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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사소한 복수 (65/84)


65화. 사소한 복수
2023.05.15.


승희는 두 손을 비비며 나영의 표정을 살폈다.

반지에 대해서 최태혁 교수가 승준에게 한 말을 전해주었다.


“…….”

그런데 불안하게 그 말을 듣고도 나영은 한참이나 아무 말이 없었다.


“저기. 더 좋은 반지로 사려나 봐.”

그게 승희가 할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말이었다.

그래도 나영이 반응이 없자 승희는 손짓 몸짓으로 어제 있었던 일을 늘어놓았다.


“내가 어제 차 안에서 네 머리 좀 놓쳤다고 얼마나 날 잡아 죽이려고 하던지. 너 안고 가는 모습이 꼭 공주님 모시고 가는 호위무사 같았다니까.”

승희가 무슨 말을 해도 나영은 전혀 웃지 않았다.

꼭 인형 같았다.

원래 생긴 게 인형 같았기에 얼굴에 표정이 하나도 없으니 진짜 인형이었다.


“나 그만 들어가 볼게.”

그대로 가버리는 나영의 뒷모습을 보며 승희는 안절부절못했다.


“안 좋아. 정말 안 좋아.”

그녀는 진짜 희노애락을 겪어보기 위해서 연애를 하겠다고 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일을 가까이에서 보니 이젠 엄두도 안 났다.

승희는 도리도리 고갯짓을 하며 돌아갔다.

***

태혁은 나영이 호텔 방에서 놓고 간 귀걸이와 나영의 방에서 가져온 반지를 나란히 놓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혼잣말했다.


“이거 안 좋은 징조네.”

천재지변이 일어나기 직전 짐승들이 먼저 알고 떼 지어 도망치듯이, 그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기기 직전에는 어떤 기운이 있었다.

그 기운이 그가 직접 행운의 여신으로 점찍은 나영한테서 시작되어서 태혁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나영의 운보다 그의 불운이 더 강력한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그 때문에 나영까지 안 좋은 일을 겪는다면 태혁은 못 견딜 거 같았다.

그러니 괜찮아질 때까지 차라리 이 상태로 떨어져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방법이었다.

장수호를 만나려고 하는 건 맞선에 대해 화풀이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의 짐작이 맞나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날 카페에서 두 사람은 한참이나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승희와의 소개팅이 그저 연막이었다면 다른 이야기를 했다는 거다.

나영과 장수호가 함께 공유할 만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추측해보며 태혁은 의자를 빙글 돌렸다.

탁.

의자는 창가를 향했을 때 멈추었다.

태혁은 창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문나영 아버지.”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고, 얼굴도 모르건만 그 부름만으로도 무조건 그가 질 것만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심연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대로 꼼짝도 못 하고 있는데 그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태혁은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교수님. 그때 응급실에서 난리 피웠던 조폭들 또 오면 알려달라고 하셨잖아요. 오늘 또 왔습니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태혁은 바로 응급실로 내려갔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응급실 의사들이 조폭 환자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전에는 다친 박길상을 데려왔던 조폭이 이번엔 환자가 되어 나타났다.

싸우는 게 직업이었으니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그리고 본인도 다치는 게 그들에게는 일상이었다.


“X발. 의사가 수전증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여기 높은 사람 나오라고 해!”

“그래! 여기 대빵이 누구야! 우리 형님 몸에 상처 남으면 너희들 다 죽었어.”

겁을 먹고 손을 떠는 레지던트에게 험악하고 굴고 있는 환자 앞으로 태혁은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날은 그가 한발 늦어서 얼굴도 못 봤는데 오늘 이렇게 다시 마주쳤으니 태혁은 그들을 고이 보내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날 세 명이 떼거리로 나영을 협박했다고 했었다.

아쉽게도 오늘은 두 명뿐이었다.


“비켜 봐. 내가 할 테니까.”

갑자기 나타난 최태혁 교수를 보고 레지던트는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새롭게 등장한 그한테 조폭들이 눈을 부라리며 힘겨루기를 해오기에 태혁은 턱을 도도하게 들어 올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내가 그쪽들이 찾는 높은 사람입니다.”

응급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조폭들과 대치 중인 최태혁 교수를 지켜보며 수군거렸다.


“누가 이길 거 같아요?”

“그래도 저쪽은 진짜 조폭이잖아요. 최 교수님이 불리한 거 아니에요?”

“나는 왠지 독사가 이길 거 같아. 싸가지로 따지면 우리 독사도 만만치 않잖아.”

“그러면 독사가 처음으로 자신의 독으로 정의 실현을 하는 날이네요.”

병원 사람들은 다들 최태혁 교수가 조폭들을 물리쳐주길 기대하며 지켜보았다.

태혁은 레지던트가 꿰매던 상처를 무심하게 살펴보다가 손으로 그 부위를 힘을 주어 꾹 눌렀다.


“아악! 뭐 하는 거야!”

환자가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자 옆에 있던 부하 조폭이 바로 태혁을 향해 손을 올렸다.


“이 새끼가!”

태혁은 남은 손으로 날아오는 주먹을 붙잡고 그대로 팔을 꺾어버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발로 남자의 다리를 걷어차 무릎 꿇게 했다.


“아악!”

환자와 보호자가 모두 그의 손에서 비명을 지르는 걸 보고 응급실 사람들은 입을 쩍 벌렸다.

독사는 수술만 고수인 게 아니라 싸움도 고수였다.

태혁은 응급실 레지던트에게 지시했다.


“메스 가져와.”

메스라는 말에 레지던트는 깜짝 놀랐다.


“메, 메스를 왜요?”

그 환자는 상처 봉합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메스는 전혀 반대의 상황에서 필요한 수술 도구였다.


“이 환자 배를 갈라봐야겠어.”

태혁의 말에 조폭 환자가 사색이 되어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악! 경찰 불러! 의사가 사람 죽이네!”

심지어 조폭이 먼저 경찰을 찾아댔다. 그리고 응급실 의사들까지 달려와 그를 말렸다.

당연히 진짜 배를 가를 생각은 없었다. 겁만 준 거다.

응급실에서 사소하게 복수를 한 태혁은 조금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응급실을 나섰다.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가던 태혁은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나영을 발견하고 우뚝 걸음이 멈추었다.

나영도 응급실에서 나오는 그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추었다.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말없이 주고받는 눈빛에서 오히려 더 많은 말이 담겼다.


먼저 시선을 돌린 사람은 나영이었다.

그녀는 바로 몸을 돌려 응급실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 버렸다.

명백하게 그를 피한 것이었다.

태혁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화내야 할 건 난데, 왜 자기가 피하는 거야?”

태혁은 이대로 당하기 싫어서 그도 몸을 돌려 다시 응급실로 걸어갔다.

그녀만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도 피할 수 있었다.

또 응급실로 돌아온 그를 보고 응급실 레지던트가 경기하며 멈추어 섰다.


“왜, 왜 또 오셨어요?”

진짜 환자 배 갈라보려고 온 건가 싶어서 식겁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해.”

태혁은 그리 말하고 응급실 입구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거기 그냥 앉아만 있어도 엄청 신경 쓰이는 존재감이었기에 응급실 의사들은 그를 살펴보며 웅성댔다.


“왜 안 가는 거야? 오늘 진짜 누구 한 명 잡혀서 죽는 거 아냐?”

“그런데 아까랑 달리 좀 기가 죽은 거 같지 않아요?”

독사가 기가 죽었다는 말에 다들 눈이 삐었다며 그 말을 한 인턴을 핀잔주었다.

메스로 조폭 배도 갈라보려고 했던 사람을 누가 감히 기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불가능하다고 모두가 동의했다.

***

일요일이다.

최태혁이 문나영의 맞선 상대인 장수호를 만나기로 한 결전의 날.

그 장소에 같이 끌려가게 된 오승준은 이건 아닌 거 같다고 연신 고개를 저었다.


“우리까지 같이 가는 건 정말 아니야. 나는 폭력 반대라고.”

차현은 커피를 마시며 담담히 말했다.


“태혁이가 싸움을 잘하긴 하지만, 장수호를 때리려고 만나는 건 아닐 거야.”

“그걸 어떻게 장담해? 저 인간은 응급실에서 조폭 배도 가르려고 했다고.”

응급실에서 있었던 사건을 전해 들은 오승준은 오늘 더 최악의 일이 일어날 거라고 확신했다.

탁.

차현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이유를 말해주었다.


“홍식이를 안 불렀잖아. 싸움하려면 싸움꾼을 불렀겠지. 우리 같이 샌님이 아니라.”

그 말을 듣고 오승준은 바로 발끈하며 몸을 앞으로 당겼다.


“누가 샌님이야. 나도 싸움만 안 했다 뿐이지 운동 좀 했거든!”

“그럼 같이 가도 상관없겠네.”

오승준이 몸을 뒤로 빼며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


“남의 일에 왜 내 아까운 휴일을 낭비해야 하냐고.”

“장수호랑 네 여동생 소개팅했어. 그런데도 남의 일이야?”

소개팅이라는 말에 승준은 눈이 커졌다.


“뭐? 누가 누구랑 소개팅을 해!”

저승사자처럼 새카만 옷을 입고 막 방에서 나온 태혁은 오승준이 차현의 멱살을 잡고 화내는 걸 보고 쯧 혀를 차며 말렸다.


“오늘은 내 일이 더 급하거든. 네 여동생이랑 차현 일은 나중에 해결해.”

차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태혁을 나무라듯이 쳐다보았다.

오승준은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머리에 들어와서 멍한 상태가 되었다.

어째서 모태솔로 여동생한테 갑자기 남자들이 막 굴비 엮듯이 엮이는 건가.


“어? 그거 때문에 멱살 잡힌 게 아니었어?”

“난 장수호랑 소개팅한 거 말했을 뿐이야.”

“아! 쏘리. 내가 착각했네.”

태혁은 간단하게 사과하고 현관으로 걸어가 버렸다.

승준이 설명을 바라는 눈빛으로 차현에게 점점 얼굴을 들이밀자 차현은 뒤로 피하며 제안했다.


“우선 장수호부터 해결하자.”

승준도 이제 가야 할 이유가 생겼기에 세 남자는 함께 약속 장소로 향했다.

태혁은 두 사람에게 당부했다.


“내가 못 참고 주먹 쓸려고 하면 말려.”

그래서 일부러 두 사람이나 데려온 것이었다.

한 명으로는 부족할 거 같았기에.


“장수호 그 인간 문나영이랑 맞선보고, 내 여동생이랑 소개팅하고. 완전 양아치 아냐. 그런 놈은 좀 맞아야 해.”

그런데 한 명이 고장 나서 오히려 그보고 장수호를 때리라고 부추겼다.

차현이 짧게 헛기침을 하며 오승준에게 알려주었다.


“태혁이가 장수호랑 문나영 떼어놓으려고 네 여동생을 방패막이로 삼은 거야.”

사실을 듣고 승준은 태혁에게 삿대질을 했다.


“네놈이 제일 나쁘네!”

그때 장수호가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태혁의 눈빛이 예리하게 변했다.


“왔어.”

오승준과 차현은 동시에 카페 입구 쪽을 보았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보고 오승준만 표정이 밝아졌다.

좋은 집안에서 교육 잘 받고 자란 도련님 같은 관상이었다.

딸 가진 부모들이 딱 탐낼 만한 인재였다.

세 남자가 함께 있는 걸 보고도 장수호는 별로 놀라지 않고 차분하게 인사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정확히는 그가 약속 시간을 맞추어서 온 거였다.

태혁이 장수호를 쳐다만 보자 오승준이 자리를 권했다.


“앉아요.”

장수호는 남은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네 남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각기 다른 성격과 각기 다른 성장 환경과 각기 다른 목표를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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