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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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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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해피엔딩
2023.04.21.
“그런데 1시간 동안 어떻게 데이트를 해요?”
시간이 너무 짧아서 병원을 나갈 수도 없었다.
병원 안에서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행동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정말 좋은 장소를 알아놨어.”
그러니까 또 옥상은 아니라는 소리 같아서 그녀도 기대감이 생겼다.
나영은 태혁이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마치 병원 안에서 모험을 떠나는 것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어린아이였을 때도 이러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녀는 그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의 나이에 어울리는 삶을 살게 된 거 같았다.
그전에는 사방이 유리로 막힌 공간에 갇혀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었다.
그게 안전하다고만 생각했기에 행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아버지도 오로지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녀와 최태혁 교수를 갈라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참으로 아픈 보호였다.
이제 아버지한테도 그녀가 말해주어야 했다. 더 이상 그렇게까지 무리할 필요 없다고. 그녀는 이제 정말 괜찮다고.
그러니 제발 그녀의 선택을 믿어 달라고.
“교수님은 저한테 마음에 안 드는 거 없으세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최태혁 교수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거 좀 위험한 질문 같은데.”
그녀가 그를 시험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나영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고치고 싶어서 그래요.”
“아! 그럼 애교가.”
그녀의 표정이 바로 차가워지자 태혁은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없는 게 나한테 딱 좋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려던 거 아니에요?”
“아니야. 난 애교 있는 여자 징그러워서 싫어.”
그녀가 눈꼬리를 올리며 쳐다보니 태혁은 몇 번이나 부정했다. 자신은 애교를 아주 싫어한다고.
사실이었다. 그는 원래 귀여운 척하는 여자만 보면 거북했다.
그런데 사랑하면 취향이 바뀌는 건지, 나영이 애교 떠는 모습은 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귀여움에 치여 깨물어주고 싶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직접 느껴보고 싶었지만, 사람은 욕심이 과하면 잃게 되는 법이었다.
가시엉겅퀴 같은 나영도 나름 톡 쏘는 매력이 있었다. 귀여운 나영은 꿈에서라도 만나게 되면 그걸로 만족이다.
“여기예요?”
나영은 태혁이 그녀를 데리고 간 장소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소아과 병동 안에 있는 놀이터였다. 주로 어린 환자들을 위해 마련된 장소였다.
“내가 물어보니까 이 시간에는 아무도 없대.”
“음. 그래서 여기서 뭐 해요? 제가 동화책이라도 읽어드려요?”
“그거 좋지. 아무도 나한테 동화책 읽어준 적 없거든.”
그녀한테 모성애 같은 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가 이렇게 불쑥불쑥 쓸쓸했던 과거를 이야기하면 더 잘해주고 싶어졌다.
두 사람은 동화책이 꽂혀 있는 책장으로 걸어갔다. 꽤 많은 동화책이 책장에 꽂혀 있었다.
그녀가 인어공주를 꺼내자 그는 바로 그 책을 멀리 던져버렸다. 마치 인어공주가 옛 여친이라도 된다는 듯이.
“공주랑 왕자 안 나오는 걸로.”
원래 동화책이라는 게 공주와 왕자의 해피엔딩을 읽는 맛이었는데, 최태혁 교수는 다른 커플의 해피엔딩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다른 걸 요구했다.
나영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럼 이건요?”
태혁은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미 다 아는 이야기였지만, 그녀가 들려주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어떤 느낌의 이야기일지 궁금했다.
나영이 동화책을 펼치자 태혁은 그녀에게 물었다.
“네 다리에 머리 대고 누워도 돼?”
나영은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사람들 오면.”
놀이터가 운영 안 하는 시간이라서인지 오가는 직원이 안 보이기는 했지만, 언제든지 누가 나타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싫구나. 알았어.”
그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자 그게 너무 신경이 쓰였다.
여긴 병원 안이었으니 조심하는 게 좋았지만, 고작 1시간 데이트하는 건데 그와 좋은 기억만 남기고 싶었다.
어째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는 말이 자꾸 생각났다.
“알았어요. 누워요.”
그녀가 허락하자 그는 바로 그녀의 다리 위에 머리를 기대 누웠다. 그리고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야 진짜 데이트다워졌네.”
아무래도 이러려고 굳이 여길 데려온 거 같았다. 아이들 놀이터 데려왔으니 순수한 남자일 거라는 건 착각일 뿐이었다.
나영은 자꾸 주위를 확인하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으며 동화책을 펼쳤다.
“이제 진짜 읽어요.”
태혁은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며 눈을 부드럽게 접었다.
“너는 아래에서 봐도 예쁘네.”
당연한 소리였기에 무시하고 동화책을 읽으려는데.
“콧구멍도 예쁘다.”
나영은 바로 손으로 코를 가리고 동화책으로 그의 배를 때렸다.
알몸 보여준 것보다 콧구멍 보여준 게 더 낯 뜨거웠다.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어서 동화책 읽어줘.”
태혁이 몇 번이나 사과해서야 나영은 진정했다.
동화책 한 번 읽는 게 쉽지 않았다.
나영은 또 태혁이 그녀의 콧구멍을 보지 못하게 동화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읽기 시작했다.
“옛날에 한 소년을 사랑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감정이 실리지 않고 조금 건조한 편이었지만, 그녀가 동화를 읽어주는 동안 태혁은 그 소설 속의 철없는 소년이 된 것도 같았고, 모든 걸 다 내어주는 나무가 된 것도 같았다.
“동화는 해피엔딩이라서 좋은데, 이건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모르겠어요.”
“마지막에 함께하면서 끝나니 해피엔딩이겠지.”
1시간의 데이트, 동화 한 편,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너.
모든 게 다 아름다워서 꼭 잠시 꿈을 꾼 듯했다.
***
K 호텔 레스토랑.
뚜벅뚜벅.
그녀가 걸을 때마다 플레어스커트 자락이 살랑거렸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걸어가는 기백과 그녀의 미모 때문에 식당에 있는 사람들이 한 번씩 다 쳐다보았다.
교양있는 몸짓과 목소리로 맞선남과 담소를 나누던 이주아가 가장 늦게 그녀를 발견했다.
“문나영?”
이주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한일 그룹 사장 아들과 맞선을 보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녀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날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문나영이 갑자기 난입할 줄 상상이나 했겠나.
이주아는 바로 앞에 앉아있는 사장 아들 때문에 화는 못 내고 억지로 웃으며 그녀에게 경고했다.
“보시다시피 난 바쁘니까 그만 가지.”
나영은 힐긋 이주아의 맞선 상대를 보았다.
처음부터 이상했었다.
공교로운 시기에 들어온 황금알 같은 맞선 상대.
이제야 이게 최태혁 교수의 작품이라는 걸 알아챘다.
“우리 아버지 사무실에 편지 보낸 거 당신이에요?”
이주아는 들켰다고 당황하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쳤다.
“난 두 사람 결혼까지 하라고 일부러 상견례를 앞당긴 거죠. 왜요? 아버지가 의사 사위로는 만족 못 하시겠대요?”
그녀는 처음으로 진심이었는데, 그대로 고이 물러나기는 억울해서 잔잔한 물에 돌멩이 던지는 심보로 태영건설 전무실로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문나영이 분해서 여기까지 쫓아온 걸 보니 고소하긴 했다.
나영은 이주아의 도도한 얼굴을 쳐다보다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럼 나도 당신이 몰랐던 거 알려줄게요. 최태혁 교수 할아버지가 오늘 당신이 맞선 보는 저 남자 집안보다 더 돈이 많아요.”
“뭐?”
이주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영의 두 팔을 움켜잡으며 히스테릭하게 따져 물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 그 남자 할아버지가 누군데? 누구냐고!”
이주아는 뒤늦게야 맞선남의 얼굴에 뜬 혐오감을 읽고 멈칫했다.
탁.
나영은 이주아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돌려 레스토랑을 걸어 나갔다.
단지 분풀이일 뿐이라는 걸 알았다. 이런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그럼에도 오늘 여기 오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
오늘 병원 출근이 아니었지만 태혁은 평소와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외출 준비를 했다.
황 여사가 있는 병원에도 갈 가고, 나영도 만날 거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는 날이라 일부러 밝은 색의 옷을 꺼내 입었다.
태혁은 황 여사의 병실에 먼저 찾아갔다. 이제 4일만 지나면 황 여사는 퇴원이었다.
전이가 없었기에 항암치료는 받지 않아도 되었다.
태혁도 한시름 놓게 되었다.
“오늘 같은 날은 데이트해야지. 뭐 하러 왔어?”
황 여사는 이제 수술한 곳도 거의 회복되었기에 그가 올 필요 없다고 했다.
“여기서 나영이랑 만나기로 했어요. 곧 올 거예요.”
그의 말에 그제야 황 여사는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때문에 두 사람이 함께할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제 점점 늙어갈 시간이지만, 두 사람은 한창 사랑할 청춘이었으니까.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리자 태혁은 나영이라고 생각하고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가, 문을 연 사람이 윤이나인 걸 알고 바로 정색했다.
“네가 웬일이야?”
그가 불청객 취급해도 윤이나는 나긋한 목소리로 답했다.
“오늘도 네가 여기 있을 거 같아서 왔어.”
황 여사는 두 사람의 분위기를 살피듯이 번갈아 보았다.
윤이나는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녀를 수술해준 의사였으니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태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병실 입구로 걸어갔다.
“나와.”
그가 나가버리자 윤이나는 황 여사에게 다소곳이 인사한 뒤에 태혁의 뒤를 따라서 병실을 나갔다.
병실에 혼자 남은 황 여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잘난 사내로 태어나 인기가 많은 것도 골치 아픈 일이었다.
부디 나영이 오해하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병실을 나온 태혁은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창가에 서서 아래를 살피며 혹시 나영이 오고 있는지 먼저 확인했다.
“우리 같이 수술하던 날 문나영한테 남자 찾아온 거 알아?”
멈칫.
태혁은 잠시 차가운 눈으로 정면을 쏘아보았다.
“그래서 넌 그 말 하려고 굳이 근무도 아닌 날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온 거야?”
“못 믿겠으면 그날 근무했던 병동 간호사한테 물어봐. 직접 문나영한테 명함 전한 간호사도 있으니까.”
태혁은 천천히 몸을 돌려 뒤에 서 있는 윤이나를 쳐다보았다.
“그 말을 나한테 해서 네가 얻는 게 뭐야?”
언제나처럼 절대 뚫리지 않는 철벽을 치는 태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윤이나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 같이 수술하면서 정말 행복했어. 그날은 병원 사람들이 온통 너와 내 이야기만 했었지. 널 알고 지낸 14년 동안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어. 그래서 깨달았어. 내가 너 때문에 참 오래 불행했다는걸.”
“그것조차 내 탓을 하겠다면 넌 진짜 구제 불능인 거고.”
그가 힐난하자 윤이나는 흐릿하게 웃었다.
“그래, 내 탓인 걸로 하자. 그래서 난 너도 불행했으면 좋겠어. 나랑 똑같이.”
그의 불행을 비는 윤이나의 말은 처음으로 그의 마음을 흔드는 데 성공했다.
태혁은 세상에서 그 말이 제일 무서웠다.
“문나영한테 그 남자에 대해 꼭 물어봐.”
윤이나는 그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갔다.
또각또각.
윤이나의 하이힐 소리가 그의 귀에 못을 박아대듯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