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내가 널 사랑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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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내가 널 사랑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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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내가 널 사랑해서
2023.05.22.
승희는 집으로 들어와서 나영의 방으로 향했다.
최태혁 교수가 제대로 닫지도 않고 간 문 사이로 방 안의 풍경이 보였다.
나영은 아직도 어항 앞에서 물고기와 함께 있었다.
최태혁 교수도 까망이를 이기지는 못했나 보다.
으이그, 못난 남자.
“그 반지 별로 안 비싸대.”
승희는 문 뒤에서 얼굴만 내민 채 나영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그 반지 때문에 그렇게 마음 상해할 필요 없다고.
“나도 알아.”
나영이 안다고 하자 승희는 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면서 왜 꼭 그 반지여야 해?”
이참에 최태혁 교수한테 더 비싼 반지로 받아내는 게 이득이었다.
“의미가 있으니까.”
그가 그녀를 위해 처음 산 반지였다.
그녀가 그한테 거짓말한 증거였다.
두 사람이 함께한 기쁨과 괴로움이 그 반지에 모두 담겨 있었다.
그걸 버리고 새로 사면, 꼭 그들의 관계도 쉽게 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찾게 될 거 같았다.
나영은 그러기 싫었다.
힘들어도 꼭 붙잡고 끝까지 이겨내고 싶었다.
최태혁 교수는 10분 만에 돌아왔다.
차로 왕복 10분인 걸 고려하면 차에서 내렸을 때 엄청나게 뛰었나 보다.
“반지 가져왔어.”
그의 말에 그제야 나영은 고개를 돌려 태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태혁은 괜히 울컥했다.
사실은 아까 장수호를 만났을 때부터 계속 참고 있었다. 정확히 무언지도 모를 이 감정을.
나영은 손을 올려 앞으로 내밀었다.
꼭 반지를 끼워달라는 듯이.
태혁이 그녀의 손을 가만히 보고만 있자 밖에서 훔쳐보던 승희가 재촉했다.
“어서 반지 끼워주세요!”
탁.
태혁은 문 먼저 닫아버렸다.
더 이상 훔쳐볼 수 없자 승희는 문밖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영화 클라이막스에 쫓겨난 관객이나 마찬가지였다.
달칵.
태혁은 상자를 열어서 그 안에서 작은 반지를 꺼냈다.
“이 반지 다시 보니까 왜 이리 볼품없냐.”
오늘 감정 소비가 많아서인지 시각도 팍팍해졌다.
태혁은 진짜 다시 사고 싶었다.
이번엔 정말 정성을 들여서 고르고 고를 거다.
그리고 어디 숨기는 유치한 짓 따위는 절대 안 하겠다.
그냥 폼나게 최고급 호텔 예약해서 꽃다발 들고 샴페인 터트리며 같이 주겠다.
“볼품없어도 저한테는 소중해요.”
그 말이 꼭 그가 하자 많은 사람이라도 소중하다는 뜻으로 들려왔기에 태혁은 목이 꽉 막혀왔다.
그는 반지를 그녀의 약손가락에 끼웠다.
볼품없던 반지도 하얗고 우아한 그녀의 손가락에 자리 잡으니 전혀 다른 느낌이 되었다.
“예쁘네.”
저도 모르게 그 말이 흘러나왔다.
나영이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금방 부서질 듯한 얼굴로 그리 웃으니 그가 미칠 거 같았다.
태혁은 그녀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감싸 쥐고 끌어당겨 입술을 부딪쳤다.
한 움큼 베어 물 때마다 달아오른 숨결에 취하는 듯 몸이 뜨거워졌다.
그녀가 녹아 없어질 때까지 키스를 멈추기 싫었다.
스르륵.
하지만 그녀의 몸이 힘없이 무너지는 걸 느낀 태혁은 깜짝 놀랐다.
“문나영!”
그녀가 눈을 꼭 감고 움직이지 않아서 태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승희는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침대에 누워 있는 나영을 응시하며 물었다.
“진짜 잠든 거 맞아요?”
승희가 의심하자 태혁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의사야.”
여기 의사가 세 명이나 있었지만 이 상황은 참 바보 같았다.
키스하다가 기절하듯이 잠들다니.
“도대체 며칠이나 안 잔 거야?”
“아! 교수님은 잘 주무셨나 봐요.”
이죽거리고 나서 승희는 반사적으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몸을 사렸다.
보통 이럴 때 최태혁 교수는 그녀한테 물건을 던졌기에.
그런데 조용해서 승희는 손가락 사이로 살펴보았다.
최태혁 교수가 손에 물건을 쥐고 있기는 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건 무전기였다. 꼭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올 거 같은.
“받아. 네 거야.”
“네? 저 이런 물건 산 적 없는데.”
승희가 자기 물건 절대 아니라고 부정하자 태혁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차현 말 때문에 아무 남자나 만나보려고 했다며.”
딱히 아무 남자는 아니었다.
“장수호는 정말 괜찮은 남자였는데요.”
승희가 장수호를 칭찬하자 태혁이 바로 화난 표정을 지었다.
승희는 진짜 무전기에 얻어맞을까 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태혁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 무전기를 왜 가져왔는지 계속 설명했다.
“이 무전기는 아날로그라 직경 1km 안에 있어야 연결이 돼.”
진짜 골동품 맞았다. 요즘 무전기는 LTE라서 전화처럼 아무 곳에서나 연결되었다.
“살 거면 성능 좋은 걸로 사시지 왜 굳이 이걸?”
“내 말 다 끝날 때까지 입 다물어라.”
승희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태혁은 승희의 앞에 무전기를 놓아주며 말했다.
“이 무전기와 연결된 다른 무전기는 내가 차현한테 줄 거야.”
무전기를 차현한테 준다는 말에 승희는 눈이 커졌다.
“무전기가 안 터지면 답답하고 화나겠지. 그리고 연락하고 싶어도 안 터지면 슬프겠지. 그러다가 어쩌다 이 무전기가 연결되면 얼마나 기쁘겠어.”
결국 이 무전기 하나로 모든 희노애락을 다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애먼 남자 괴롭히지 말고 이 무전기로 희노애락을 느껴봐.”
“그럼 제가 이 무전기로 차현 감독님 괴롭히는 건 괜찮아요?”
승희가 무전기를 두 손으로 꼭 쥐며 묻는 말에 태혁은 덤덤히 대답했다.
“성인이라면 본인이 한 말에 책임을 져야지.”
승희는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차현 감독 전화번호를 얻으려고 애썼는데, 결국 이 무전기를 얻게 되었다.
이번엔 꼭 그녀가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된 것만 같아서 기분이 알록달록했다.
“대신 내가 너한테 이 무전기 준 거 문나영한테는 절대 비밀이다.”
태혁이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경고했다.
나영이 알게 되면 그한테 엄청나게 화낼 테니까.
승희는 무전기를 옷 속에 감추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이 좋은 분인 거 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승희를 무시하고 태혁은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있는 나영을 쳐다보았다.
아마 오늘은 깨어나지 않을 듯했다.
그럼 부디 좋은 꿈을 꾸길.
내가 네 옆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
***
늦은 밤 태혁이 집으로 찾아갔을 때 차현은 짐을 싸고 있었다.
“이번엔 또 어디 가는 거야?”
차현은 옷을 챙기며 말했다.
“뉴질랜드.”
“얼마나 있다 오는데?”
“나도 몰라.”
그럼 촬영이 아니라 그냥 여행 가는 거라는 소리였다.
어딘가로 불쑥 떠났다가 돌아오는 건 차현의 일상이었다.
“내가 무전기 주자마자 네가 해외 가버리면 내가 사기 친 거라고 생각하겠네.”
“무슨 소리야?”
태혁은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나는 오승희한테 있어.”
차현은 짐 싸는 걸 멈추고 무전기를 쳐다보았다.
“무슨 뜻이야?”
오승희의 친오빠 승준도 장수호를 만난 뒤에는 그쪽에 홀랑 넘어가서 그에게 따지는 걸 까먹었는데, 태혁이 굳이 왜 다시 들추는 건가 싶었다.
이대로 잊히는 게 가장 좋은 일이었다.
“네가 오승희한테 한 말 후회한다며.”
차현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랬다고?”
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어머니한테 끝까지 모질게 말한 거 후회한다며.”
그때는 차현의 생모가 이미 죽은 후였기에 그 후회를 돌이킬 방법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되돌릴 수 있었다.
오승희는 멀쩡히 살아 있었고, 아직 어떤 남자한테도 상처받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는 후회하지 말라고.”
그의 당부에 차현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게 그거랑 어떻게 같아.”
생모는 그를 버려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승희는 그한테 한 번도 상처 준 적 없는 사람이다.
“같지 않으니까 다행이지.”
태혁은 손가락으로 무전기를 가리키며 오승희한테 한 것처럼 똑같이 설명했다.
“직경 1km 이내에 있어야만 연결돼. 오승희가 이걸 가지고 있는 한 네 말 때문에 인생 막 사는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이 무전기를 가지고 있으면 계속 그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히려 그게 오승희한테는 더 나쁜 일일 수도 있었다.
“네가 나한테 이걸 준 걸 알게 되면 문나영이 화낼 거야.”
“알아.”
“그런데 나한테 이걸 준다고?”
오승희한테는 나영에게 말하면 가만 안 둔다고 협박했지만, 차현에게는 웃으며 말했다.
“나영이 오승희 편이면, 난 네 편이니까.”
차현은 태혁의 얼굴을 보았다.
문득 두 사람이 처음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너도 엄마 없냐? 나도 없는데.
구질구질하게 시작된 인연이었다.
그때부터 가족과 함께했어야 할 순간에 두 사람은 항상 함께 있었다.
그래서 차현은 살면서 수없이 많은 이별을 겪었고, 앞으로도 그런 삶을 살 테지만, 태혁과의 이별만은 결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 뉴질랜드 다녀와서 보자.”
“근데 뉴질랜드에 양 치러 가냐?”
태혁은 정말 별로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라면 절대 양 치려고 그 멀리까지 안 간다는 듯이.
차현은 웃으며 무전기를 여행 가방에 집어넣었다.
통신 거리가 고작 1km인 아날로그 무전기가 바다 건너 뉴질랜드에서 터질 리는 절대 없었지만.
***
태혁은 차현의 집에서 나와 다시 나영을 만나러 왔다.
집 비밀번호는 무전기를 대가로 승희에게 갈취해 냈다.
태혁이 다시 돌아왔을 때도 나영은 깊게 잠이 들어 있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르겠네.”
태혁은 침대에 걸터앉아서 자는 나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반지 끼고 화해할 수 있었지만, 나영의 아버지는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장수호를 나영에게 보낸 건 그를 포기시키기 위해서였다.
딸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에 트라우마가 있는 아버지한테 그는 딸에게 어울리는 상대로 절대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걸 태혁도 잘 알았다.
태혁은 나영의 손 위에 자기 손을 포갰다.
“약속할게. 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해도 난 상처받지 않을 거야.”
가장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나영 아버지의 검찰 지검장 친구가 어떤 꼬투리라도 찾아내서 그를 잡아가는 것이었다.
“잡혀가도 문제없어. 난 경찰서 경험이 풍부하니까.”
그러니까 그의 과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꾹.
그의 손을 붙잡는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감겨 있던 나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흑진주 같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니 태혁은 빛이 그의 몸 안으로 스며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교수님이 왜 잡혀가요?”
그의 혼잣말을 들은 듯이 나영이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태혁은 법정에서 판사 앞에서 대답하듯이 심각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널 사랑해서.”
그 이유 하나만으로 태혁은 절대 그녀와 헤어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