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날 마음대로 해
(68/84)
68화. 날 마음대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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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날 마음대로 해
2023.05.26.
나영은 이게 꿈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막 잠에서 깨어나 몽롱했고, 이 시간에 태혁이 그녀의 방에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태혁의 손이 뻗어와서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졸리면 더 자.”
나영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정말, ……절 사랑해요?”
그녀는 감히 그런 말을 할 용기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그녀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니 아주 큰 빚을 진 기분이기도 했다.
태혁이 턱을 괴며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왜? 거짓말 같아?”
그의 자세도, 그의 말투도 좀 불량해서 나영은 눈에 힘이 들어갔다.
“설마 제가 교수님한테 거짓말했다고 그런 걸로 거짓말하는 거예요?”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최태혁 교수가 평소에 그렇게 속이 넓은 편은 아니었으니까.
“아!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거짓말에는 거짓말이라고?”
태혁이 계속 똑바로 대답 안 하고 말을 빙글빙글 돌리자 나영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며 태혁은 속으로 웃음을 꾹 참았다.
“거짓말이라도 또 듣고 싶어요. 다시 말해주세요.”
하지만 생각도 못 한 그녀의 말에 태혁은 단숨에 무너졌다.
그는 침대 위로 쓰러지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네가 이겼다. 이제 날 마음대로 해.”
나영은 그녀의 몸 위로 쓰러진 태혁의 어깨를 손으로 때렸다.
그녀는 그와 장난칠 기분이 아니었다.
그저 사랑한다는 말을 또 듣고 싶을 뿐이었다.
***
우물우물.
승희는 아침을 먹으면서 눈동자를 양쪽으로 움직였다.
아침부터 독사가 나영의 밥에 반찬 올려주는 걸 보고 있으려니 황 여사의 도시락을 먹는 게 상이 아니라 벌처럼 느껴졌다.
“황 여사님 새벽부터 도시락 만드느라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일찍 주무시니까 괜찮을 거야. 너나 많이 먹어. 살이 빠졌네.”
두 사람이 오순도순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승희는 자신이 투명 인간처럼 느껴졌다.
일 있다면서 먼저 간 홍식이 보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내가 미각을 잃었나 봐. 아무 맛이 안 느껴져.”
승희의 말에 나영이 고개를 돌리자 최태혁 교수가 냉정하게 한마디 했다.
“지금 감히 반찬 투정하는 거야?”
승희는 바로 밥을 입안 가득 떠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다 먹었습니다. 두 분 맛있게 드십시오.”
후다닥 도망가는 승희의 뒷모습을 보고 나영은 그를 나무랐다.
“밥 먹을 때는 뭐라고 하지 마세요.”
“쟤는 고생을 좀 해봐야 해.”
사는 게 얼마나 편했으면 차현의 말 한마디에 그리 흔들릴 수 있는가.
몸만 스물일곱이고, 정신연령은 아직도 열일곱이 분명했다.
“저는 승희가 밝아서 좋아요.”
“나는 네가 쌀쌀맞아서 너무 좋아.”
최태혁 교수가 그리 말하며 그녀의 밥 수저 위에 반찬을 올려주자 나영은 그를 흘겨보았다.
“교수님은 저한테만 친절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잘해주세요.”
태혁은 황 여사가 디저트로 싸준 수정과를 나영의 컵에 따라주며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기꺼이 너의 종이 될 수 있지만, 딴 인간들이 나한테 기어오르면 죽여버릴 거야.”
농담을 하는 건지, 진담인지.
하여튼 그녀한테 잘해주려고 하는 건 느껴졌기에 나영도 더 뭐라고 하지 않았다.
“장수호 씨 만났을 때 혹시 엄청 무례하게 굴었어요?”
장수호한테 직접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이젠 그러면 안 될 거 같아서 일부러 태혁에게 물었다.
태혁은 조건반사처럼 그 이름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 인간이 나한테 무례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그럴 리 없다는 걸 나영은 너무 잘 알아서 말없이 태혁의 얼굴을 쳐다만 보았다.
그게 대답이었기에 태혁은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진짜 마음에 안 드는 자식이야.”
장수호가 한 모든 행동이 이타적이어서 더 짜증 났다.
그가 멱살 잡을 틈을 주지 않으니까.
나영은 태혁의 손 위에 그녀의 손을 올리며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그래도 우리 도와주는 사람인데, 좀 친절할 수 없을까요?”
나영은 아버지와 제대로 대화를 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잘 안 났다.
하지만 장수호는 지난 몇 년 동안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 바로 옆에서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태혁은 심각한 얼굴로 음모론을 펼쳤다.
“혹시 장수호가 우릴 안심시키기 위해 행동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나는 그 인간이 딱 그럴 거 같은데.”
태혁은 무조건 장수호를 나쁜 쪽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거 같았기에, 나영은 태혁의 손을 꽉 움켜잡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냥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그녀가 너무 간절히 말해서 태혁도 다소곳이 듣기만 했다.
“절대 장수호 씨 때리지 마세요. 아셨죠?”
태혁은 나영의 손을 뿌리치며 몸을 뒤로 뺐다.
“너 지금 나 깡패 취급하는 거야?”
“교수님이 응급실에서 행패 부린 거 다 들었어요.”
태혁은 바로 두 손을 모은 공손한 자세로 변명했다.
“그건 내 탓 아냐. 그것들이 먼저 예의가 없었어.”
나영은 눈꽃처럼 예쁜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수정과를 마셨다.
태혁은 그 앞에서 작아졌다가 설렜다가 혼자 마음이 바빴다.
***
퇴근하기 전에 태혁은 오승준을 찾아갔다.
“장수호를 처리해야겠어.”
마치 살인 청부업자처럼 그가 말하자 오승준은 걱정할 필요 없다고 손을 내저었다.
“우리 승희랑 연결되면 다 해결되니까 걱정 붙들어 매.”
태혁은 오승희한테 무전기 준 게 양심에 찔려서 오승준에게 주머니에 있던 초콜릿을 내밀었다.
최태혁에게 먹을 걸 처음 받아보는 승준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 네가 14년 만에야 나의 고마움을 깨달았구나. 참 오래 걸렸다. 오래 걸렸어.”
태혁은 굳이 그 말을 부정하지 않고 맛있게 먹으라고 손짓했다.
오승준은 바로 초콜릿을 까서 먹으며 말했다.
“그리고 너 장수호한테 그러면 안 돼. 장수호는 널 위해서…….”
술술 말하던 승준은 장수호가 당부했던 게 떠올라서 말을 멈추었다.
-제가 유괴범 찾아가는 거 비밀로 해주십시오. 나영 씨가 알게 되면 분명 그때처럼 크게 스트레스받을 겁니다.
나영이 모르게 하라는 말은 최태혁도 몰라야 한다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지금 두 사람은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오승준이 말하다가 말자 태혁은 눈을 부라리며 타박했다.
“너까지 장수호한테 넘어간 거냐? 14년 알아봤자 다 소용이 없네. 한 번 만난 사람보다도 못하니 말이야.”
“그런 거 아냐.”
오승준은 허허허 소탈한 사람처럼 웃으며 부정했다.
태혁은 주먹을 꽉 쥐며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인간이 내 인생에 끼어든 후 더 재수가 없어진 거 같아.”
“그건 네 착각이야.”
장수호는 자기 안전까지 뒤로 미루고 최태혁을 살리려 하고 있었다. 최태혁은 이렇게도 싸가지가 없는데 말이다.
그 인성에 탄복한 승준은 꼭 그의 여동생이랑 연결해 주고 싶어졌다.
세상에 그런 남자 또 없었다.
“넌 나중에 꼭 장수호한테 감사해야 해.”
퍽.
결국 태혁이 참지 못하고 오승준의 다리를 걷어차 버렸다.
얻어맞은 승준은 세상 억울한 눈으로 항의했다.
“야! 먹을 거 주면서 때리는 법이 어디 있어! 초콜릿을 주지를 말던가!”
태혁은 일어나서 오승준의 방에서 나가 버렸다.
장수호 편만 드는 오승준한테 도움을 구할 바에는 차라리 나영이 퇴근하길 기다리는 게 더 보람 있었다.
<정문에서 차 세우고 기다리고 있을게.>
나영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태혁은 차 운전석에 앉아서 무작정 기다렸다.
의사는 바빠서 연애 못 한다는 말이 새삼 실감이 났다.
병원에서 두 사람의 사이를 숨겨야 하니까 더 그런 거 같았다.
지금도 이런데, 나영의 아버지를 만나고 나서는 어떻게 될지.
태혁은 핸들에 두 팔을 올리고 얼굴을 묻었다.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피해서도 안 되었다.
“장수호를 또 만나긴 해야겠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상황에서 그를 도와줄 수 있는 게 하필이면 그 남자뿐이었다.
정말 싫다.
진짜 못 참겠는데, 옛날처럼 깽판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른이면 어른다운 방법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똑똑.
창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자 태혁은 고개를 들었다.
나영이 아니라 박 과장이 서 있는 걸 보고 그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박 과장은 퇴근하다 그의 차를 발견하고 아는 척한 것이었다.
“최 교수, 여기서 뭐 해?”
“누구 기다립니다.”
태혁이 솔직하게 말하자 박 과장은 바로 손짓하며 말했다.
“괜히 사고 치지 말고 빨리 집에나 들어가.”
안 그래도 기분이 복잡했던 태혁은 그 말에 울컥했다.
그는 이제 막 살던 10대 소년도 아니고, 엄연히 대학병원 외과 교수가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저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한다니!
“과장님 눈에는 제가 매일 사고만 치는 사람입니까! 그럼 저한테 어떻게 믿고 환자를 맡기세요!”
태혁이 버럭 화를 내자 박 과장은 흠칫 놀랐다.
“너 뭐 잘못 먹었냐? 왜 갑자기 화를 내!”
“과장님이 먼저 저한테 막말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너한테 막말했어! 집에 가라고 인사한 거지.”
“그럼 딴 사람한테도 사고 치지 말라고 인사한다고요? 누구요? 누구한테 그랬어요?”
“너 지금 나한테 따지냐? 이러다 사람도 치겠다!”
“저도 노인은 안 때려요.”
“누가 노인이야!”
그가 박 과장과 말싸움하고 있을 때 정문에서 나오던 나영이 그 모습을 보고 멈칫하며 멈추어 섰다.
그리고 바로 몸을 돌려서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모르는 사람이라는 듯이.
***
“너는 말이야. 어떻게 날 무시하고 그냥 혼자 갈 수가 있어. 내가 거기서 널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데.”
운전대를 잡은 태혁이 한껏 서운한 목소리로 원망하자 나영은 창밖을 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교수님이 과장님이랑 싸우고 계셔서 제가 양보한 거예요.”
아직 억울함이 안 풀린 태혁은 항변했다.
“과장님이 먼저 나한테 막말을 했다고.”
“과장님 말도 못 참으면 저희 아버지는 어떻게 참으려고요?”
할 말이 없어졌는지 태혁이 입을 꾹 다물고 앞만 응시하자 나영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오늘 저 기다린 거 후회하세요?”
“아니, 과장님 앞에서 내가 조금만 참을 걸 후회 중이야.”
사실 그가 한 번 참았으면 달밤에 박 과장과 아름답지 못하게 말싸움할 일도 안 생겼다.
결국 지금껏 벌어졌던 모든 사고의 원인이 그인 거 같아서 태혁은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런 태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영이 물었다.
“지금 우리 집에 데려다주는 거예요?”
“응.”
“저 가고 싶은 곳 생겼는데.”
“지금 이 시간에?”
의사는 일 끝나고 난 뒤 데이트할 시간이 없었다.
잠잘 시간도 부족했기에.
“네.”
“어디?”
“1005호요.”
그녀의 말을 듣고 태혁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나영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