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반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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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반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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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반성문
2023.06.16.
작렬하는 아침햇살 때문에 눈을 뜬 태혁은 술기운이 남아 있어서 기분이 별로였다.
그는 어젯밤 일이 생각나서 성마르게 마른세수했다.
“도대체 뭐라고 지껄인 거야.”
할 말 못 할 말 다 해버린 기분이었다.
이래서 취중 진담이라는 말이 있나 보다. 멀쩡한 정신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촌스러운 말들이었다.
그는 비척거리며 일어나서 물을 마시기 위해 방문을 열고 나갔다.
주방으로 간 태혁은 식탁 위에 차려져 있는 아침을 보고 멈칫하며 멈추어 섰다.
북엇국이었다.
<따뜻하게 데워 먹어요.>
나영이 남기고 간 게 분명한 쪽지를 읽고 그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뭐야. 화난 거 풀린 건가.”
아님, 또 술 먹고 전화 안 받으면 국물도 없다는 경고일 수도.
그래도 다정함이 느껴지는 질책이라 나쁘지 않았다.
태혁은 식탁 앞에 앉아서 북엇국을 먹었다.
간이 짠 걸 맛보고 확신했다. 이건 나영이 직접 만든 게 맞다고.
***
태영건설.
장수호는 전무실의 호출을 받고 문성철 전무를 찾아갔다.
“어제 술 마셨나 보지?”
문성철 전무가 처음 꺼낸 말에 장수호는 뜨끔했다.
그가 같이 술 마신 사람이 누군지 알면 문성철 전무는 분명 그에게 배신감을 느낄 테니까.
아니, 이미 그리 느끼고 있을 거다.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그의 얼굴을 문성철 전무는 냉랭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장수호는 상사에게 아부하지 않는 곧은 성격이라서 마음에 들었었다.
일 잘하는 직원은 많아도,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는 직원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그 성격 때문에 그와 척을 지는 선택을 할 줄은 몰랐다.
문성철은 서류 봉투를 장수호의 앞으로 던졌다.
“이걸 최태혁한테 가져다줘.”
최태혁한테 보내는 물건이란 말에 장수호는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제가 봐도 되는 겁니까?”
장수호가 서류를 확인하기 전에 문성철이 직접 말해주었다.
“최남기 페이퍼컴퍼니 비자금 관련 서류야.”
비자금이라는 말에 장수호의 낯빛이 굳어졌다.
문성철이 태혁을 향해 빼든 칼날의 끝은 그의 할아버지를 향하고 있었다.
“계속 내 딸 만날 거면 그 서류는 검찰에 넘길 거라고 전해.”
그러니까 할아버지와 나영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뜻이었다.
장수호는 괴로운 표정으로 문성철을 보았다.
“전무님은 최태혁 교수한테 이러시면 안 됩니다.”
“너야말로 그 인간이 최남기 손자라니까 그쪽에 붙고 싶어졌어?”
“최태혁 교수는 전무님 딸을 구…….”
만약 어제 술 마시면서 태혁이 한 말이 없었다면 장수호는 그 자리에서 모두 밝혔을 거다. 증거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내가 나영이 구한 거 문성철 전무한테 절대 말하지 마.’
‘왜요?’
‘그걸 말한 순간 난 문성철 전무 딸 유괴사건과 관련 있는 사람이 되는 거야. 진실을 밝히지 못한다면 그게 용서가 될 거 같아?’
문성철한테는 그가 최남기의 손자인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일 거다.
장수호가 말을 하려다가 멈추자 문성철은 더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축객령을 내렸다.
“나가 봐.”
장수호는 그대로 전무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류 봉투를 꽉 움켜잡았다.
‘대가를 바라고 구한 게 아니었으니, 몰라준다고 해도 상관없어.’
정말 상관없을 리가 없다.
이 서류를 보게 된다면 더더욱 괜찮지 않을 거다.
장수호는 최태혁한테 이걸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어제는 최태혁과 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처음으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오늘은 그를 절벽 끝으로 몰아넣는 일이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이라는 게 너무 참담했다.
***
한강대학교 병원.
태혁은 병원에서 나영과 마주칠 때마다 시선을 마주치려고 노력했지만, 그녀는 한 번도 눈을 제대로 맞추지 않고 무시했다.
그래서 그녀가 아직도 그한테 화가 덜 풀린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쩐지 두 사람의 연애는 그가 나영을 화나게 하면 그가 열심히 용서하는 일의 반복인 거 같았다.
설마 장수호 때문에 그가 화내는 게 아니라 그녀가 화내게 될 줄이야.
이 정도면 거의 구제불능 수준 같았다.
태혁은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풀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는 평생 남의 눈치 안 보고 살 줄 알았건만, 시어머니한테 시집살이 당하는 며느리보다 지금 그가 더 나영의 눈치를 보는 거 같았다.
그래도 남자가 져주어야 잘 산다고 하니 몹시 나쁜 건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 삼았다.
그러니 여자 앞에서 잘못을 빌 때도 비굴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했다.
꽃을 왕창 보낼까?
그런데 프러포즈하는 것도 아니고, 잘못한 걸 비는 건데 꽃으로 환심 사려는 건 너무 겉치레 같았다.
태혁은 자신이 지금 해야 할 게 반성문이라는 걸 깨닫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 다닐 때 밥 먹듯이 썼던 게 반성문이었다.
그런데 이 나이 먹어서도 그걸 써야 할 순간이 올 줄이야.
태혁은 종이 한 장을 꺼내 앞에 놓고 펜을 집어 들었다.
첫 글자를 쓰는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반성문>
오랜만에 써 보는 세 글자가 퍽 반갑기도 했다.
그래, 사람은 잘못하면 반성할 줄 알아야 했다. 그래야 제대로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었다.
태혁은 왕년에 반성문 좀 써 본 솜씨를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했다.
***
승희는 밥을 먹으면서 나영의 기분을 살폈다.
“아직도 최 교수님한테 화났어?”
“그런 거 아냐.”
나영은 아니라고 했지만, 표정이 애인한테 철벽 치고 있는 여자 얼굴이었다.
“나는 네가 연애하면 바뀔 줄 알았거든. 근데 똑같네.”
승희의 말에 나영은 밥 먹던 걸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나영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승희가 바로 정정했다.
“나쁜 뜻 아냐. 도도하고 멋있어.”
“나도 알아. 나한테 애교 없는 거.”
나영은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오히려 항상 거만하고 위압적일 거 같은 최태혁이 그녀의 앞에서 소년처럼 바뀔 때가 많았다.
“넌 애교가 없어도 예쁘잖아.”
지금은 그 말이 전혀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녀도 이젠 귀여운 여자가 되고 싶었다. 세상에 행복한 일만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정신 차리고 보면 태혁의 앞에서 그녀는 정색하고 서 있었다.
“만약 너라면 애교를 어떻게 부릴래?”
나영이 승희에게 묻자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간단하게 말했다.
“교수님 하지 말고, 교뚜님.”
나영은 자신이 방금 뭘 들은 건가 싶었다.
“귀엽지?”
“…….”
승희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거 같고, 만약 누군가 귀여움을 주제로 강의한다면 꼭 돈 내고서라도 듣고 싶었다.
삑삑.
나영은 방금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반성문’이란 세 글자가 적힌 종이의 사진과 함께 태혁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바쁘지 않으시다면 부디 제 방으로 강림해 주시길.>
“…….”
애교도 이쪽이 더 잘하는 거 같았다.
아마 최태혁 교수는 아이 낳는 것만 빼고 다 할 수 있겠다.
사실 그한테 그렇게 크게 화난 건 아니었다.
그가 취중에 한 말 때문에 마음이 울컥했으니까. 그녀한테 상처 안 주기 위해서 안전한 길을 찾았다는 게.
그러나 술 먹고 전화 안 받은 건 정말 못된 행동이었기에 이렇게 쉽게 용서해 주면 안 될 거 같아서 오늘 무시했던 거였다.
본인이 직접 반성문을 쓴 걸 보니 자신이 무얼 잘못한 건지는 알고 있는 듯했다.
반성문을 어떻게 썼나 궁금했기에 나영은 그의 연구실로 가보기로 했다.
***
똑똑.
노크해도 안에서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나영은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뜻밖에도 연구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가 오는 동안 호출 콜이라도 받고 나갔나 보다.
“그럼 연락해야지.”
또 그녀에게 연락을 안 했다는 것에 툴툴거리며 나영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책상 위에는 태혁이 사진으로 찍어 보낸 반성문 원본이 놓여 있었다.
나영은 손을 뻗어서 반성문을 들어 올렸다.
읽기도 전에 빼곡히 써진 반성문을 보니 실소가 흘러나왔다.
설마 그를 이 병원에서 처음 마주칠 때만 해도 교수님한테 반성문 받아볼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깊이 반성합니다. 나는 장수호와 술을 마셔서는 안 되었습니다. 내 여자와 맞선을 본 놈과 그리 쉽게 겸상하다니. 미운 정도 정이라고 내 마음이 나약해진 탓이었습니다. 앞으로 장수호와는 보리차도 같이 마시지 않겠습니다.”
나영은 반성문의 처음을 읽다가 멈추었다.
왜 반성문을 읽는데 그녀가 기분이 찝찝해지는 건가 싶었다.
나영은 우선 참기로 하고 반성문을 계속 읽었다.
“그리고 깊이 반성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영의 전화를 못 받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제야 본인이 잘못한 게 나오자 그녀의 마음이 좀 편해졌다.
“나영은 내가 보고 싶어서 전화했을 텐데 그걸 안 받는 건 나쁜 놈입니다.”
왜 내가 전화한 이유를 멋대로 확신하는 건데.
나영은 한 번 더 꾹 참고 반성문을 계속 읽었다.
“앞으로 나영의 전화를 한 번 안 받을 때마다 문나영의 노예로 하루를 살겠습니다. 술 마시는 동안 부재중 통화가 7통이었으니, 앞으로 일주일 동안 주인님의 뜻을 따르는 충실한 노예가 되어 반성하겠습니다.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노예라는 말에 나영은 귀가 달아올랐다.
“이게 뭐가 반성문이야.”
“그런 것치고는 좋아하는 거 같은데.”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태혁의 목소리에 나영은 기겁하며 몸을 꺾었다.
탁.
태혁의 두 손이 책상을 잡으며 그녀의 몸을 두 팔 안에 가두었다.
나영은 밀착해 오는 그의 단단한 몸을 손으로 밀어내며 반성문을 그의 얼굴 앞으로 들이밀었다.
“반성문이 빵점이에요. 다시 쓰세요.”
하지만 태혁은 동의할 수 없었다.
“확실하게 내 잘못을 인정하고, 확실하게 벌까지 받겠다고 했는데. 이것보다 어떻게 더 잘 써?”
“그냥 장난친 거잖아요.”
“그럼 진심으로 네 말에 복종하는 노예가 되면 완벽한 반성문이 되는 거고?”
내리 깐 그의 긴 눈매는 아슬아슬한 분위기로 몰아갔다.
나영은 당장 그의 잘못을 제대로 혼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입안이 마르며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한테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주인님.”
교수님이 변태 되는 거 한순간이었다.
나영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 키스해 달라고요?”
아니야!
머리는 부정했지만, 몸은 이성을 배반하고 제멋대로 뜨거워졌다.
아직 그와 함께한 잠자리의 기억이 선명하기에 말만으로도 심장이 고삐 풀린 듯 뛰어댔다.
“그럼 어떤 키스를 해드릴까요? 주인님.”
그가 말할 때마다 숨결이 그녀의 입술을 터치했다.
이젠 그녀까지 변태가 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