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어쩌다 소개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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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어쩌다 소개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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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어쩌다 소개팅
2023.05.05.
태혁은 운전석에 앉아서 병원 정문을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나영이 근무 끝내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왜 거짓말했는지 이유도 알았으니 오늘은 나영과 제대로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일요일 이후 나영이 그를 피하는 게 느껴졌기에 일부러 전화는 하지 않았다.
그럼 또 무슨 핑계를 만들어 피할지 몰랐으니까.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언제 나올지 모를 여자를 무작정 기다리는 이 순간이 태혁은 참 헛웃음 나왔다.
이게 다 이주아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그리 고이 보낸 게 후회되었다.
“그런데 이주아가 어떻게 내 할아버지를 안 거지?”
한일 그룹 사장 아들과의 맞선에 정신이 팔렸을 줄 알았건만.
한일 그룹 사장 아들은 그의 할아버지가 그룹 대주주라서 알 수 있다고 해도 손자가 누군지 알고 있기는 어려웠다.
그 점이 의심스러워 골똘히 생각에 빠졌는데 정문을 나오는 나영이 보였다.
태혁은 차를 끌고 그녀의 앞으로 운전해 가려고 했는데, 순식간에 택시가 그의 차를 추월해서 정문 입구에 섰다.
나영은 그 택시를 타고 쌩하니 떠나버렸다.
바로 눈앞에서 택시에 그녀를 빼앗긴 태혁은 황당한 표정으로 택시를 쳐다보다가 서둘러 그 택시를 쫓아갔다.
당연히 집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나영을 태운 택시는 집이 있는 방향과 정반대 쪽으로 향했다.
택시는 30분이나 달린 뒤 한 커피숍 앞에서 멈추었다.
태혁은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는 나영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이리 멀리까지 온 거 같은데, 나영의 인간관계는 그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도대체 누굴 만나는 거야?”
몰래 쫓아와서 지켜보고 있는 게 꼭 그녀를 의심하는 거 같아서 태혁은 회의감이 들었다.
그럴 의도가 전혀 아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녀와 대화하기 좋은 타이밍은 아닌 거 같아서 차를 출발시키려고 했는데, 그의 눈에 창가 자리에 앉은 나영이 무언가 꺼내는 게 들어왔다.
그건 그가 어항 속에 숨겨놓았던 반지 상자였다.
결국 그녀는 어항 속에서 저 반지를 찾아낸 뒤 열심히 그를 피했다.
선물은 원래 받는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하는 건데, 그의 선물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게 태혁은 한없이 씁쓸했다.
나영은 상자 속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태혁은 그런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래서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가는 걸 태혁은 뒤늦게 알아챘다.
어떤 남자가 나영에게 말을 거는 걸 보고 태혁은 바로 운전석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는데, 나영이 그 남자에게 자리를 권하는 걸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영은 저 남자를 만나러 이 먼 거리의 커피숍까지 온 것이었다.
그 사실이 태혁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차 문을 열려던 그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두 사람은 처음 본 게 아닌 듯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설마 사촌?
태혁은 애써 두 사람이 친척 관계일 수 있다고 단정했다.
절대 그렇게는 안 보이지만.
나영이 남자를 보는 시선이 마치 사연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태혁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탁.
그는 차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비겁하게 훔쳐보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직접 만나서 물어보겠다.
만약 친척이 아니라고 하면 저놈을 묵사발로 만들어 버리고 오랜만에 경찰서에 가리라.
***
나영은 갑자기 두 사람 앞에 나타난 최태혁 교수가 꼭 꿈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에 그는 생생하게 날 선 눈빛으로 장수호를 경계하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누구야?”
장수호는 언제 꺼냈는지 명함을 최태혁 교수에게 내밀었다.
“태영건설에서 문나영 씨 아버지 밑에서 일하고 있는 장수호라고 합니다.”
장수호의 소개에 ‘아버지’라는 단어가 나오자 태혁은 단번에 표정이 굳었다.
소개만으로 이미 진 기분이 아주 별로였다.
태혁은 처음보다 작아진 목소리로 나영에게 물었다.
“병원에 찾아왔던 그 남자야?”
나영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왜 따로 만난 거야?”
태혁의 질문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나영은 다시 장수호를 보았다.
할 말을 잃은 그녀를 보고 장수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문나영 씨가 제게 부탁할 게 있다고 해서 만난 겁니다.”
태혁은 대신 대답하는 장수호를 불쾌한 눈으로 쳐다보며 다시 나영에게 물었다.
“무슨 부탁?”
“아! 승희가 소개팅하고 싶다고 해서.”
그 순간 왜 승희의 이름이 튀어나왔는지 그녀도 모를 일이었다.
이게 다 차현이 승희한테 이상한 소리를 한 탓이다.
또 태혁에게 거짓말한 건 그녀였지만, 나영은 차현 탓을 하게 되었다.
승희에게 소개해 줄 남자라는 말에 태혁은 표정이 많이 누그러졌다.
오승희의 일이라면 확실히 나영이 나설 만했기에.
역시 그가 너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했다.
“그래서 소개팅하기로 한 거야?”
“아뇨. 장수호 씨가 싫대요.”
태혁은 바로 장수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따지듯이 물었다.
“만나보지도 않고 왜 거절합니까?”
이 상황에서 가장 황당할 사람은 갑자기 소개팅에 연루된 장수호일 테지만, 그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이었다.
역시 아버지가 신뢰할 만한 인재였다.
“제가 만남에 신중한 편이라서요.”
“만나보지도 않고 좋은 만남일지 아닐지 어떻게 압니까?”
“아무래도 지금은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시기가 문제인 거 같습니다.”
최태혁이 지금 이 순간 나타난 게 문제라는 뜻이었다.
“그쪽처럼 계획적으로 사는 사람한테 오승희처럼 단순한 인간이 딱 맞네. 당장 오승희한테 연락해.”
태혁이 승희한테 전화하라고 명령하자 나영은 당황했다.
“지금 연락하라고요?”
그녀가 망설이며 전화를 못 하는 걸 보고 태혁은 아예 그의 핸드폰을 꺼내서 직접 오승희한테 전화했다.
이 거슬리는 남자를 치워버릴 절호의 기회인데 그가 망설일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지금 바로 합정역 3번 출구 앞에 있는 커피숍으로 와.”
[네? 제가 왜?]
“네 소개팅남 지금 여기 있어.”
[제 소개팅남이요?]
“그래, 얼굴 잘생기고, 몸 좋고, 대기업 다니고, 성격 진중하고.”
태혁은 잠시 말을 끊고 장수호에게 물었다.
“부모님 다 계시고?”
장수호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태혁은 바로 전화에 대고 전했다.
“부모님도 아주 훌륭하시네. 안 올 거야?”
[지금 당장 갈게요!]
전화를 끊은 태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지금 온다네.”
장수호가 할 말 많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나영은 어색하게 웃는 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장수호와 오승희가 인사하는 걸 보고 두 사람은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둘 다 말이 없었다.
“…….”
“…….”
한참 만에야 나영이 물었다.
“어떻게 그 카페에 오신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이상했으니까.
“오늘 너랑 이야기하려고 병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그러니까 그녀가 택시를 타고 가는 걸 보고 차로 따라왔다는 소리였다.
최태혁 교수가 왜 그랬는지 머리로는 이해가 되어도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었다.
그녀가 또 말이 없어지자 태혁은 힐긋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냥 서로 퉁 칠래?”
그녀가 거짓말한 거와 그가 오늘 쫓아간 거.
나영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싫어요.”
나영은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더 크게 잘못했으니까.
하지만 태혁이 듣기에는 그녀가 화난 것처럼 들려서 마음이 안 좋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연인 간의 감정 다툼인가 싶었다.
무조건 그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화해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러기에는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결국 그날 두 사람은 대화를 제대로 끝내지 못한 채 어색하게 헤어졌다.
***
나영은 집에 돌아와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승희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장수호가 승희에게 실수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삐삐삐삑.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들리자 나영은 현관으로 걸어갔다.
곧 현관문이 열리며 승희가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
그리 묻는 그녀의 얼굴을 승희가 빤히 쳐다보자 나영은 심장이 동동 뛰어댔다.
승희는 대답 없이 그녀를 지나쳐 소파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털썩.
그대로 소파에 쓰러지는 승희는 기분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기에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소개팅이 잘 안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영은 승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장수호 씨가 너한테 뭐래?”
“내가 잘못됐대.”
“뭐?”
본인이 마음이 없다고 남 탓을 했다고?
장수호,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다.
“승희 너는 잘못 없어.”
나영은 승희를 위로했다.
그런데 승희는 몸을 똑바로 세우며 스스로 자신의 상황을 진단했다.
“장수호 씨 말 들어보니까 정말 그런 거 같더라고.”
“도대체 장수호 씨가 너한테 뭐라고 했는데?”
승희가 고개를 들어 나영의 얼굴을 보았다.
“내가 남자랑 연애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나한테 희노애락이 없다고 말한 그 사람을 신경 쓰는 거래.”
나영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건 아닌 거 같아.”
차현이 태혁에게 정말 좋은 친구이기는 했지만, 또 차현은 바람둥이기도 했다.
그한테 여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었다.
나영은 승희가 그중 한 명이 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난 그런 거 같은데.”
“아니라고!”
두 사람은 한동안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누군가 한 명이 지칠 때까지.
***
다음 날 아침.
나영은 평소와 같은 새벽 시간에 집에서 나왔다.
어젯밤은 승희와 언쟁을 좀 하느라고 늦게 자기는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젠 잠이 모자란 생활에 몸이 익숙해져 버렸다.
아파트 건물에서 나오던 나영은 익숙한 차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분명 그녀를 어제 이곳까지 태워다 주었던 최태혁 교수의 차였다.
나영은 몸을 틀어 차가 세워진 곳으로 걸어갔다.
차 안에서 자는 최태혁 교수를 발견한 나영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옷이 어제와 똑같은 걸 보니 집에서 자고 일찍 나온 것도 아닌 듯했다.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똑똑.
나영은 창문을 손으로 두드렸다.
그녀가 몇 번이나 두드렸을 때야 최태혁 교수는 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가 의자를 세우며 창문을 열자 나영은 따지듯이 물었다.
“왜 여기서 잔 거예요?”
“음, 생각 좀 정리한다는 게 그냥 잠들어 버렸네.”
“무슨 생각을 정리해요?”
생각은 집 침대에 편히 누워서 해도 되는데, 굳이 사서 고생하는 게 보기 불편했다.
태혁이 그녀의 손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넌 왜 내가 준 반지를 안 끼는 걸까?”
반지라는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