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데이트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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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데이트할래?
2023.04.17.
그녀는 마음먹고 고백한 게 아니라 어쩌다 그 말이 나오게 된 거라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했던 거 같은데.”
그녀가 발뺌하자 태혁은 쿡 웃음이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왔다.
“설마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야?”
“저 그만 가볼게요.”
그녀가 서둘러 돌아서자 태혁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대로 끌려와서 그의 옆자리에 억지로 앉혔다.
“이제야 마지막 용기를 제대로 냈네. 기특해.”
태혁은 아낌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나영은 더 이상 사람을 좋아하는 일에 경계하며 뒷걸음질 치지 않을 거다.
황 여사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만큼이나 기쁜 일이었다.
어린애 취급받는 게 별로라서 나영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을 피했다.
“교수님은 아직 할아버지에 대해 대답 안 했거든요.”
그녀가 다시 대화 주제를 할아버지로 끌고 오자 태혁은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바로 사라졌다.
그는 콜라 캔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아니라고 하고 싶다.”
그러니까 친할아버지 맞다는 소리였다.
나영은 고개 숙인 그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둘이 좀 닮은 거 같던데요.”
“뭐?”
최태혁 교수가 질색하는 걸 보고 나영은 웃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부모님 대신 키워주신 거죠? 그럼 그렇게 대들면 안 되죠.”
“할아버지가 부모님 대신 한 건 날 때린 거뿐이야. 나한테 밥 해준 건 황 여사고, 학교에서 부모님 모셔 오라고 할 때마다 와준 건 홍식이 아버지거든.”
그래도 아무런 추억도 없는 부모님과 달리 할아버지와 그는 함께한 시간이 있었다.
그게 나영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병원까지 와서 돈 밝히는 거 정말 창피하다.”
태혁은 진짜 창피하다는 듯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돈을 싫어하게 된 건 전부 돈에 미친 할아버지 탓이었다.
“그래도 의대 가는 거 제일 처음 할아버지한테 말했다면서요.”
그제야 최태혁 교수가 얼굴에서 손을 떼고 그녀를 보았다.
“내가 그랬어?”
그가 처음 듣는 듯이 굴자 나영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모님 이름 걸고 할아버지 앞에서 맹세했다고요.”
“그렇게 하면 의대 학비는 내줄 줄 알았지.”
최태혁 교수는 돈 때문에 남 앞에서 맹세할 리가 없었다.
괜히 인정하기 싫어서 그리 말하는 게 뻔히 보였기에 나영은 그에게 당부했다.
“할아버지 옷 다 낡았던데. 옷 좀 사드리세요. 교수님만 좋은 옷 입지 말고.”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최태혁 교수가 헛웃음을 지었다.
“나만 불효자 됐네.”
그 노인네가 그리 돈을 아껴 모은 재산이 얼만지 알면 나영은 지금 자신이 얼마나 실없는 소리를 한 건지 알게 될 거다.
찌뿌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최태혁 교수의 옆얼굴을 나영은 말없이 쳐다보았다.
지금 그에게 장수호를 만난 걸 말하지 않는 게 꼭 그를 속이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장수호가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거다.
그사이 어떻게든 장수호와 함께 아버지를 설득할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이 최태혁 교수가 고개를 돌려 나영을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나영은 그가 눈치챌까 봐 긴장했다.
“제가 어떤 눈으로 봤는데요?”
“사연 있는 여자처럼.”
나영을 일부러 한숨을 내쉬면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사실 요 며칠 윤이나 교수님한테 열등감을 많이 느꼈어요. 윤 교수님은 황 여사님을 살릴 수 있었는데, 저는 아무것도 못 하잖아요.”
그녀의 말을 듣고 태혁은 시니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황 여사님 수술 부탁한 뒤로 윤이나도 나한테 꼭 큰 은혜를 베푸는 거 같은 태도였어.”
태혁은 그런 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사가 사람 살리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그게 특별한 일이 된다면 오히려 사람들한테는 불행이야. 그러니 윤이나는 생각하는 게 글렀고, 넌…….”
최태혁 교수가 그녀를 쳐다보자 나영은 그의 말을 기다리며 눈을 크게 떴다.
열심히 노력하라고 하면 그럴 생각이었다.
“아직 어리고 예쁘잖아. 네가 승자야.”
그의 말이 옆길로 새자 나영은 바로 그의 팔을 손으로 때려 버렸다.
최태혁 교수는 그녀한테 얻어맞으면서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나영은 안도감이 들었다.
흔들리던 일상이 이제야 정상 궤도를 찾은 기분이었다.
***
나영이 길었던 병원 근무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승희는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 뭐 해?”
그녀가 묻자 승희는 영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물이 죽어도 안 나온다. 나란 인간 왜 이리 건조하냐?”
“무슨 일 있어?”
승희는 고개를 쳐들며 억울한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나한테 희노애락이 없다잖아!”
나영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차현 감독이 나보고 희노애락이 안 느껴져서 전화번호를 안 알려주겠대. 이거 나 놀린 거 맞지?”
승희의 반응을 보니 차현이 그녀와의 약속대로 전화번호를 안 가르쳐 준 거 같았다.
“눈물 흘릴 일 없는 건 좋은 거야.”
사실 나영은 승희의 그런 점이 좋아서 친구가 된 것이었다.
승희는 살아온 삶이 평탄하고 성격이 단순했다.
그래서 옆에 있으면 그녀도 덩달아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데 승희는 차현과의 만남에 큰 자극이라도 받은 건지 심각하게 말했다.
“나 결심했어.”
“뭘?”
“나도 너처럼 연애할 거야!”
승희는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리며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누구랑?”
설마 승희의 입에서 차현의 이름이 나올까 봐 불안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이제부터 찾아봐야지.”
“설마 병원 남자들 다 찔러보고 다닐 건 아니지?”
승희라면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오승희 머리 위에서 오승준 교수가 있는데 누가 감히 도전하겠는가.
“병원 밖에서 찾을 거야.”
승희도 자신의 현실을 아는 듯이 병원 남자들은 바로 포기했다.
“우리가 병원 밖으로 나갈 시간이 언제 있다고.”
“그럼 우선 인터넷으로 찾아봐야겠어.”
인터넷으로 남자를 찾겠다고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는 승희를 나영은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전화번호로 시작된 일이 어째 점점 커지는 거 같았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장수호의 전화라서 나영은 서둘러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혹시 최남기라고 아십니까?]
“네? 그게 누군데요?”
[기업가들 사이에는 유명한 투자자입니다. 돈이 되는 사업에는 항상 최남기가 등장하죠.]
나영은 장수호가 왜 그런 거물 이야기를 그녀한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무님이 정말 혐오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왜요?”
[과거에는 사채업자였거든요. 서민들의 고혈로 부를 쌓았다고.]
나영은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최태혁 교수의 할아버지입니다.]
나영은 황 여사의 병실에서 만난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낡은 옷에 낡은 구두를 신은 할아버지는 그저 손자와 좀 사이가 나쁜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을 뿐이었다.
[이런 말 하게 되어서 유감이지만, 쉽지 않겠네요.]
그녀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우선 그때 사건 맡았던 다른 경찰들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럼 뭔가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장수호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
황 여사님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는 나영은 일부러 먼저 최태혁 교수한테 연락하지 않았다.
그래야 그가 편하게 황 여사님을 간호할 수 있을 테니까.
그녀도 황 여사님 병실에 자주 가보고 싶었으나, 레지던트 1년 차가 워낙 바쁘기도 했고, 장수호가 전화로 알려 준 사실 때문에 혹시라도 얼굴에 다 티가 날까 봐 쉽게 가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 대신 승희가 자주 병실에 들러서 최태혁 교수와 홍식과 같이 고스톱도 쳤다고 했다.
나영은 용기를 내어서 인터넷으로 최남기를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나오는 기사가 전혀 없었다.
장수호의 말이 거짓말인 거 같기도 했고, 자신을 숨기는 재주가 비상한 무서운 권력층이라는 뜻 같기도 했고.
그녀의 앞에서 할아버지에 대해 말하길 주저하던 최태혁 교수의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아무래도 장수호의 말이 맞는 거 같았다.
그녀는 단지 그가 고아인 것만 아버지한테 잘 설명하면 된다고 생각했건만, 그의 할아버지는 더 넘지 못할 산이었다.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황 여사님을 위해 기도하는 거야?”
갑자기 앞에서 들린 최태혁 교수의 목소리에 나영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가 바로 앞에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오셨어요?”
방금 인터넷으로 그의 할아버지를 찾아봤기에 나영은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어떻게 오긴. 내 발로 안 찾아오면 얼굴을 볼 수 없으니까 온 거지.”
“전 교수님이 당연히 황 여사님 병실에 있을 줄 알고.”
탁.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자마자 태혁이 그녀의 손을 잡고 비상계단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오늘도 너 안 만나면 꼭 내가 차일 거 같아서 안 올 수가 없었어.”
그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자 나영은 목구멍이 콱 막혔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육감은 지독하게도 좋았다.
그래서 그때도 그녀를 구할 수 있었겠지.
그때 그는 작은 소리 하나만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차를 쫓아와서 그녀를 구해주었으니까. 이번엔 그녀도 그러고 싶었다.
그를 지키기 위해서.
나영은 두 팔을 들어 올려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교수님한테 제가 그렇게 나쁜 여자예요?”
태혁은 그녀가 먼저 안아서 살짝 놀랐다. 여긴 병원이었으니까.
병원 안에서 같이 잔 거 티 내면 가만 안 두겠다고 살벌하게 굴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건만.
“사람이 나쁘니까 차나, 마음이 식으니까 차는 거지.”
차이기 싫다고 말한 건 그였지만, 오히려 나영이 더 잃고 싶지 않아서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나영은 울컥한 마음을 꾹 누르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차는 쪽보다 차이는 쪽 할래요. 그래야 발 뻗고 자죠.”
태혁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가 뜨거운 숨결을 전하자 그녀의 몸이 흔들리는 꽃잎처럼 떨렸다.
태혁은 이대로 그녀를 놓아주는 게 너무 아쉬워서 말했다.
“우리 지금 딱 1시간만 데이트할래?”
여긴 병원이고, 아직 황 여사님이 완쾌한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사랑은 뜨거워서 모른 척 살 수가 없었다. 잠깐만이라도 그 사랑이 전부인 시간 속에서 숨 쉬고 싶었다.
충동적인 그의 데이트 제안에 나영은 속도 없이 설렜다.
무슨 일이 닥쳐도 그만 옆에 있으면 다 괜찮을 거 같다는 이 근본 없는 마음이 미련하면서도 가장 소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