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좋아해요.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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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좋아해요. 교수님
2023.04.14.
아버지가 그녀를 구해주었다고 믿고 있는 경찰을 우선 만나봐야 했다.
그런데 그녀의 부탁에 장수호가 처음으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전무님한테 그 이야기를 들은 게 바로 그 경찰의 기일이었습니다.”
그 경찰이 이미 죽었다는 말에 나영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어쩐지 최태혁 교수가 홍식은 소개해 주어도 경찰 이야기는 전혀 안 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만약 제가 아버지한테 절 구해준 사람이 경찰이 아니라 그 남자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장수호의 쌍꺼풀 없는 눈이 예리하게 가늘어졌다.
“전무님은 경찰이 자기 딸을 구한 은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계십니다. 확실한 증거 없이 그렇게 말하면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나영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도로를 쌩쌩 달리는 차들을 쳐다보았다.
확실한 증거라니.
그녀가 당사자였다.
그런데 그녀의 말 외에 뭐가 더 확실한 증거가 된단 말인가.
***
수술을 보고 온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한마디씩 했다.
“우와. 진짜 둘이 수술하면 금방 죽을 사람도 살려낼 거 같더라. 포스가 후덜덜해.”
“어시스트가 집도의보다 시선 강탈하는 건 또 처음 본다.”
“그런데 오늘 수술은 두 사람한테 너무 쉬웠어. 좀 어려운 수술로 했으면 더 좋은 구경거리였을 텐데 말이야.”
최태혁 교수가 이번 수술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르면서 함부로 뱉어내는 말에 나영은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래도 수술은 문제없이 무사히 끝난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
윤이나를 결코 좋아할 수는 없지만, 오늘만은 그녀한테 감사했다.
나영은 시계를 보았다.
아마 최태혁 교수는 집중치료실까지 따라갔을 거다.
황 여사가 눈을 뜰 때까지는 거기서 지키고 있을 거 같았기에 나영도 굳이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삑삑.
메시지 알람이 울리자 그녀는 바로 확인했다.
혹시나 하였지만 역시나 최태혁 교수가 보낸 건 아니었다.
<전무님께 문나영 씨를 계속 만나보고 싶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분 뒷조사한 거 맞습니다.>
장수호가 보낸 메시지였다.
뒷조사라는 말에 나영은 눈빛이 무거워졌다.
최태혁 교수가 고아라는 건 바로 알게 될 거다.
그게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을 건 분명했다.
하지만 최태혁 교수는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버지는 그한테 무조건 고맙다고 감사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건 아버지가 아무리 샅샅이 뒷조사해도 나오지 않을 거라 나영은 표정이 심각해졌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모든 걸 밝히고 아버지를 믿게 만드는 것과 아예 그 일은 함구하고 아버지의 반대를 뚫고 나가는 거.
나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아버지에게 유괴 사건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건 너무 위험한 선택이었다.
만약 아버지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믿지 않는다면 아버지는 최태혁 교수를 해치려고 할 수도 있었다.
그게 가족을 지키는 일이라고 아버지가 믿는다면 분명 그리할 거다.
나영은 그와 헤어질 상황이 오더라도 결코 그를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
차현은 촬영을 끝내고 늦은 밤에 병원으로 찾아왔다.
황 여사는 집중치료실에서 병실로 옮겨져서 자고 있었고, 병실은 태혁이 지키고 있었다.
“홍식이는?”
병실에 들어온 차현이 제일 처음 묻는 말에 태혁은 짧게 대답했다.
“집에 갔어.”
오늘은 그가 병실을 지키기로 했다.
차현은 침대 옆으로 다가와서 황 여사의 얼굴을 살폈다.
굳이 수술 잘 되었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수술이 잘못되었으면 태혁이 이리 얌전히 앉아만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네 할아버지는 안 오셨어?”
이 정도로 큰 수술이니 30년 고용주로서 와볼 만도 했다.
“내가 병원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어.”
“넌 꼭 나쁜 일만 생기면 다 할아버지 탓하더라.”
“그럼 할아버지 탓 아니면 너냐?”
태혁이 그를 노려보며 따지자 차현은 짧게 웃었다.
“그럼 다음에 할아버지가 아프시면 그땐 누구 탓하려고?”
“재수 없는 소리 할 거면 당장 꺼져.”
태혁이 바로 화를 내자 차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평생 서로 아옹다옹해도 결국 서로에게 유일한 핏줄이었다.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가장 먼저 구하러 달려올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도 네 할아버지가 누군지 나영 씨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차현의 지적에 태혁은 표정이 굳었다.
차현은 진지하게 충고했다.
“만약 다른 사람을 통해 알게 되면 네가 속였다고 생각할 거야.”
“다른 사람을 통해 어떻게 알아? 네가 또 나 몰래 말하지 않는 이상.”
태혁은 차현이 그의 동의 없이 나영에게 부모님에 대해 이야기한 걸 이제야 추궁했다.
그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병원 사람들도 몰랐다.
“이제라도 할아버지를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제대로 마주해 보는 게 어때?”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고, 나는 나야.”
태혁은 할아버지의 유산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선을 분명하게 그었다.
차현은 병실을 나가기 전에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태혁을 보았다.
그는 잠든 황 여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따지고 보면 그냥 남남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사이가 핏줄로 이어진 가족보다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아파도 똑같이 해줄 거야?”
차현의 질문에 태혁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미친놈아. 헛소리 말고 빨리 꺼져.”
마지막에 욕을 한바탕 얻어먹고 차현은 병실을 떠났다.
차현이 병원 건물을 나와서 주차한 차로 걸어가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달려왔다.
“차현 감독님! 잠깐만! 감독니임!”
무시할 수 없는 집요함이 묻어났기에 차현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의사 가운을 입고 동그란 안경을 쓴 여자가 열심히 뛰어오고 있었다. 꼭 토끼가 뛰어오는 거 같았다.
그의 앞까지 뛰어온 여자는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도 활짝 웃었다.
“와! 진짜 맞네. 병원에 한 번은 꼭 올 줄 알았어요. 헉헉. 이 시간일 줄은 몰랐지만. 제가 오늘 응급실 담당이 아니었으면 하마터면 놓칠 뻔했네. 전 역시 운이 좋아요.”
차현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나영이 부탁한 말이 불현듯 떠올랐기에.
“저 누군지 기억하세요?”
“문나영 씨 룸메이트 아닙니까?”
“맞아요! 제가 나영이 룸메이트 오승희거든요.”
그녀는 기쁜 마음을 한껏 드러내며 그한테 바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감독님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
문나영은 정확히 말했다.
그의 전화번호를 그녀의 친구에게 알려주지 말라고.
마치 이 상황을 미리 예견한 듯이.
“아! 미안하지만…….”
“오해하지 마세요. 사적인 관심으로 달라는 거 절대 아니니까. 나영이랑 최 교수님 사이에 문제 생겼을 때 제가 감독님한테 도움 청하려고 그래요.”
그녀의 눈빛은 전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마치 아직 세상의 때를 타지 않은 10대 소녀 같은 무구한 눈빛이었다.
“그래도 못 가르쳐 주겠는데요.”
마지막으로 차현 감독까지 거절하자 승희는 믿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
늦은 밤이 되어서야 나영은 황 여사의 병실로 향했다.
그래도 이제 수술 회복만 하면 되니까 최태혁 교수가 수술 전보다는 마음을 놓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관리만 잘하면 황 여사님은 괜찮을 거다.
우뚝.
나영은 멈추어 섰다.
병실 앞에 웬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80년대 사람인 듯한 복장을 하고 서 있어서 꼭 타임 슬립이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누구지?
황 여사님과 아는 분인가? 설마 진짜 가족?
“저기. 어떻게 오셨나요?”
나영이 조심스럽게 묻자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이 든 얼굴에서 눈빛만은 기백이 실려 있어서 시선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여기 황순덕 담당 의사인가?”
할아버지의 걸걸한 물음에 나영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볼 일 없으니까 가던 길 가시오.”
그건 또 그럴 수 없는 게 그녀가 찾아온 곳도 이 병실이었다.
“저도 황 여사님 찾아온 거라서요.”
그녀가 황 여사를 찾아왔다는 말에 그녀를 쳐다보는 할아버지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황 여사한테 그쪽 같은 가족은 없는데.”
“아! 전…….”
나영은 자신을 뭐라고 소개해야 하나 난감했다.
어쨌든 직접적으로 황 여사와 관계있는 건 아니었기에.
벌컥.
그때 병실 문이 갑자기 열리며 최태혁 교수가 등장했다.
나영과 할아버지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나영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대신 말해달라고 하려는 순간 최태혁 교수가 그녀의 팔을 붙잡더니 그대로 병실 안으로 끌어당겼다.
탁.
그녀가 병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닫히는 문을 보고 나영은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밖에 아직 사람 있는데.”
“그래? 난 못 봤는데.”
못 보다니.
그럼 그녀가 귀신이랑 이야기했단 말인가!
나영이 다시 병실 문을 열려고 하자 최태혁 교수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소파로 끌고 갔다.
그의 손이 그녀를 억지로 소파에 앉혔다.
“너무 늦었으니까 여기서 눈 좀 붙여.”
“하지만…….”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그 할아버지가 다시 등장했다.
역시 귀신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최태혁 교수를 노려보며 병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최태혁 교수도 지지 않고 할아버지를 노려보았다.
그사이에 낀 나영은 점점 몸이 쭈그러드는 기분이었다.
“제가 병원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죠.”
최태혁 교수가 할아버지에게 하는 말을 들으니 잘 아는 사이 같았다.
그때 할아버지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그놈이랑 무슨 사인가?”
최태혁 교수가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시선을 차단했다.
“관심 끄세요.”
“그래서 네 뒤의 여의사가 앞으로 내 재산 상속받을 자격은 절대 없을 거란 소리냐?”
재산 상속? 설마 최태혁 교수의 친할아버지?
“황 여사님 깨시기 전에 빨리 나가세요.”
“너는 최 씨냐? 황 씨냐?”
진짜 할아버지였다.
나영은 생각도 못 한 순간 마주친 최태혁 교수의 진짜 가족에 멘붕이 왔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싸우고 있었으니까.
“어르신. 당연히 최 씨죠.”
갑자기 황 여사의 목소리가 끼어들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침대 쪽을 보았다.
나영은 소파에서 일어나 제일 먼저 황 여사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황 여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영 씨가 이해해요. 저 두 사람 싸우는 거 절대 아냐.”
태혁은 팔짱을 끼며 못마땅한 눈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보았고, 최남기는 뚜벅뚜벅 침대 근처로 걸어왔다.
“이제 다 나은 거 같으니까 얼른 퇴원해야지. 병원에 오래 있어봤자 다 돈 낭비야.”
“무슨 개소……, 읍!”
나영은 서둘러 최태혁 교수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병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안 그럼 진짜 할아버지와 싸울 거 같았으니까.
나영은 최태혁 교수를 휴게실로 데려가서 자판기에서 콜라를 뽑아 내밀었다.
“마시세요. 속이 좀 뚫릴 거예요.”
태혁은 콜라를 받아서 벌컥벌컥 마셨다.
그의 목울대가 요란하게 움직이는 걸 나영은 잠시 구경하였다.
“아까 그분 교수님 친할아버지 맞죠?”
그녀는 단지 물었을 뿐인데, 최태혁 교수는 콜라도 더 못 마시고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게…….”
최태혁 교수가 이런 자신 없는 모습은 처음이라서 나영은 먼저 말했다.
“교수님 가족이 누구든 전 계속 교수님 좋아할 거예요.”
그녀의 말을 듣고 태혁은 가슴이 쨍하며 울렸다.
“네가 나 좋아한다고 말한 거 처음인 거 같은데.”
그 말은 그에게 설렘이기도 했고, 위로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