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사악한 배려 (64/84)


64화. 사악한 배려
2023.05.12.


최태혁 교수가 사신처럼 온통 검은 옷을 입고서 술집 안으로 들어서자 승희는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그들의 위치를 알렸다.

최태혁 교수가 지나갈 때마다 그한테서 어떤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인지 술 취한 사람들이 움찔거렸다.

승희도 긴장했다. 최태혁 교수의 문나영 편애주의를 잘 알기에.

두 사람이 있는 곳까지 온 최태혁 교수는 테이블 위에 쓰러져 자는 나영을 내려다보았다.

전혀 화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눈빛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랐기에 승희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보았다.


“네가 여기 데려온 거야?”

최태혁 교수가 묻는 말에 승희는 바로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나영이가 먼저 술 마시자고 했어요.”

“그런데 왜 문나영만 취하고 넌 멀쩡해?”

최태혁 교수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자 승희는 억울해서 바로 해명했다.


“그거야 나영이는 마음이 괴롭고, 전 안 괴로우니까요.”

“마음이 괴롭다고?”

너 때문이잖아.

라는 눈빛으로 승희는 최태혁 교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걸 솔직히 말할 정도로 승희는 무모하지 않았다.


“저한테 묻지 마세요. 나영이 술 깨면 물으세요.”

태혁도 상관없는 승희에게 더 따지지 않았다.

나영을 집에 데려가기 위해서 몸을 낮추어 잠든 나영의 상체를 일으키고 기울어지는 그녀의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나영을 안아 드는 그의 움직임은 이곳에 걸어들어올 때와 비교하면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나영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인 듯했다.

승희는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여자에게 화난 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여자를 소중하게 보호하는 모습은 참 감동적이었다. 최태혁 교수가 안 무서웠으면 박수라도 쳐주었을 거다.

최태혁 교수가 나영을 차 뒷좌석에 태우자 승희는 그 옆자리에 올라탔다.

승희가 나영과 같은 집에 사니까 이 차를 탈 수 있는 거지, 아니었으면 가차 없이 그녀를 버리고 갔을 거 같았다.


“저기. 나영이도 많이 힘들어하는데 그만 용서해 주시면 안 돼요?”

운전석에 앉은 최태혁 교수가 룸미러로 그녀를 보았다.

그 눈빛이 범상치 않았기에 승희는 히죽 웃으며 바로 사과했다.


“제가 주제넘게 끼어들 문제가 아니죠. 죄송합니다.”

다행히 최태혁 교수는 별말 없이 시동을 켰다.

차는 금세 서울의 귀가 행렬에 합류해서 달렸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나영의 머리가 옆으로 쓰러지자 승희는 서둘러 손으로 받쳤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은 최태혁 교수 눈치를 보았는데, 룸미러로 눈이 딱 마주쳤다.


“나영이 머리에서 좋은 냄새 나네요.”

뭐라도 말해야 할 거 같아서 한 말인데, 거기에 최태혁 교수가 대답했다.


“나도 알아.”

승희는 순간 닭살이 쫙 돋아나며 손끝이 오그라들었다.

역시 연애 구경은 책과 드라마가 딱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최태혁 교수가 뜻밖의 말을 했다.


“정말 차현이 너한테 한 말 때문에 소개팅한 거야?”

승희는 놀란 눈으로 최태혁 교수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그 소개팅 이후 두 사람은 쭉 냉전 상태였으니 나영이 최 교수한테 말했을 리는 없었다.

설마 차현이라고? 왜? 왜 내 이야기를 최태혁 교수한테 한 거지?

승희는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데 술을 마셔서 두뇌 회전이 빨리 되지 않았다.


“내가 묻잖아. 대답해.”

최태혁 교수는 그녀가 문나영이 아니라서 아주 권위적이었다.

승희는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제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태혁은 신호등의 신호를 확인하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 친구의 일이니까 내가 해결해야지.”

그녀는 운전석에 달라붙으며 물었다.


“설마 저랑 차현 감독님 소개팅 주선해주시려고요?”

툭.

승희가 손을 놓는 바람에 나영의 머리와 몸이 옆으로 크게 기우는 걸 보고 태혁은 바로 눈에 불꽃이 튀었다.


“야! 감히 손을 치워! 똑바로 안 할래!”

승희는 허둥지둥 나영의 몸을 챙겼다.

이렇게 보배 모시듯이 하면서 화가 났다고?

에라이.

괜히 최태혁 교수의 불똥을 얻어맞은 승희는 아주 마음이 아니꼬웠다.

***

띵.

최태혁 교수가 나영을 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승희는 먼저 달려가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전등이란 전등은 다 켰다. 혹시라도 최태혁 교수가 어둡다고 화내기 전에.

나영을 안고 방까지 들어간 태혁은 침대 위에 안고 있던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고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귀 뒤로 넘겨주었다.

필름이 끊길 정도로 취한 건지 나영은 끝까지 깨지 않았다.

태혁은 그녀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문 쪽에서 승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따지고 보면 교수님 생각해서 말 안 한 거잖아요. 장수호 씨가 찾아온 날이 황 여사님 수술 날인데. 나영이가 어떻게 솔직하게 말해요.”

태혁이 집어던지려고 베개를 잡는 걸 보고 승희는 바로 자신의 방으로 피신했다.

조용해지자 태혁은 베개를 내려놓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건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판가름하는 진실 게임이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은 감정 앞에서 결코 논리적이지 못했다.

장수호를 보는 순간 느꼈다.

그보다 훨씬 나영과 어울리는 남자라고.

분명 나영의 아버지도 그리 생각했기에 장수호를 나영에게 보낸 것이다.

온통 오점투성이인 그의 인생과 달리 장수호는 흠결 하나 없는 삶을 살았을 거다.

그 사실이 자꾸 그의 마음을 할퀴고 태웠다.

태혁은 나영의 얼굴로 손을 뻗다가 만지지 못하고 앞에서 멈추었다.


 


“네가 한 거짓말이 전부 나 때문이라면.”

그는 더더욱 장수호보다 초라해졌다.

그게 그를 견딜 수 없게 하였다.

아무리 불행이 닥쳐와도 자존심 하나도 버텼는데, 그녀의 그런 행동은 그의 자존심을 갉아먹었으니까.

태혁은 손을 거두고 몸을 돌려 나영의 방을 나갔다.

우뚝.

방문 앞에서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태혁은 고개를 돌려 나영의 방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무언가를 찾듯이.

***

나영은 아침이 되어서야 알람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숙취로 머리가 깨질 거 같아서 바로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너무 마셨다.

당장 병원에 출근해야 하는 나영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문을 열고 나갔더니 승희가 부엌에서 콩나물국을 끓이고 있었다.


“일어났어? 와서 해장해. 내가 국 끓였어.”

나영은 힘없는 걸음으로 식탁으로 다가가서 앉았다.


“넌 안 먹어?”

1인분만 차려진 걸 보고 나영이 물었다.


“아! 난 황 여사님 도시락 먹으면 되니까.”

말하던 승희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최태혁 교수가 나영에게 화가 나서 도시락까지 끊어버렸으니 그녀가 눈치 없이 나영의 아픈 곳을 찌른 게 되었다.


“나도 별로 안 먹고 싶은데, 홍식 씨가 굳이 가져다준다고 해서.”

승희가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하자 나영은 콩나물국을 떠먹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 눈치 볼 거 없어. 황 여사님 입원해 있는 동안 네가 나보다 더 신경 써줬잖아.”

“그거야. 우리 과 환자였으니까 내가 너보다 찾아가기 더 쉬웠던 거지.”

승희는 손가락으로 앞치마 끈을 돌돌 말며 이거 참 난감하다고 생각했다.


“난 그만 출근 준비할게.”

나영이 국을 반도 안 먹고 일어나는 걸 보고 승희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승희도 출근해야 했기에 앞치마를 푸는데, 방에 들어갔던 나영이 급하게 뛰어나왔다.


“화장대 위에 반지 네가 치운 거야?”

나영이 다급하게 묻는 말에 승희는 잠시 얼음이 되었다.

그게 사라졌으면 그걸 가져갈 사람은 어젯밤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준 최태혁 교수뿐이었다.

와! 사람을 데려다주고 그 값으로 반지를 가져갔다고? 엄청나구먼.

진짜 헤어질 것도 아니면서 그건 도대체 왜 가져간 거야?


“오승희! 내 반지 어딨냐고!”

나영이 그녀한테 화를 내니 승희는 머리에서 땀이 날 거 같았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영이 상처받을 거 같았고, 그렇다고 입을 다물자니 그녀가 범인으로 몰리는 거고.


“혹시 물고기가 먹은 거 아냐?”

나영이 아무리 술이 덜 깼어도 그 말을 믿을 정도는 아니었다.


“내 반지 돌려줘.”

승희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내가 안 가져갔어. 얼어 죽을 독사가 먹어 치웠다고.

***

태혁은 출근 준비를 하다가 오승희가 보낸 메시지를 받았다.


<제발 반지 돌려주세요. 제가 나영이한테 오늘까지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에요.>

태혁은 오승희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넥타이를 마저 맸다.

옷을 다 입고 거실로 나갔더니 오승준이 토스트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있었다.


“너 일요일에 시간 돼?”

태혁이 먼저 묻자 오승준은 커피를 마시며 이죽거렸다.


“너야말로 소중한 문나영이랑 같이 있어야지. 왜 나의 하찮은 시간을 묻는 거냐?”

“문나영 맞선 상대 만날 거야.”

태혁의 대답에 오승준은 너무 놀라서 마시던 커피를 질질 흘려버렸다.

승준은 서둘러 입가에 묻은 커피를 냅킨으로 닦으며 물었다.


“뭐? 누구 맞선 상대?”

콰직.

태혁은 손으로 호두를 내리쳐 으깬 뒤 오승준에게 지시했다.


“같은 말 또 하기도 싫으니 차현한테는 네가 연락해서 오라고 해.”

오승준은 경악했다.

이건 떼거리로 몰려가 그 남자를 작살내겠다는 게 아니면 뭐겠나.

그래도 자신을 배운 만큼 배운 엘리트라고 생각하는 오승준은 태혁을 말렸다.


“그래도 우리가 의사인데, 직업 윤리상 사람을 때리는 건 좀 그렇지 않냐?”

아무리 문나영한테 다른 남자가 엉겨 붙는 게 참을 수 없다고 해도, 그래도 사회인으로서의 예의와 법도를 지켜야 했다.

안 그럼 순식간에 이 사회에서 아웃사이더가 될 거다.

태혁이 호두알갱이를 손에 쥐고 꽉 힘을 주자 가루가 된 호두가 승준의 토스트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마치 자신은 그런 거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뭐라고?”

태혁이 태연하게 묻자 승준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지금 태혁에게 옳은 말을 하는 건 시원하게 얻어맞고 싶어 하는 꼴 같았으니까.

삑삑.

그때 승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승준은 병원 콜 왔다고 하고 바로 여기서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승희가 보낸 메시지를 읽고 입을 쩍 벌렸다.


“너 문나영한테 준 반지까지 뺏어왔어?”

최태혁 교수가 반지를 순순히 안 돌려줄 거 같으니 승준한테 대신 반지를 찾아달라고 승희가 부탁 메시지를 보낸 거였다.

태혁은 호두 가루가 묻은 손을 닦으며 그 이유를 말했다.


“그 반지 재수 없는 거 같아서 다시 살 거야.”

“그럼 문나영한테도 그렇게 말하고 가져왔어야지.”

애꿎게 그의 여동생만 생고생 중이었다.


“말했어.”

그때 나영은 취해서 자고 있었다.

굳이 힘들게 안 깨운 건 그의 배려였다.

그녀가 그한테 거짓말한 게 그녀의 배려였듯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