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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그깟 반지가 나보다 중요해? (66/84)


66화. 그깟 반지가 나보다 중요해?
2023.05.19.



 
승희가 방문을 열었을 때 나영은 어항 앞에 앉아서 물고기를 보고 있었다.

예전엔 인형만 붙잡고 있더니, 이젠 인형을 안고 어항 속 물고기까지 보고 있으니 심연이 두 배로 깊어진 느낌이었다.


“나영아. 밥 먹어.”

벌써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나영은 깨어나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생각 없어.”

“밥은 생각하고 먹는 게 아니라, 때 되면 먹는 거야.”

승희는 이제 최태혁 교수한테 항의하고 싶어졌다.

남자가 왜 이리 오래 삐져 있는 거란 말인가. 쪼잔하게.


“최 교수님 때문에 굶으면 너만 손해야.”

승희가 설득해도 나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승희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한탄하듯이 말했다.


“내가 너를 보고 결심했어. 연애 따위 절대 안 하겠다고.”

그제야 나영이 고개를 돌려 승희를 쳐다보았다.


“그럼 나랑 약속할 수 있어?”

“네가 지금 밥만 먹으면 뭐든 약속할게.”

나영이 일어나서 방문으로 걸어오자 승희는 활짝 웃었다.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반찬은 승희 어머니가 싸주신 것이었고, 국만 승희가 직접 끓였다.


“어서 먹어.”

승희가 반찬을 나영의 앞에 밀어주며 엄마처럼 챙겼다.

나영은 수저로 국을 떠 입에 가져갔다.

그녀는 먹기 전에 말했다.


“내가 이거 먹으면 너 차현 감독 전화번호 완전히 포기하는 거다.”

탁.

막 먹으려고 했는데 그녀의 손목을 승희가 순식간에 붙잡았다.

나영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승희를 쳐다보았다.

승희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그 전화번호 알아두려는 건 너 때문이야. 네가 이럴 때마다 도움 청하려고.”

그리 말하는 승희를 나영은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믿지 않는 거 같아서 승희는 강조했다.


“정말이야.”

“…….”

“정말이라니까.”

“…….”

“내가 사심이 있다고 해도 그쪽이 날 좋아할 리 없잖아.”

그리 말하는데 승희는 자신이 작아지는 기분을 처음 경험했다.

그건 아주 우울한 느낌이었다.

말이 없어진 승희를 쳐다보던 나영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지금 최태혁 교수와 장수호가 만나고 있을 거다.

이젠 그가 다 알아버리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거 같아서 우울했던 거다.

***



“부모님은 뭐 하시죠?”

제일 먼저 질문을 꺼낸 건 승준이었다.

차현이 실망이라는 눈으로 승준을 쳐다보았다.

여기 오면서 제일 난리를 친 장본인이 장수호를 보자마자 태도가 싹 바뀌었다.


“두 분 다 선생님입니다.”

“오! 선생님. 역시 가정교육 잘 받은 티가 난다고 했더니.”

승준이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가 싸늘한 태혁의 시선과 마주치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

장수호는 오래 침묵하는 태혁을 쳐다보며 먼저 맞선에 대해 해명했다.


“문나영 씨가 저를 만나고 가장 처음 한 말이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였습니다.”

나영이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니라는 걸 장수호가 확실히 밝히자 승준은 감탄했다.

사람이 마음까지 정직했다.

그러나 태혁은 그 말에 전혀 감동하지 않고 따져 물었다.


“그런데 왜 두 사람은 또다시 만날 정도로 할 이야기가 많았던 겁니까?”

장수호는 태혁이 아니라 차현과 승준을 쳐다보았다.

차현이 눈치 빠르게 말했다.


“그냥 말해도 됩니다. 전 태혁이 20년 지기 친구고, 이쪽은 문나영과 함께 사는 친구의 오빠니까.”

“아! 그럼 오승희 씨…….”

장수호의 입에서 승희의 이름이 나오자 승준이 크게 기뻐하며 장수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맞아요. 내가 승희 오빠야. 그쪽은 문나영보다 우리 승희랑 이어질 운명이었나 보네.”

“내가 장수호 안 때린다고 했지, 너 안 때린다고 한 건 아니다.”

태혁이 살벌하게 경고하자 승준은 잡았던 장수호의 손을 슬며시 놓았다.

장수호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리며 이유를 설명했다.


“전무님이, 그러니까 나영 씨 아버지께서 최태혁 교수의 뒷조사를 했습니다.”

뒷조사라는 말에 차현과 승준은 동시에 태혁을 쳐다보았다.

그는 굳은 표정이었지만 많이 놀란 거 같지는 않았다.


“최 교수님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전무님은 모두 알고 계십니다.”

파르르 떨리는 태혁의 눈썹을 보고 차현은 고개를 돌려 장수호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 상사 대신에 문나영한테 태혁이랑 헤어지라고 설득한 겁니까?”

“그, 그건 좀 너무했네.”

승준도 그거까지는 좋게 볼 수 없었다.

장수호는 태혁한테 시선을 고정한 채 끝까지 담담한 말투를 유지했다.


“문나영 씨가 저한테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던 겁니다.”

“당신이 뭘 도와줄 수 있는데?”

태혁의 핏발 선 눈이 찌르듯이 장수호를 향했다.

이 남자는 꼭 야생동물 같다고 생각하며 장수호는 대답했다.


“나영 씨가 바란 건 하나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당신을 다치지 않게 하는 거.”

태혁의 눈동자가 여리게 깨어졌다.

지켜주는 건 그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엔 나영이 그를 지켜주려고 했다.

그의 뒤에서, 그도 모르는 사이에.

똑바로 살지 못한 그의 과거 때문에, 불운만 계속되었던 그의 가족사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는 최태혁 교수님 사진이 필요합니다.”

장수호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온 목적을 꺼내놓았다.

그런데 그가 다 설명하기도 전에 태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최태혁! 너 어디 가?”

승준이 놀라서 태혁을 불렀지만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저 녀석 갈 곳은 하나뿐이니까 부를 필요 없어.”

차현은 마저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서 장수호를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사진을 말하는 겁니까?”

장수호는 최태혁에게 직접 말하려고 했지만, 그가 떠나버렸으니 할 수 없이 그의 친구에게 말했다.


“10대 시절 오토바이 타던 사진이 필요합니다.”

장수호가 전혀 생각도 못 했던 사진을 달라고 하자 차현의 눈이 찌푸려졌다.


“도대체 그게 왜 필요하다는 겁니까?”

장수호는 17년 전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을 찾아서 돌아다니다가 알아챘다.

그날 최태혁이 문나영을 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 죽은 박재수 형사 말고 또 한 명 더 있다는 걸.


“그 사진을 들고 나영 씨를 납치했던 유괴범을 찾아갈 겁니다.”

장수호의 설명을 듣고 차현과 승준은 똑같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승준은 유괴사건을 처음 들었고, 차현은 그 유괴사건과 태혁이 관계있다는 걸 이 자리에서 처음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건 장수호였다.

만나자마자 맞선 파토 난 여자의 도와달라는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한다고?

차현의 상식으로는 무리였다.


“혹시 맞선 보기 전부터 문나영을 알고 있었어요?”

차현이 예리하게 질문을 던지자 장수호는 차현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영화감독이니 해외에 나갈 일이 많을 거 같은데. 맞습니까?”

장수호의 말이 꼭 일부러 대답을 피하는 거 같았지만, 차현은 끝까지 파고드는 대신 진지하게 물었다.


“맞다면, 내가 어딜 가야 하는 겁니까?”

장수호가 대답했다.


“뉴질랜드요.”

박재수 형사의 가족들이 이민 간 곳이었다.

***

딩동.

초인종 소리에 현관으로 달려간 승희는 문 앞에 서 있는 최태혁 교수를 확인하고 한탄했다.


“그래도 오긴 왔네.”

승희의 생각으로는 너무 늦은 거 같았지만, 그래도 온 게 어디인가.

승희는 현관문을 열어주며 최태혁 교수에게 환자 브리핑하듯이 오늘 나영의 상태를 주절주절 읊었다.


“제가 사정사정해서 겨우 식탁에는 앉혔는데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서 결국 밥을 안 먹었어요. 그리고 또 방에 틀어박혀서 물고기만 보고 있습니다.”

최태혁 교수는 구두를 벗자마자 곧장 나영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나 들어간다.”

노크하고 방문을 열고 들어간 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탁.

문이 닫히고 거실에 혼자 남겨진 승희는 중얼거렸다.


“찾아오는 건 겁나 느리더니, 여자 방에 들어가는 건 겁나 빠르네.”

승희는 잠시 이 집에 계속 있어도 되는 건지, 나가야 하는 건지 갈등하다가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

그가 방 안으로 들어와 서 있어도 나영은 계속 어항 속 까망이만 쳐다보았다.


“까망이가 날 닮아서 고른 거 아니었어?”

그런데 정작 그는 본체만체하다니 주객이 전도되었다.


“반지 돌려주세요.”

나영이 제일 처음 꺼낸 말은 반지였다.

꼭 그가 빼앗아 간 듯이 말했다.

태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거부했다.


“그건 다시 살 거야. 더 좋은 걸로.”

“난 다른 반지 필요 없어요. 그게 좋아요.”

“나는 그 반지가 이제 싫다니까.”

그 반지는 그가 심사숙고해서 고른 것도 아니었다.

그날 이 집에 오는 길에 문을 연 샵이 있기에 들어가서 즉흥적으로 샀다.

그 반지를 숨겨놓았다가 나중에 보물찾기하듯이 나영이 찾으면 재미있을 거 같아서.

그때는 이 반지를 나영이 찾았을 때 부디 두 사람이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는 그 반지로 그저 나영을 한 번 웃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개고생시키는 게 아니라.


“안 돌려줄 거면 그냥 가세요.”

냉정해도 이렇게 냉정할 수가 없다.

태혁은 조금 원망이 섞인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장수호한테 다 들었어.”

그녀가 그를 지켜주려고 했다는 거.

그래서 이렇게 그녀한테 올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냐고 화를 내고 싶었고, 그다음엔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다. 결국 그의 가족사가 또다시 발목을 붙잡았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냥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저랑 이야기하고 싶으면 반지부터 가지고 오세요.”

그런데 그녀는 재수 옴 붙은 그 반지 타령만 하고 있다.
 

 
태혁은 참을 수 없어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가 벌컥 문을 열고 다시 나갔다.

그래, 가져오면 되잖아. 반지 가지고 온다고!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서 돌아오던 승희는 태혁이 아파트 건물을 거친 걸음으로 걸어 나오는 걸 발견하고 놀라서 뛰어왔다.


“왜 벌써 나오세요? 나영이는요?”

태혁이 성난 눈으로 쳐다보자 승희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여자들은 왜 그러는 거야?”

“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태혁 교수가 그녀한테 그런 질문을 하니 승희는 너무 무서웠다.


“그거 금반지도 아니고, 은반지라고.”

설마 반지가 싸구려라는 건가?

그럼 돈 좀 쓰지. 교수 월급을 다 어디에 쓰는 건가.


“그런데도 그깟 반지가 나보다 중요해?”

이제 보니 투정이다.

자기가 산 싸구려 반지를 나영이 소중히 한다고 독사가 마구 투정 부리고 있었다.

성난 걸음으로 떠나는 최태혁 교수의 뒷모습을 질린 눈으로 보며 승희는 중얼거렸다.


“난 절대 연애 안 할래.”

분명 연애하기 전에는 멀쩡했던 사람들 같은데 다들 이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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