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그녀만이 줄 수 있는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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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그녀만이 줄 수 있는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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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그녀만이 줄 수 있는 도움
2023.04.07.
나영은 손을 뻗어 황 여사가 내민 도시락을 받았다.
“잘 먹을게요. 여사님.”
그녀의 인사에 황 여사는 모든 걸 품어줄 거 같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나영이 도시락을 품에 안자 따뜻함이 심장까지 전해졌다.
“문나영. 네가 어떻게 최 교수님이 모셔 온 분이랑 아는 사이야?”
남호진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그녀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궁금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망설이는 사이 황 여사가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내가 병원에 건강검진 받으러 왔을 때 나영 양이 도와줬어요. 이 도시락은 그 보답이고.”
나영은 놀란 눈으로 황 여사를 쳐다보았다.
“이야. 건강검진에서 뭘 어떻게 도와줬기에 도시락으로 보답까지.”
남호진이 그거참 희한한 일이라는 눈으로 그녀와 도시락을 번갈아 보았다.
황 여사가 나영의 손을 가볍게 쥐며 인사했다.
“그럼 난 가볼게요. 나중에 또 봐요.”
나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시간 나면 병실로 찾아뵐게요.”
황 여사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사한 뒤 다시 최태혁 교수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나영은 떨어진 거리에 있는 최태혁 교수와 눈이 마주치자 웃었다.
그도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서로를 안심시켰다.
“너 저 아줌마가 최 교수님 지인인 거 미리 알고 도와준 거지?”
가벼운 의심으로 그녀를 찔러보는 남호진을 무시하고 나영은 몸을 돌려 걸어갔다.
품에 안은 도시락을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힘이 났다.
왜 최태혁 교수가 그리 먹을 거에 진지했는지 이제야 좀 이해가 되었다.
몸과 마음이 함께 든든해지니, 사람이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건강한 관심이었다.
***
윤이나는 문나영을 만나고 돌아오는 황 여사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최태혁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의 눈은 문나영에게 고정되어 다른 건 아무것도 안 보이는 듯했다.
그 사실이 윤이나는 못내 불쾌했다.
뭐가 이렇게 쉽나.
그녀는 14년이나 원했지만 이룰 수 없었던 것이 왜 문나영은 이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건가 싶었다.
그게 윤이나는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수술실 어시스트 들어오는 거 아직도 생각 안 바뀌었어?”
그녀의 질문에 그제야 태혁은 문나영을 보던 시선을 움직여 다시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건조한 눈빛에 감정은 단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순식간에 변하는 그의 눈빛에 윤이나는 예리한 칼로 깊게 베이는 기분이었다.
“응. 나도 들어갈 거야.”
윤이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만큼 황순덕 씨가 너한테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일 테니까. 나도 최선을 다할게.”
적어도 지금 최태혁한테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는 건 문나영이 아니라 그녀였다.
윤이나는 그 사실에 도취했다.
“같이 수술 잘해 봐.”
윤이나가 내민 손을 태혁이 가만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서 마주 잡았다.
“그래, 잘 부탁해.”
황순덕의 수술이 끝나면 최태혁이 다시 원래대로 쌀쌀맞아질 거라는 걸 뻔히 알지만, 달라진 그의 태도에 윤이나는 흠뻑 빠져들었다.
마치 이브가 사과를 베어 문 그 순간처럼.
***
예약된 1인실에 들어선 황 여사의 첫 마디는 병실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6인실이면 충분한데, 왜 돈 낭비를 해. 어르신 아시면 큰일 나.”
황 여사가 병원까지 와서도 할아버지 눈치를 보자 태혁은 단호히 말했다.
“할아버지는 병원 근처에도 못 오게 할 거니까 걱정 마세요.”
그래도 황 여사는 계속 돈 버려서 어쩌냐는 말을 몇 번이나 하였다.
이래서 세뇌란 무서운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30년이나 돈 아끼라는 말을 끝도 없이 해대니까 황 여사도 자연스럽게 돈 쓰는 일에 소심해졌다.
태혁은 홍식에게 당부했다.
“나는 가서 일해야 하니까, 네가 여사님 잘 챙겨드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알았어요. 저만 믿으세요.”
홍식이 자신 있게 말하고 있을 때 병실 문이 열리며 오승희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밝게 인사하는 오승희를 보고 홍식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동그란 안경에, 갸름한 계란형 얼굴, 크고 또랑또랑한 눈까지.
꼭 순정만화 속 여자 주인공 같았다.
“네가 황 여사님 주치의야?”
태혁이 묻자 승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하고 싶다고 손을 번쩍 들었는데, 윤 교수님이 본 척도 안 하시더라고요.”
그 이유를 태혁도 승희도 잘 알기에 마주 보는 눈빛이 처음으로 통했다.
“이 의사 선생님은 누구?”
황 여사가 궁금해하며 묻자 승희가 알아서 자기소개했다.
“아! 전 나영이 룸메이트예요. 그리고 위장관 외과 레지던트니까 의사 필요하실 때 저 부르세요.”
친절하게 말하는 승희에게 황 여사도 웃는 얼굴로 대하는데, 갑자기 두 사람 사이에 큰 얼굴이 끼어들었다.
“저는 박홍식입니다.”
승희는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태혁이 바로 홍식의 머리를 손으로 밀어내며 승희를 안심시켰다.
“겁먹지 마. 사람이야.”
***
최태혁 교수가 윤이나 교수의 수술에 어시스트로 들어간다는 소식은 병원을 들썩이게 할 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휩쓸었다.
“와! 이거 다시 없을 레전드 수술 아니냐?”
“그래서 난 시간 되면 무조건 가서 직관하려고. 수술실에서 그 투 샷을 볼 일이 또 언제 있겠어.”
“독사가 남의 수술 어시스트를 한다니. 정말 상상이 안 된다.”
“최태혁 교수님 가족이라던데.”
“독사도 자기 가족은 소중한가 보네. 우리한테도 그 백 분의 일만 잘해주면 얼마나 좋아.”
사람들은 모두 시간만 되면 꼭 그 수술을 보러 가겠다고 말했지만, 나영은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녀가 안 봐도 두 사람은 분명 수술을 잘 끝낼 테니까.
Rrrrrrrrrr Rrrrrrrrrr-
전화가 울리자 나영은 핸드폰을 꺼냈다.
<차현 감독.>
발신자를 보고 나영은 눈이 살짝 커졌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여보세요.”
[나 황 여사님 병문안 갈 건데. 부탁할 거 있으면 나한테 해요. 아무래도 나영 씨가 직접 찾아가는 건 병원 사람들 때문에 불편할 테니. 태혁이는 지금 멀쩡히 자기 일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나영 씨까지 못 챙길 거예요.]
역시 차현 감독은 섬세했다.
그의 섬세함에는 언제나 최태혁 교수에 대한 애정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나영은 차현이 먼저 이렇게 신경 써줘도 다른 뜻이 있다고 전혀 의심할 수 없었다.
“오늘 황 여사님이 저한테 도시락 주셨어요.”
[이런. 역시 황 여사님이네요.]
“그리고 절 위해 거짓말도 해주셨어요.”
[네?]
그녀가 난처하지 않게 일부러 거짓말해 준 황 여사에게 나영은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분명 평생 거짓말 안 하고 착하게 사셨을 텐데 그녀 때문에 하게 된 거니까.
그래서 꼭 보답하고 싶어졌다.
“황 여사님 병문안은 저도 꼭 직접 가려고요.”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그럼 황 여사님도 기운이 나실 거예요.]
차현은 용건이 끝나자 바로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리고 제가 감독님한테 부탁드릴 게 하나 있는데요.”
[먼저 전화하지 말라고요? 앞으로 그럴 일 없어요.]
차현 감독의 말에 나영은 짧게 웃었다.
이번엔 그가 틀렸다.
“아뇨. 그게 아니라, 제 친구 일이에요.”
[친구?]
차현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제 룸메이트 기억나세요?”
[아! 그 과자 먹으면서 구경하던.]
마치 동네 아는 애 말하듯이 차현은 승희를 말했다.
그게 차현 감독이 본 승희의 이미지일 테니까 조금 안심되는 부분이 있었다.
걱정되는 건 승희였다.
“제 친구가 감독님한테 전화번호 물으면 절대 가르쳐 주지 마세요.”
그녀의 부탁에 차현은 별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그럴게요.]
그제야 나영도 안심하고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차현은 분명 그녀와의 약속을 지킬 테니까.
***
그녀의 사건 이후 나영의 어머니는 주기적으로 절을 찾아가서 가족의 평안을 비는 108배를 올렸다.
그래서 나영은 어머니한테 전화해서 언제 절에 가는지 물어보았다.
마침 황 여사가 수술하는 날 절에 간다고 하기에 나영은 어머니에게 부탁했다.
“황순덕 씨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라는 기도도 같이 올려줘요.”
[황순덕 씨가 네 환자니?]
“내 환자는 아닌데, 나한테 고마운 분이라서요. 이번에 암 수술받으시거든요.”
[그래, 알았어.]
나영은 용건이 끝나서 그만 전화를 끊으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셨다.
[그런데 어제 네 아빠가 너 병원 생활 잘하고 있는지 물어보더라.]
“내가 독립해서 집에 자주 못 가니까 물어본 거 아니에요?”
나영은 이번 쉬는 날은 꼭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응, 아무래도 너 혼자 밖에서 사니까 네 아빠가 걱정이 많이 되나 봐.]
이제 와서 다시 집에 들어오라고 하면 나영은 그럴 수 없었다.
무조건 버텨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어머니가 말했다.
[자기 부하직원을 너랑 맞선보게 하겠대.]
나영은 입이 떡 벌어졌다.
갑자기 머리 위에 핵폭탄이 떨어진 기분이었다.
“아, 안 돼요. 나 지금 레지던트 1년 차라 얼마나 바쁜데.”
진짜 이유는 최태혁 교수 때문이지만 지금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럼 아버지는 당장 최태혁 교수를 만나려고 할 게 뻔했으니까.
[나도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네 아빠 성격 알잖니.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건 무조건 해야 하는 거.]
그때 이쪽으로 걸어오는 최태혁 교수가 눈에 들어왔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그의 손에는 배달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나영은 최태혁 교수한테서 눈을 떼지 못하며 전화에 대고 말했다.
“엄마. 나 그만 끊을게.”
[그래, 누가 갑자기 너 찾아가도 너무 놀라지 마. 네 아빠가 고른 사람이라면 분명…….]
뚝.
나영은 어머니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가 핸드폰을 내려놓자마자 다가온 최태혁 교수가 한소리 했다.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통화 중이야.”
나영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물었다.
“왜 여기 계세요? 전 당연히 교수님이 황 여사님 병실에 계실 줄 알고.”
최태혁 교수가 그녀의 손을 끌어다가 들고 온 종이가방 끈을 쥐여주었다.
“황 여사님한테 당연히 갈 거고. 너도 내가 꼭 챙겨야지. 저녁 안 먹었지?”
그의 말대로 오늘 그녀가 먹은 건 황 여사님의 도시락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최태혁 교수가 애써 그녀를 챙겨주려고 하는 노력에 감동할 수만도 없었다.
나영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 교수님이 챙겨주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녀의 고민이 쓸데없다는 듯이 최태혁 교수가 말했다.
“너는 지금 당장이라도 날 도와줄 수 있어.”
“어떻게요?”
그녀가 따지듯이 그에게 물었을 때, 다가온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로 포개졌다.
부드럽게 닿았던 입술은 따뜻함만 남기고 멀어졌다.
그리고 최태혁 교수는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고 작은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탄식하듯 말했다.
“이제 힘이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