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저는 만나는 남자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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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저는 만나는 남자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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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저는 만나는 남자가 있어요
2023.04.10.
최태혁 교수가 사 온 도시락은 장어덮밥이었다.
전에 황 여사가 싸준 장어 반찬을 그녀가 잘 먹어서 일부러 먹고 힘내라고 사 온 듯했다.
사실 이걸 먹어야 할 건 그녀가 아니라 그였다.
“교수님도 드세요.”
“난 먹었어.”
태혁이 도시락을 그녀의 앞으로 밀며 어서 먹으라고 재촉했다.
그래서 나영은 장어를 입에 넣고 씹었다.
그런 그녀에게 태혁이 물었다.
“오늘 황 여사님이 사람들 앞에서 도시락 줘서 당황하지 않았어?”
나영은 장어가 목에 콱 막히는 거 같아서 그를 흘겨보았다.
“교수님 눈에 전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에요?”
“그런 뜻 아냐.”
태혁이 웃으며 부정했지만, 나영은 자꾸 과거의 행동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한테 병원 생활 방해하지 말라고 구박했던 게 너무 후회되었다.
나영은 젓가락으로 밥을 쿡쿡 찌르다가 그에게 물었다.
“내일 수술 걱정되세요?”
“위험한 수술 아니라는 거 다 알잖아. 굳이 걱정할 필요가 뭐 있어.”
그래도 그와 가까운 사람이 수술대에 오르는 건 처음일 거다.
나영은 고개를 들어 그의 옆얼굴을 보았다.
평소의 최태혁 교수는 가만히 있어도 에너지가 넘치는 분위기였는데, 오늘의 그는 꼭 선비처럼 차분했다.
나영은 지금 그한테 아버지가 정한 맞선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황 여사의 수술만으로도 머릿속이 꽉 찬 사람에게 또 다른 문제를 떠안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황 여사님이 건강히 퇴원하시게 되면 그때 이야기해야겠다.
그전에는 어떻게든 그녀의 선에서 해결하는 게 그나마 최태혁 교수를 도와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내 얼굴을 너무 뚫어지게 보니까 좀 부끄러운데.”
최태혁 교수의 말에 나영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장어덮밥을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먹는 데 집중하는 나영을 보고 태혁은 짧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를 보고 있으니 믿음이 생겼다.
다 괜찮을 거라고.
***
승희가 위장관 외과였기에 나영은 승희에게 부탁해서 함께 병실로 찾아갔다.
수술 전에 황 여사는 단식을 하고 있어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홍식이 지키고 있었다.
“두 분이 같이 오셨네요.”
홍식이 벌떡 일어나며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
나영은 침대 옆으로 걸어가 황 여사에게 물었다.
“컨디션은 어떠세요?”
이제 3시간 뒤에 수술이었다.
“좋아요.”
황 여사가 전신 마취하는 큰 수술은 처음이라고 했기에 나영은 그녀를 안심시켰다.
“수면내시경 하신다고 생각하세요. 마취하고 깨면 수술 다 끝났을 거예요.”
“태혁이도 수술 들어온다고 하니 나야 하나도 걱정하지 않아요.”
황 여사와 이야기하던 나영은 뒤에서 따로 이야기하는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홍식이 어느새 승희의 옆에 붙어 서서 말하고 있었다.
“뭐 필요하신 물건 있으면 저한테 연락하세요. 제가 뭐든 구해다 드릴게요.”
누가 보면 영업하는 줄 알겠다.
그러고 보니 홍식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녀는 아직도 정확히 몰랐다.
“그럼 차현 감독님 전화번호 아세요?”
여기서 또 차현의 전화번호를 묻는 승희를 나영은 어떻게 하냐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병실에 들어온 뒤 내내 웃고 있던 홍식은 처음으로 정색하며 항의했다.
“그건 물건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바로 몸을 돌려 병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승희와 나영은 놀라서 병실 입구를 쳐다보았다.
“왜 저러지? 내가 뭐 실수했어?”
승희가 나영에게 물었다.
나영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는데 황 여사가 대신 설명해 주었다.
“홍식이가 첫사랑도 차현한테 뺏겼어요. 그 상처가 아직도 큰가 보네.”
“네? 첫사랑이요?”
여기서 왜 첫사랑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수 없어 승희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나영은 역시 차현이 바람둥이라고 생각하며 승희에 대해 미리 주의시킨 건 그녀가 최근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
한강대학교 병원에서는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암 수술이었지만, 윤이나와 최태혁이 함께 수술실에 들어간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당겨서 참관실은 수술 시작 1시간 전부터 이미 만원이었다.
“뭐야? 벌써 꽉 찼다고?”
“좋은 자리는 교수님들 지정석이라 아예 앉을 수도 없어.”
“이 수술 보러 교수님들까지 온다고?”
수술 참관이 유명 아이돌 콘서트 표 구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수술 영상은 의국에서도 볼 수 있지만, 윤이나와 최태혁 투 샷의 수술 장면은 참관실에서만 볼 수 있었기에 경쟁이 치열해져 버렸다.
“위장관 외과가 자리를 다 차지하는 건 불공평하지. 몇 자리 내놔!”
“이건 우리 교수님 수술이야! 당연히 우리 과가 봐야지!”
결국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레지던트들끼리 언쟁까지 붙으며 한바탕 시끄러워졌다.
참관실이 난리가 난 걸 모른 채 태혁은 스크럽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오늘 수술실에는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 대신 그를 키워준 황 여사가 들어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의 가슴은 답답해졌다.
그가 처음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건 할아버지가 그 때문에 충격받고 쓰러졌을 때였다.
결국 그는 언제나 무언가를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나쁜 놈들을 쫓아다닌 거고, 그래서 의사가 된 것이었다.
지킬 수 없다면 살아 있는 의미가 없었다.
꾹.
태혁은 힘을 주어 주먹을 움켜쥐었다.
푸른 핏줄이 팔뚝까지 솟아올랐다.
“긴장돼?”
어느새 다가온 윤이나가 그의 옆에서 스크럽 솔을 집어 들며 물었다.
“그래, 되네.”
최태혁이 솔직하게 인정하자 윤이나는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수술실 안에서 언제나 대담했던 그였다.
그건 처음 수술실에 들어갔던 인턴 시절부터 그랬다.
두려움이 없는 거침없는 모습에 윤이나는 매번 매료되곤 하였다.
반대로 그녀는 처음엔 겁이 났지만 반복되는 수술을 통해 단련된 의사였다.
수술 횟수는 최태혁보다 그녀가 월등히 많았다.
성실함으로 사람을 평가한다면 그녀는 무조건 만 점이었다.
“그럼 내가 이 수술 완벽하게 해내면 넌 영원히 날 못 잊겠구나.”
윤이나의 말에 길게 뻗은 태혁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아마도 윤이나는 그가 단지 나영의 얼굴에 반해서 잠시 마음이 뺏긴 거라고 믿는 거 같았다.
하지만 지금 나영과 그의 인연이 얼마나 깊은지 윤이나에게 말할 수 없었다. 이제 곧 수술실에 들어가야 하니까.
지금만은 윤이나를 자극하면 안 되었다.
태혁이 부정하지 않자 윤이나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
모두 윤이나와 최태혁 교수의 수술을 보려고 몰려갔지만 나영은 가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환자 차트를 정리했다.
어머니를 통해서 기원도 했고, 황 여사를 직접 찾아가서 말도 전했으니 그녀가 할 건 다 했다.
수술이 끝날 때까지 마음을 비우고 그녀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문 선생님.”
변 간호사가 그녀에게 다가와서 말을 전했다.
“어떤 남자분이 문 선생님 찾아왔는데, 이 명함을 주셨어요.”
나영은 변 간호사가 준 명함을 받았다.
<태영 건설.>
명함에 적힌 회사 이름을 본 순간 그녀는 잠시 숨을 참았다.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었다.
나영은 시계를 보았다.
수술이 이제 막 시작되었을 거다.
최태혁 교수가 황 여사를 구하는 동안 그녀는 이 남자를 해결해야만 했다.
나영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의사 가운의 단추를 잠그고 걸어 나갔다.
그녀가 스테이션으로 나갔을 때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왜냐하면 그만 고개를 높이 들고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기에.
변 간호사가 알려주었다.
저 남자라고.
나영은 뚜벅뚜벅 걸어서 사람이 아니라 건물을 살펴보고 있는 남자한테 다가갔다.
“장수호 씨?”
그녀의 부름에 남자가 고개를 내렸다.
단정하고 신뢰감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은 아주 깊은 우물 같았다.
가볍지 않고 깊었다.
그래서 남자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제가 문나영이에요.”
그녀가 이름을 밝히자 장수호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문성철 전무님 밑에서 일하고 있는 장수호라고 합니다.”
목소리는 차분하고 점잖았다.
분명 그의 성격도 그의 목소리가 주는 이미지와 무척 닮았을 거다.
그러니 아버지의 눈에 들었겠지.
“여기서는 이야기하기 불편하니 나가시죠.”
그녀의 말에 장수호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영은 장수호를 데리고 아예 병원 밖으로 나왔다. 그래야 아는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 테니까.
남호진이 최태혁 교수의 수술을 보러 가서 그나마 소문낼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전화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건 예의가 없는 거 아닌가요?”
그녀가 냉정하게 묻는 말에 장수호는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전화하면 분명 병원 일로 바쁘다고 말할 거라며 전무님이 우선 직접 찾아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쪽은 우리 아버지 말이면 다 듣나 보죠?”
그녀가 비꼬듯이 하는 말에도 장수호는 전혀 표정 변화 없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네, 제가 존경하는 분이십니다.”
장수호와 천생연분은 그녀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저는 만나는 남자가 있어요.”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도 장수호는 전혀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전무님이 절 여기로 보내신 거군요.”
“무슨 뜻이죠?”
장수호는 담담하게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전무님이 이미 문나영 씨가 만나는 남자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겁니다.”
나영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누군가 일부러 아버지에게 두 사람의 관계를 말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의심되었다.
윤이나 교수와 L백화점 이철권 사장의 딸 이주아.
“절 도와주시면 안 돼요?”
이 상황에서 그녀를 도와 줄 사람이 맞선 보러온 남자뿐이라는 게 암담했다.
하지만 이대로 아버지와 최태혁 교수가 만나게 되면 분명 아버지는 그한테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몰아세울 거다. 그게 그녀를 지키는 거라고 생각해서.
최태혁 교수라면 그런 걸 개의치 않는다고 해도 지금은 그녀가 참을 수 없었다.
황 여사님의 병을 고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못 주었는데, 그녀의 아버지까지 그를 괴롭힌다면 너무 최악이었다. 이런 게 무슨 행운의 여신이란 말인가.
그래서 그녀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염치 따위 집어던지고 처음 만난 장수호를 붙잡고 도와달라고 사정하는 것뿐이었다.
“당분간만 아버지한테 저랑 만난다고 거짓말해 주세요.”
안 그래도 황 여사의 병 때문에 힘들어하는 최태혁 교수를 그녀까지 힘들게 만들 수는 없었다.
적어도 황 여사님이 무사히 퇴원할 때까지만이라도. 그때까지만 버티면…….
“알겠습니다.”
장수호가 너무 쉽게 수락하자 나영은 오히려 의심이 들었다.
“왜 이리 쉽게 절 도와주세요?”
들키면 그는 아버지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힐 거다.
그건 그의 앞길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리스크였다.
“전무님이 문나영 씨 유괴 사건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나영은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녀를 도와주는 이유가 그 사건 때문이라는 게.
하지만 지금은 그 사건의 기억 때문에 힘들어할 때가 아니었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럼 부탁하는 김에 하나 더 해도 될까요?”
장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사건 맡았던 경찰 좀 찾아주시겠어요?”
17년 동안이나 아무 말 없다가 갑자기 최태혁 교수가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라고 말하면 아버지가 믿어줄지 미지수였다.
그러니 그 경찰의 도움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