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삼자대면
(61/84)
61화. 삼자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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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삼자대면
2023.05.01.
그녀의 몸이 침대에 닿자마자 그의 커다란 몸이 그녀의 위를 점령하듯이 덮쳐 왔다.
나영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그녀가 잡아먹히기 직전의 토끼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 올려다보자 태혁이 짓궂게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무서워?”
나영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목덜미에 뜨거운 입술을 묻자 나영은 숨을 꾹 참았다.
강렬한 흡입에 그의 입 안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든 그가 찌푸린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오늘 진짜 어항 청소했어?”
그의 질문에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
그녀가 집에 돌아온 시간은 밤 8시였다.
그녀가 집에 돌아왔을 때 승희는 나가고 없었다.
나영은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어항 앞에 섰다.
‘왜 그러세요?’
‘네가 똑바로 청소를 안 한 거 같아서.’
‘네?’
‘집에 가서 다시 확인해 봐. 분명 청소 안 한 곳이 있을 거야.’
호텔 방에서 태혁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르며 마음이 착잡했다.
그가 그녀의 거짓말을 안 건지, 정말 청소를 대충 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걸 알아내려면 진짜 어항 청소를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나영은 어항 속의 까망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우선 널 다른 곳에 옮겨놔야겠구나.”
어항 청소라는 게 처음이라 서툴기도 하고 꽤 번거로웠다.
그래도 직접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나영은 하나하나 해나갔다.
제일 먼저 까망이를 물이 담긴 유리 볼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 어항의 물을 어렵게 빼고, 물 정화 펌프를 꺼내서 솔로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자갈에 쌓인 배설물도 치우려고 보던 나영은 어항 돌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벨벳 상자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게 뭐지?”
처음 어항을 샀을 때는 분명히 없던 것이었다.
‘어항을 청소했다고?’
‘네.’
그녀의 대답을 듣자마자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하던 최태혁 교수의 모습이 떠오르며 나영은 심장이 쿵쾅댔다.
나영은 어항에 손을 넣어서 상자를 꺼냈다.
그녀는 서둘러 어항에서 꺼낸 상자를 열어보았다.
덜컥.
상자 안에는 반지 두 개가 들어 있었다.
나영은 멍하니 반지를 쳐다보았다.
‘오늘 진짜 어항 청소했어?’
그녀가 거짓말한 걸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마음의 증표로 어항에 남겨둔 반지가 결국은 그녀가 한 거짓말의 증거가 되어 버렸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고 깨어졌다.
***
황 여사가 퇴원하는 날이 드디어 다가왔다.
그리고 나영은 그때까지도 최태혁 교수 앞에서 반지를 꺼내놓지 못했다.
너무 미안해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가 먼저 그녀의 거짓말에 화를 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이런 식으로 그녀를 벌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영은 충분히 혼자 자책하고 있었으니 정말 후자의 이유인지도.
“모두 고마웠어요.”
병원에 입원할 때보다 밝은 표정으로 인사하는 황 여사 앞에서 나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보다 더 병실을 자주 찾아간 승희가 황 여사의 손을 붙잡으며 부탁했다.
“여사님 요리 정말 맛있어요. 앞으로 저도 좀 해주세요.”
“금방 수술받고 퇴원하는 환자의 노동력을 착취하겠다는 거냐?”
최태혁 교수가 살벌하게 추궁하자 승희는 움찔하며 그녀의 뒤로 숨었다.
황 여사가 최태혁 교수를 말리며 웃음으로 마무리했다.
“내가 오 선생 도시락도 만들어서 보낼게요.”
“그럴 필요 없어요. 쟤 오빠가 나한테 착취해 가는 게 얼만데.”
승희가 억울한 표정을 짓자 홍식이 나서서 장담했다.
“승희 씨 도시락은 제가 직접 병원까지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네가 도시락 만드냐!”
태혁이 바로 화를 내자 홍식은 서둘러 차 운전석으로 피신했다.
황 여사도 태혁이 열어준 차 문 안으로 들어갔다.
탁.
차 문을 닫은 태혁은 황 여사에게 말했다.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면 꼭 저한테 전화하시고요.”
황 여사는 걱정 말라고 그를 안심시킨 뒤 나영을 쳐다보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다음에는 우리 집으로 놀러 와요. 도시락으로 맛볼 수 없는 요리도 많으니까.”
나영은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출발해서 떠나자 세 사람만 남겨졌다.
“그럼 저 먼저 들어갑니다.”
승희가 먼저 들어가려고 하자 나영도 그녀를 따라 몸을 돌렸다.
“문나영.”
최태혁 교수의 부름에 그녀의 몸이 덜컹하며 멈추어 섰다.
나영이 주춤하며 돌아보자 그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 시키실 일 있으세요? 교수님.”
그녀가 사무적으로 물으니 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너 나한테 뭐 줄 거 없어?”
태혁의 물음에 나영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녀가 그에게 반지를 주면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은 감당이 안 되었다.
Rrrrrrrrrr Rrrrrrrrr.
그때 그녀를 구해주듯이 전화가 올렸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니 응급실이었다.
나영은 서둘러 핸드폰을 최태혁 교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저 바로 가봐야 하니까 나중에 이야기해요.”
그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몸을 돌려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태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난 뭐라고 한 적도 없는데 왜 저리 겁먹은 거야?”
태혁은 궁시렁대며 병원 건물로 들어갔다.
그는 그녀의 거짓말을 추궁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녀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을 뿐이었다.
***
외래진료할 때는 정말 많은 환자와 보호자를 만나게 됐다.
대학병원에서 치료받으려고 일부러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도 많았기에 짧은 진료 시간 안에 제대로 병명을 파악하거나 병세를 확인해야 했다.
그래서 이런 귀중한 시간 싸움 중에 명품으로 휘감은 이주아가 환자라고 나타났을 때 태혁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나.
“뭐 하자는 겁니까?”
태혁은 바로 화를 냈다.
그녀의 아버지 이철권의 예약 진료는 아직 몇 달이나 남았고, 이주아는 아무리 봐도 환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환자 흉내를 내고 싶었으면 분장으로 얼굴에 황달기라도 만들어 왔어야 했다.
이주아는 다리를 꼬고 앉으며 여전히 오만한 태도로 말했다.
“문나영이 나타나 깽판 치는 바람에 내 맞선이 파토 났어요. 그러니 당신이 책임져야죠.”
이주아의 맞선에 나영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혁은 눈이 커졌다.
그 말은 그러니까 나영이 그한테 거짓말까지 하며 사라졌던 두 시간 동안 이주아를 찾아갔었다는 거니까.
나영이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왜냐하면 더 거슬리는 윤이나는 잘 참아가며 같은 병원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설마 이주아가 그가 모르는 새 나영에게 못된 짓을 한 걸까?
“그건 내 알 바 아니니까 아픈 거 아니면 당장 나가요. 안 그럼 경비 부를 겁니다.”
태혁이 나 몰라라 하자 이주아는 화난 표정을 지었다.
“당신 할아버지가 누군지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그것만 알았어도 난!”
이주아가 할아버지 이야기까지 꺼내자 태혁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
태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주아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얼굴이 키스할 것처럼 가까워지자 간호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다정해 보이는 자세와 달리 태혁이 이주아에게 귓속말로 한 말은 꽤 살벌했다.
“내 할아버지가 누군지 알았으면 이젠 알겠네. 당신 아버지의 백화점 통째로 사서 문나영한테 주겠다는 내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거.”
이주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를 붙잡으려고 일부러 진료표를 끊어서 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또 내 앞에 나타나면 당신 아버지가 망해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어.”
내세울 건 집안의 돈뿐이었던 이주아는 태혁의 경고에 처음으로 공포심을 느꼈다.
***
나영은 벨벳 상자를 열고 그 안에 있는 은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반지는 끼고 다니라고 있는 건데 아직 한 번도 손가락에 껴보지도 못했다.
오늘 외래진료에 이주아가 최태혁 교수를 찾아온 건 병원에 순식간에 퍼졌다.
그래도 그녀의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은 듯했다.
그걸 들었으면 최태혁 교수가 이리 조용할 리가 없다.
하긴. 본인이 한 못된 짓인데 스스로 밝힐 리가 없지.
“웬 반지입니까?”
앞에서 들려온 남자의 굵은 목소리에 나영은 서둘러 상자를 닫았다.
고개를 들자 장수호가 그녀를 쳐다보고 서 있었다.
“앉으세요.”
나영은 자리를 권하며 상자를 가방 안에 서둘러 집어넣었다.
오늘 장수호한테 먼저 만나자고 한 건 그녀였다.
전화로 전부 이야기하기에는 무리였기에 만나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야 내일 최태혁 교수를 찾아가 제대로 말할 수 있을 듯했으니까.
의자에 앉은 장수호는 그녀가 먼저 묻지 않아도 경찰을 찾아간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들을 전부 만나봤는데, 다들 하는 말이 현장에 도착했더니 이미 박재수 형사 혼자 범인을 잡고 문나영 씨를 병원으로 보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최태혁이 한 일이 박재수 형사가 한 일이 되었다.
형사가 태혁의 공을 가로챈 건 절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박재수 형사가 태혁을 일부러 병원으로 불렀을 리가 없다.
“정확한 상황을 알고 있는 건 박재수 형사 한 명뿐인데,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고, 남은 가족들도 박재수 형사가 죽고 전부 뉴질랜드로 이민갔습니다. 그래서 그 가족분들을 만날 수는 없었어요.”
“그럼 뉴질랜드에 사는 가족들 연락처는 알 수 없을까요?”
“제가 경찰에 물어봤는데, 아는 사람이 없더군요. 연락이 끊겼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박재수 형사가 경찰 일 하다가 죽어서 이쪽과는 일부러 연락을 끊은 거 같습니다.”
나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수호의 도움까지 받았는데도 결국 원점이었다.
“그리고 이건 문나영 씨 사건과는 상관없지만, 알아낸 게 있는데.”
장수호가 뭔가 더 있다고 말하자 나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최태혁 교수가 어릴 때 경찰서를 많이 들락날락했더군요. 그때 최태혁 교수를 바로 잡아준 게 박재수 형사였다고 제가 만난 경찰들이 모두 말했습니다.”
그러니 태혁과 박재수 형사는 엄청 잘 아는 사이란 말이었다.
“그리고 최태혁 교수 할아버지가 경찰서에 찾아와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답니다. 경찰청장까지 내려와서 최 교수 할아버지한테 사과했다는데. 그 이후 박재수 형사와 최태혁 교수 사이가 멀어졌다고 하더군요.”
장수호의 설명을 듣고 나영의 눈이 커졌다.
“아! 그럼 할아버지 때문에 일부러 절 구해준 걸 숨긴 거 아닐까요?”
장수호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박재수 형사와 할아버지 사이에 큰 갈등이 있어서 최태혁 교수도 몸을 사리게 된 거라면 그 상황이 말이 됩니다.”
차분히 이야기하던 장수호는 누군가 발견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오늘 최태혁 교수가 와인색 셔츠 입었나요?”
“네?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나영이 놀라서 묻자 장수호는 물잔을 들어 올리며 알려주었다.
“지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어요.”
나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최태혁 교수가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시선을 그녀와 장수호한테 못 박은 채.
61화. 삼자대면
2023.05.01.
그녀의 몸이 침대에 닿자마자 그의 커다란 몸이 그녀의 위를 점령하듯이 덮쳐 왔다.
나영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그녀가 잡아먹히기 직전의 토끼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 올려다보자 태혁이 짓궂게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무서워?”
나영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목덜미에 뜨거운 입술을 묻자 나영은 숨을 꾹 참았다.
강렬한 흡입에 그의 입 안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든 그가 찌푸린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오늘 진짜 어항 청소했어?”
그의 질문에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
그녀가 집에 돌아온 시간은 밤 8시였다.
그녀가 집에 돌아왔을 때 승희는 나가고 없었다.
나영은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어항 앞에 섰다.
‘왜 그러세요?’
‘네가 똑바로 청소를 안 한 거 같아서.’
‘네?’
‘집에 가서 다시 확인해 봐. 분명 청소 안 한 곳이 있을 거야.’
호텔 방에서 태혁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르며 마음이 착잡했다.
그가 그녀의 거짓말을 안 건지, 정말 청소를 대충 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걸 알아내려면 진짜 어항 청소를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나영은 어항 속의 까망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우선 널 다른 곳에 옮겨놔야겠구나.”
어항 청소라는 게 처음이라 서툴기도 하고 꽤 번거로웠다.
그래도 직접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나영은 하나하나 해나갔다.
제일 먼저 까망이를 물이 담긴 유리 볼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 어항의 물을 어렵게 빼고, 물 정화 펌프를 꺼내서 솔로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자갈에 쌓인 배설물도 치우려고 보던 나영은 어항 돌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벨벳 상자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게 뭐지?”
처음 어항을 샀을 때는 분명히 없던 것이었다.
‘어항을 청소했다고?’
‘네.’
그녀의 대답을 듣자마자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하던 최태혁 교수의 모습이 떠오르며 나영은 심장이 쿵쾅댔다.
나영은 어항에 손을 넣어서 상자를 꺼냈다.
그녀는 서둘러 어항에서 꺼낸 상자를 열어보았다.
덜컥.
상자 안에는 반지 두 개가 들어 있었다.
나영은 멍하니 반지를 쳐다보았다.
‘오늘 진짜 어항 청소했어?’
그녀가 거짓말한 걸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마음의 증표로 어항에 남겨둔 반지가 결국은 그녀가 한 거짓말의 증거가 되어 버렸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고 깨어졌다.
***
황 여사가 퇴원하는 날이 드디어 다가왔다.
그리고 나영은 그때까지도 최태혁 교수 앞에서 반지를 꺼내놓지 못했다.
너무 미안해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가 먼저 그녀의 거짓말에 화를 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이런 식으로 그녀를 벌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영은 충분히 혼자 자책하고 있었으니 정말 후자의 이유인지도.
“모두 고마웠어요.”
병원에 입원할 때보다 밝은 표정으로 인사하는 황 여사 앞에서 나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보다 더 병실을 자주 찾아간 승희가 황 여사의 손을 붙잡으며 부탁했다.
“여사님 요리 정말 맛있어요. 앞으로 저도 좀 해주세요.”
“금방 수술받고 퇴원하는 환자의 노동력을 착취하겠다는 거냐?”
최태혁 교수가 살벌하게 추궁하자 승희는 움찔하며 그녀의 뒤로 숨었다.
황 여사가 최태혁 교수를 말리며 웃음으로 마무리했다.
“내가 오 선생 도시락도 만들어서 보낼게요.”
“그럴 필요 없어요. 쟤 오빠가 나한테 착취해 가는 게 얼만데.”
승희가 억울한 표정을 짓자 홍식이 나서서 장담했다.
“승희 씨 도시락은 제가 직접 병원까지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네가 도시락 만드냐!”
태혁이 바로 화를 내자 홍식은 서둘러 차 운전석으로 피신했다.
황 여사도 태혁이 열어준 차 문 안으로 들어갔다.
탁.
차 문을 닫은 태혁은 황 여사에게 말했다.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면 꼭 저한테 전화하시고요.”
황 여사는 걱정 말라고 그를 안심시킨 뒤 나영을 쳐다보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다음에는 우리 집으로 놀러 와요. 도시락으로 맛볼 수 없는 요리도 많으니까.”
나영은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출발해서 떠나자 세 사람만 남겨졌다.
“그럼 저 먼저 들어갑니다.”
승희가 먼저 들어가려고 하자 나영도 그녀를 따라 몸을 돌렸다.
“문나영.”
최태혁 교수의 부름에 그녀의 몸이 덜컹하며 멈추어 섰다.
나영이 주춤하며 돌아보자 그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 시키실 일 있으세요? 교수님.”
그녀가 사무적으로 물으니 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너 나한테 뭐 줄 거 없어?”
태혁의 물음에 나영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녀가 그에게 반지를 주면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은 감당이 안 되었다.
Rrrrrrrrrr Rrrrrrrrr.
그때 그녀를 구해주듯이 전화가 올렸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니 응급실이었다.
나영은 서둘러 핸드폰을 최태혁 교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저 바로 가봐야 하니까 나중에 이야기해요.”
그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몸을 돌려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태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난 뭐라고 한 적도 없는데 왜 저리 겁먹은 거야?”
태혁은 궁시렁대며 병원 건물로 들어갔다.
그는 그녀의 거짓말을 추궁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녀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을 뿐이었다.
***
외래진료할 때는 정말 많은 환자와 보호자를 만나게 됐다.
대학병원에서 치료받으려고 일부러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도 많았기에 짧은 진료 시간 안에 제대로 병명을 파악하거나 병세를 확인해야 했다.
그래서 이런 귀중한 시간 싸움 중에 명품으로 휘감은 이주아가 환자라고 나타났을 때 태혁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나.
“뭐 하자는 겁니까?”
태혁은 바로 화를 냈다.
그녀의 아버지 이철권의 예약 진료는 아직 몇 달이나 남았고, 이주아는 아무리 봐도 환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환자 흉내를 내고 싶었으면 분장으로 얼굴에 황달기라도 만들어 왔어야 했다.
이주아는 다리를 꼬고 앉으며 여전히 오만한 태도로 말했다.
“문나영이 나타나 깽판 치는 바람에 내 맞선이 파토 났어요. 그러니 당신이 책임져야죠.”
이주아의 맞선에 나영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혁은 눈이 커졌다.
그 말은 그러니까 나영이 그한테 거짓말까지 하며 사라졌던 두 시간 동안 이주아를 찾아갔었다는 거니까.
나영이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왜냐하면 더 거슬리는 윤이나는 잘 참아가며 같은 병원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설마 이주아가 그가 모르는 새 나영에게 못된 짓을 한 걸까?
“그건 내 알 바 아니니까 아픈 거 아니면 당장 나가요. 안 그럼 경비 부를 겁니다.”
태혁이 나 몰라라 하자 이주아는 화난 표정을 지었다.
“당신 할아버지가 누군지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그것만 알았어도 난!”
이주아가 할아버지 이야기까지 꺼내자 태혁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
태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주아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얼굴이 키스할 것처럼 가까워지자 간호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다정해 보이는 자세와 달리 태혁이 이주아에게 귓속말로 한 말은 꽤 살벌했다.
“내 할아버지가 누군지 알았으면 이젠 알겠네. 당신 아버지의 백화점 통째로 사서 문나영한테 주겠다는 내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거.”
이주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를 붙잡으려고 일부러 진료표를 끊어서 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또 내 앞에 나타나면 당신 아버지가 망해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어.”
내세울 건 집안의 돈뿐이었던 이주아는 태혁의 경고에 처음으로 공포심을 느꼈다.
***
나영은 벨벳 상자를 열고 그 안에 있는 은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반지는 끼고 다니라고 있는 건데 아직 한 번도 손가락에 껴보지도 못했다.
오늘 외래진료에 이주아가 최태혁 교수를 찾아온 건 병원에 순식간에 퍼졌다.
그래도 그녀의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은 듯했다.
그걸 들었으면 최태혁 교수가 이리 조용할 리가 없다.
하긴. 본인이 한 못된 짓인데 스스로 밝힐 리가 없지.
“웬 반지입니까?”
앞에서 들려온 남자의 굵은 목소리에 나영은 서둘러 상자를 닫았다.
고개를 들자 장수호가 그녀를 쳐다보고 서 있었다.
“앉으세요.”
나영은 자리를 권하며 상자를 가방 안에 서둘러 집어넣었다.
오늘 장수호한테 먼저 만나자고 한 건 그녀였다.
전화로 전부 이야기하기에는 무리였기에 만나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야 내일 최태혁 교수를 찾아가 제대로 말할 수 있을 듯했으니까.
의자에 앉은 장수호는 그녀가 먼저 묻지 않아도 경찰을 찾아간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들을 전부 만나봤는데, 다들 하는 말이 현장에 도착했더니 이미 박재수 형사 혼자 범인을 잡고 문나영 씨를 병원으로 보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최태혁이 한 일이 박재수 형사가 한 일이 되었다.
형사가 태혁의 공을 가로챈 건 절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박재수 형사가 태혁을 일부러 병원으로 불렀을 리가 없다.
“정확한 상황을 알고 있는 건 박재수 형사 한 명뿐인데,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고, 남은 가족들도 박재수 형사가 죽고 전부 뉴질랜드로 이민갔습니다. 그래서 그 가족분들을 만날 수는 없었어요.”
“그럼 뉴질랜드에 사는 가족들 연락처는 알 수 없을까요?”
“제가 경찰에 물어봤는데, 아는 사람이 없더군요. 연락이 끊겼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박재수 형사가 경찰 일 하다가 죽어서 이쪽과는 일부러 연락을 끊은 거 같습니다.”
나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수호의 도움까지 받았는데도 결국 원점이었다.
“그리고 이건 문나영 씨 사건과는 상관없지만, 알아낸 게 있는데.”
장수호가 뭔가 더 있다고 말하자 나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최태혁 교수가 어릴 때 경찰서를 많이 들락날락했더군요. 그때 최태혁 교수를 바로 잡아준 게 박재수 형사였다고 제가 만난 경찰들이 모두 말했습니다.”
그러니 태혁과 박재수 형사는 엄청 잘 아는 사이란 말이었다.
“그리고 최태혁 교수 할아버지가 경찰서에 찾아와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답니다. 경찰청장까지 내려와서 최 교수 할아버지한테 사과했다는데. 그 이후 박재수 형사와 최태혁 교수 사이가 멀어졌다고 하더군요.”
장수호의 설명을 듣고 나영의 눈이 커졌다.
“아! 그럼 할아버지 때문에 일부러 절 구해준 걸 숨긴 거 아닐까요?”
장수호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박재수 형사와 할아버지 사이에 큰 갈등이 있어서 최태혁 교수도 몸을 사리게 된 거라면 그 상황이 말이 됩니다.”
차분히 이야기하던 장수호는 누군가 발견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오늘 최태혁 교수가 와인색 셔츠 입었나요?”
“네?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나영이 놀라서 묻자 장수호는 물잔을 들어 올리며 알려주었다.
“지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어요.”
나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최태혁 교수가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시선을 그녀와 장수호한테 못 박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