고 고집이었고, 태혁은 그런 나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둘 중 누구도 물러나지 않았기에 실랑이는 길어졌다.


“회사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야!”

칼날 같은 문성철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태혁은 그제야 나영을 놓아주었고, 나영은 눈물이 범벅이 된 눈으로 정문을 나오는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우뚝.

문성철이 두 사람 앞에 섰다.

세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만나는 자리였다.


“내 딸 손부터 놓게.”

문성철의 명령에 태혁은 나영의 손을 놓으려고 했지만, 나영이 다시 그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아버지한테 할 말 있어요.”

나영이 기어코 유괴사건을 말하려는 줄 알고 태혁은 먼저 선수를 쳤다.


“저희 결혼할 겁니다.”

그의 말에 문성철은 눈빛이 매서워졌고, 나영도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승희는 오늘도 무전기를 붙잡고 연결을 시도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제 목소리 진짜 안 들려요?”

하지만 오늘도 여전히 무응답이었다.

이걸 받은 뒤 한 번도 연결된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최태혁 교수가 준 이 무전기가 작동이 안 되는 물건 같아서 승희는 홧김에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

그런데 그 충격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무전기에서 소리가 났다.

지지직.


[내 말 들립니까?]

사람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들려오자 승희는 서둘러 침대로 달려가서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차현 감독님이세요? 맞아요?”

지지직.

아날로그라더니 잡음이 심했다.

설마 어떤 드라마처럼 과거에서 연결된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맞아요.]

진짜 차현의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흘러나오자 승희는 너무 감격스러웠다.

이 무전기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었다.


“지금 어디세요?”

[지금 가는 중이에요. 기다려요.]

두근.

기다리는 그 말이 승희의 심장에 와서 푹 꽂혔다.

그게 이렇게 떨리는 말인 줄 지금껏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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