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희노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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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희노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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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희노애락
2023.05.08.
“반지가 마음에 안 들었나? 아니면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해서? 그것도 아니면…….”
“제가 교수님한테 거짓말했어요.”
나영은 참지 못하고 결국 그녀의 입으로 털어놓았다.
태혁은 담담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알아. 그날 이주아 만난 거. 그 정도 거짓말에 뭐 이리 오래 꽁해 있어. 난 이미 잊었으니까.”
“또 있어요.”
나영이 그한테 거짓말한 게 또 있다는 말에 태혁은 더 이상 태평한 태도를 보일 수가 없어졌다.
그가 눈치챈 거짓말보다 눈치도 못 챈 거짓말이 더 충격이었다.
마치 그가 눈뜬장님이 된 기분이었다.
“뭔데?”
그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흘러나왔다.
그녀가 사실을 고백하기도 전에 이미 그의 기분이 나쁘다는 걸 느꼈지만 나영은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속이는 게 더 힘들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장수호 씨, 아버지가 보낸 맞선 상대였어요.”
순간 그의 눈빛이 고통으로 깨어지는 게 그녀한테 고스란히 보였다.
최태혁 교수는 정말 아플 때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혁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만 보다가 차의 시동을 켜고 그대로 떠나버렸다.
부르릉.
나영은 태혁의 차가 눈에서 안 보일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화내는 게 당연했다.
누구라도 화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냉정하게 그녀를 두고 떠나버리는 게 처음이라서, 나영은 마음이 쉽게 회복이 안 되었다.
***
끼이익.
태혁이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도시락 두 개를 든 홍식이 뛰어서 다가왔다.
“형님. 이제 오십니까.”
원래는 태혁의 집으로 도시락을 가져갔었는데, 이젠 오승희한테 직접 주기 위해서 바로 병원으로 온 것이었다.
“여기 형수님 도시락.”
홍식이 도시락 하나를 그에게 건네자 태혁은 그 도시락을 받고 집어던질 것처럼 높이 치켜들었다.
그걸 보고 홍식이 깜짝 놀라서 말렸다.
“형님! 황 여사님이 새벽부터 만든 건데!”
황 여사라는 말에 그제야 태혁은 집어던지려던 도시락을 움켜잡은 채 손을 부르르 떨었다.
태혁은 도시락을 험하게 홍식의 품으로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당분간 필요 없어.”
홍식은 도시락 두 개를 품에 안은 채 당황한 눈으로 태혁의 등을 쳐다보았다.
“뭐야? 싸운 거야?”
그런데 홍식이 아는 태혁은 절대 여자랑 싸울 사람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홍식은 바로 승희한테 찾아가서 그 일을 다 일러바쳤다.
승희는 명란 계란말이를 입에 욱여넣으며 믿을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에이, 나영이 최 교수님한테 화를 내면 냈지. 최 교수님이 그럴 리가.”
승희가 보기에 최태혁 교수는 병원에서는 절대 갑이었지만, 나영 앞에서는 꼼짝 못 하는 을이었다.
“제 생각에는…….”
승희가 진지하게 말하자 홍식은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했다.
“최 교수님은 나영이 아니라 홍식 씨한테 화가 난 거예요.”
“…….”
승희가 젓가락으로 정확히 그의 얼굴을 가리키며 단언했고, 홍식은 사랑의 작대기를 받은 것처럼 심장이 두근댔다.
***
최태혁 교수가 들으면 또 화낼 말이지만, 그래도 나영은 솔직하게 말해서 속이 좀 후련해졌다.
이 일로 최태혁 교수가 그녀에게 얼마나 화내든 다 감내할 생각이었다.
어항 때처럼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면 나영은 오히려 더 괴로웠을 거다.
<최태혁 교수가 저한테 먼저 연락해서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장수호의 메시지를 받고는 많이 당황했다.
장수호는 그녀와 그를 도와주고 있는 사람인데 혹시라도 태혁이 그한테 화풀이하면 나영은 장수호한테 정말 미안해질 거다.
그래서 바로 장수호에게 전화했다.
“장수호 씨가 제 맞선 상대였다는 거 교수님한테 말해서 그래요. 그러니까 만나지 마세요.”
[그런데 전 구해야 할 물건이 있어서 만나야 할 거 같습니다.]
장수호가 최태혁 교수한테 무슨 물건을 받으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장수호 씨가 달라고 해서 교수님이 주지도 않을 거고요. 장수호 씨가 직접 조사했으니까 알잖아요. 우리 교수님 왕년에 경찰서에 드나들 정도로 쌈꾼이었어요. 이번에 만나면 얻어맞을 수도 있어요.”
나영은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장수호가 최태혁 교수한테 얻어맞는다면 그건 바로 아버지 귀에도 들어갈 거다.
그럼 진짜 돌이킬 수 없어졌다.
[저도 검도 2단입니다.]
그 말에 나영은 안심이 되는 게 아니라 더 울컥했다.
“그래서 진짜 만나서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최태혁 교수가 싸우자고 절 만나려는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됐어요. 절대 만나지 마세요.”
장수호에게 명령하듯 말하며 몸을 돌리던 나영은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최태혁 교수를 발견하고 너무 놀라서 비명이 나올 뻔했다.
최태혁 교수는 꽁꽁 얼어붙어 있는 그녀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가져갔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바로 장수호의 전화번호를 그녀의 폰에서 삭제해 버렸다.
그가 그녀의 손에 핸드폰을 돌려주고 그냥 지나쳐 가려고 하자 나영은 서둘러 그의 가운을 붙잡으며 부탁했다.
“장수호 씨 만나지 마세요. 그냥 저한테 화내세요.”
태혁의 목울대가 한 번 요동치더니 그녀가 처음 들어보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그 남자 이름 말하면.”
차디찬 그의 눈빛에 어딘가를 베인 듯 가슴 속이 저릿했다.
“내 기분이 더러워.”
탁.
태혁은 매몰차게 그녀의 손길을 뿌리쳤다.
나영은 얼얼한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뭔가 이 순간이 꿈 같기도 하고,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등지고 걸어가는 최태혁 교수는 분명 현실이었다.
***
이렇게 기분이 거지 같을 때 태혁이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은 차현 밖에 없었다.
늦은 시간까지 남아 있던 영화사 직원이 차현은 영화 보는 중이라고 알려주었다.
태혁은 차현이 영화 보고 있는 상영관으로 향했다.
그가 보기에는 가장 쓸데없는 곳이 상영관인데, 차현은 그 공간에 돈을 가장 많이 들였다.
상영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넓은 공간에서 혼자 영화 보고 있는 차현이 보였다.
영화는 80년대 홍콩 영화였다.
주윤발이 입에 이쑤시개를 물고 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탕 탕 탕.
총소리가 그의 심장에 와서 박히는 거 같았다.
털썩.
태혁은 조심성 없이 차현의 옆자리에 앉으며 다리를 앞 의자에 올려놓았다.
차현은 그가 온 걸 알고도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영화를 볼 때는 오로지 영화에만 집중하는 게 그의 원칙이었다.
그런데 태혁이 그 원칙을 지킬 수 없는 말을 뱉어냈다.
“나영이 딴 남자랑 맞선 봤어.”
태혁의 말을 듣고 차현은 바로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네가 착각한 게 아니라?”
“내가 그리 믿도록 나영이 거짓말은 했지.”
문나영이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까지 했다는 말에 차현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거짓말을 했는데?”
“그 맞선남이랑 오승희를 소개팅시켰어.”
태혁은 영화 화면을 보느라 오승희라는 이름에 차현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보지 못했다.
“그 남자는 어떤 사람인데?”
“엘리트에 바른 이미지. 회사에서 문나영 아버지한테 인정도 받는 거 같더라.”
그러니까 나영이 있는 병원으로 그를 보냈을 거다.
태혁은 세상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물어봤는데, 부모님도 두 분 다 계신대.”
그건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는 것이었다.
이곳에 있는 두 남자만 특별하게 없는 것이었다.
“술 마실래?”
차현이 먼저 권했고, 태혁은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내일 수술 있다고.
차현은 술 대신 탄산수를 가져와서 태혁의 잔에 따라주고, 그의 잔에도 채웠다.
거기에 라임까지 띄웠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어쩌긴. 나 혼자 죽도록 화내다가…….”
“헤어질 거야?”
“안 헤어져!”
태혁이 버럭 성을 내니 차현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탄산수를 술처럼 한 모금 마시더니 지나가는 투로 태혁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거짓말로 하게 된 소개팅은 어떻게 됐어?”
“그게 잘 됐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태혁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잔을 입에 가져가다가 뭔가 이상한 걸 느끼고 고개를 돌려 차현을 보았다.
“그걸 왜 물어봐?”
차현은 드물게 그의 눈을 피하며 피곤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오승희가 갑자기 연애하려고 용쓰는 게 내가 한 말 때문인 거 같아서.”
“네가 뭐라고 했는데?”
“간접경험은 가짜라고.”
“도대체 걔한테 그런 소리를 왜 한 거야?”
이것도 다 문나영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기에 차현은 좀 많이 억울했다.
***
술집 안은 술 취한 사람들의 목소리로 떠들썩했다.
승희는 술을 홀짝이며 아까부터 말도 없이 술만 마시는 나영을 바라보았다.
나영이 먼저 술 먹자고 한 것도 처음이었고,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 모습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진짜 최 교수님이 너한테 화낸 게 맞나 보구나.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남녀 사이의 격변이 승희는 그저 신기하기만 할 뿐이었다.
나영은 빈 술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나보고 더럽대.”
정확히는 그의 기분이 더럽다고 한 거지만, 그녀의 귀는 딱 그렇게 들렸다.
“뭐?”
승희는 놀라서 먹던 고기를 토해낼 뻔했다.
“교수님이 너무 하네! 어떻게 여자한테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할 수가 있어!”
이제 승희는 당사자보다 더 흥분해서 최태혁 교수를 욕했다.
나영은 소주를 따라서 또 마시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내가 화낼 만한 짓을 했어.”
“내가 생각하기에 남녀 사이에 바람피운 것만 아니면 다 용서할 수 있어.”
“장수호 씨가 내 맞선 상대였어.”
승희는 잠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나영의 얼굴을 쳐다만 보았다.
그리고 3초 뒤에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경악했다.
“설마 그거 숨기려고 나한테 소개해 준 거야?”
나영은 씁쓸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래, 나 나빴지?”
“그러네.”
승희는 인정했다가 바로 입술을 앙다물었다.
최태혁 교수는 화내도 그녀는 친구니까 나영의 편을 들어주어야 했다.
승희는 직접 나영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마시고 잊어버려. 어차피 세상에 남자는 많아.”
승희의 위로에 나영은 얼굴을 찌푸렸다.
“나 헤어진 거 아니거든.”
헤어진 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나영은 술 한 병을 다 비운 뒤 술집에서 뻗어버렸다.
승희는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뭐야?]
최태혁 교수는 그녀한테도 성질을 내었다.
투우장의 황소 같다고 생각하며 승희는 말했다.
“나영이가 술집에서 술 마시다 뻗었는데 어쩌죠?”
나영에게 진심으로 화가 난 거면 안 올 수도 있었다.
최태혁 교수는 바로 대답이 없었다.
[…….]
승희는 잠든 나영을 보며 묵묵히 최태혁 교수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디야?]
그 짧은 말에 가슴이 찌르르했다.
이게 바로 희노애락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