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어쩔 수 없는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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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어쩔 수 없는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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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어쩔 수 없는 선택
2023.04.03.
나영은 의자에 앉아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니 계속 멍 때리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일어나서 6번 베드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다.
“의사 선생님. 혹시 저 때문에 퇴근 못 한 거예요? 미안해서 어쩌나.”
환자가 도리어 그녀에게 미안해하자 나영은 웃으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제가 오늘 당직이에요. 그러니까 또 몸이 불편하시면 부르세요. 바로 올게요.”
스테이션으로 돌아와서 당직인 김영미가 해야 했을 차트 정리를 하고 있는데 응급실에 갔던 동건과 김영미가 함께 돌아오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나영은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김 선배. 괜찮아요?”
그녀의 물음에 치프 동건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아프다고 난리를 치더니만 정작 검사하니까 아픈 곳이 아무 데도 없다.”
김영미는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하듯이 말했다.
“아까는 진짜 아팠어요. 치프.”
평소에 화를 내는 일이 없는 맹물 같은 성격의 치프가 이번에는 진짜 화가 난 듯이 김영미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아픈 사람들 고치는 의사라는 인간이 꾀병을 부리는 게 말이 돼! 벌로 넌 일주일 동안 당직해!”
“네? 치프! 그건 너무 심하잖아요!”
김영미가 동건의 의사 가운을 붙잡으며 봐달라고 빌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동건이 나영을 돌아보며 친절하게 말했다.
“넌 그만 가봐. 오늘 당직도 영미가 할 거야.”
나영은 멍하니 김영미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동건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녀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문나영?”
김영미는 그녀가 쳐다보는 시선을 피해 화장실에 간다면서 후다닥 뛰어가 버렸다.
동건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설마 진짜 아픈 건 너야?”
나영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저는 그만 퇴근할게요.”
동건은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김영미의 꾀병에 속아서 그녀에게 갑자기 당직을 시킨 건 치프인 그였기에 미안한 마음에 말했다.
“몸 정말 안 좋으면 내일 늦게 출근해도 괜찮아.”
나영은 정말 괜찮다고 말하고 가방을 챙겨서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그녀는 1층이 아니라 연구동이 있는 층수를 눌렀다.
나영이 최태혁 교수한테 전화한 게 1시간 전이니 그는 이미 가버렸을 거다.
그래도 그녀는 최태혁 교수의 방까지 갔다.
똑똑.
노크했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달칵.
방문을 열었더니 불이 꺼진 텅 빈 실내가 보였다.
나영은 터벅터벅 걸어서 어항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어항 속의 노랑이를 보며 나영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네가 있구나.”
마치 그녀의 말에 응답해 주듯이 노랑이가 그녀 쪽으로 헤엄쳐 왔다.
지금이라도 최태혁 교수한테 전화하면 충분히 쫓아갈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나영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최태혁 교수는 황 여사님 때문에 마음이 힘든 상황인데, 그녀까지 수술 집도의인 윤이나 교수와 다투어서 더 심란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분명 윤이나는 그거까지 계산하고 김영미에게 그녀를 1시간만 붙잡아두라고 했을 거 같아서 나영은 억울했다.
“황 여사님 수술 끝날 때까지만 참으면 될 거야. 그렇지? 노랑아.”
황 여사의 수술을 해줄 의사는 그녀가 아니라 윤이나였다.
윤이나가 할 수 있는 걸 그녀는 결코 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지금 나영을 가장 힘들게 하였다.
***
홍식은 태혁이 같이 온 사람을 보고 놀라서 눈이 커졌다.
태혁이 오늘 누군가와 함께 온다면 그건 당연히 문나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태혁은 다른 사람과 함께 왔다.
“나영 씨는 어쩌고 이런 사람이랑 같이 와요?”
홍식이 태혁을 타박하자 그는 찌푸린 얼굴로 그냥 지나쳐 걸어갔다.
그 뒤를 따라 걸어가며 차현이 가볍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본다. 홍식아.”
홍식은 똑같이 반갑게 인사할 수 없었다.
“분명 형님이 당신이랑 절교할 거랬는데.”
“그 말을 아직도 믿니.”
차현이 그리 말하며 홍식의 머리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리자 홍식은 질색하며 뒤로 피했다.
별채 앞에서 태혁이 멈추어 서자 차현은 그 옆에 나란히 섰다.
“어차피 그 여교수한테 수술 맡길 거였으면 오늘 같이 오는 게 나보다 더 도움이 되긴 했을 거야.”
차 타고 오는 길에 대략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차현은 건조하게 말했다.
태혁이 당장 와 달라고 해서 오긴 왔지만, 그는 암이란 병에 대해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황 여사를 안심시킬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수술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그가 수술 실력을 잘 아는 의사여야만 했다. 가장 좋은 선택은 황 여사를 데리고 미국 클리블랜드 클리닉으로 날아가는 거였지만, 황 여사가 그걸 수락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한강대학교 병원 의사 중 골라야 했다.
수술 실력은 가장 노련하지만, 그에게 원한이 있는 의사와 수술 실력은 믿을 만하지만, 그 인성은 믿을 수 없는 의사.
둘 중 태혁은 후자를 선택했다.
“다른 건 필요 없어.”
차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일만 해도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당장 해야 할 일은 황 여사를 한강대학교 병원으로 데려가는 거였기에 차현도 말을 아끼게 되었다.
“그래, 우선 황 여사님부터 만나보자.”
두 사람은 함께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황 여사는 함께 온 두 사람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병원 이야기를 꺼내자 바로 낯빛이 어두워졌다.
“여사님은 제 실력 못 믿으셔서 다른 병원 가신 거예요?”
태혁의 물음에 황 여사는 크게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내가 간이 아팠으면 당연히 너한테 갔지. 그런데 위라잖아. 그래서 너 바쁜 거 뻔히 아니까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그래도 태혁이가 의사인데 이렇게 크게 아픈 걸 숨기신 건 여사님이 너무하셨어요. 가족 같은 사람들조차 아플 때 태혁이를 의지하지 않으면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의사가 된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차현의 말에 황 여사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내일 저랑 같이 한강대학교 병원에 가서 입원하세요. 여사님 수술할 때는 저도 같이 들어갈 거예요.”
태혁이 수술실에 들어온다는 말에 황 여사는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위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태혁한테 수술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아예 포기하고 다른 병원으로 간 거였다.
차라리 모르게 하면 그녀만 고생하고 끝날 거라 여겼으니까.
혼자만 끌어안고 있었을 때는 암이라는 병이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졌는데, 태혁이 수술에 들어온다는 말을 들으니 심장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두려움을 이제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여사님. 태혁이도 있고, 저도 있으니 걱정 마세요.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차현이 황 여사의 손을 쥐며 다정하게 말해주자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밖에서 듣고 있던 홍식은 왜 자기는 빼냐며 혼자 분개했다.
***
별채를 나와서 차현이 태혁에게 물었다.
“넌 내일 황 여사님이랑 같이 병원 갈 거니까 오늘은 여기서 잘 거지?”
태혁은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오늘 밤 지나기 전에 문나영한테도 전화해서 알려줘.”
차현이 충고하는 말에 태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젠 네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하거든.”
예전과 달라진 태혁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차현은 짧게 웃었다.
“과연 그게 언제까지 갈지 두고 보자.”
마지막에 그를 비웃고 가는 차현의 뒤통수에 대고 태혁은 분노의 삿대질을 했다.
차현이 떠나고 태혁은 정원에 서서 핸드폰을 꺼냈다.
막 나영에게 전화를 하려는데, 걸걸한 목소리가 그의 뒤통수를 후려치듯이 들려왔다.
“허락 없이 내 땅 밟고 서 있을 거면 돈을 내라고 했지.”
태혁은 인상을 쓰며 핸드폰을 아래로 내렸다.
고개를 돌려 정문 쪽을 보니 1980년에 산 거 같은 옷을 차려입은 할아버지가 뒷짐을 지고 걸어오고 있었다.
“다 할아버지 탓이에요!”
태혁도 지지 않고 버럭 성을 냈다.
아무래도 황 여사가 암에 걸린 건 30년이나 구박한 할아버지 탓이 제일 큰 듯했으니까.
***
아침에 일어나서야 나영은 늦은 밤에 왔던 최태혁 교수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내일 황 여사님 모시고 병원으로 갈 거야. 어제는 차현이 도와줬으니까 안심해.>
윤이나 교수와 함께 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차현을 불렀다는 태혁의 메시지를 나영은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았다.
어쩌면 최태혁 교수는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어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다 알고 있는 거 같아서 나영은 마음이 쓰렸다.
차라리 황 여사님 수술 끝날 때까지는 그녀가 그의 앞에 안 나타나는 게 더 나을 것도 같았다.
그럼 윤이나도 일부러 그녀를 건들지 않을 테니까.
나영은 평소와 똑같이 출근해서 병동을 돌고 회진 준비를 했다.
“오늘 최태혁 교수님은 개인 사정으로 회진에 참석 못 합니다.”
아침 회진 시간에 치프가 알린 말에 다른 사람들은 술렁였지만, 나영은 가만히 있었다.
그가 황 여사님과 함께 오느라 회진에 참석하지 못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차라리 며칠 푹 쉬면 좋겠네. 독사 얼굴 안 보고 좀 살게.”
최태혁 교수가 안 와서 좋아하는 남호진의 뒤통수를 흘겨보았다.
아침 회진은 최태혁 교수가 없어서 평소보다 일찍 끝이 났다.
“어? 저기 최태혁 교수님 아냐?”
그런데 회진에 빠진 최태혁 교수님을 제일 먼저 발견한 건 그가 며칠 동안 사라지길 바란 남호진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남호진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그의 말대로 사복 차림의 최태혁 교수가 나이 많은 부인과 몸집이 큰 남자와 함께 서 있었고, 세 사람의 앞에는 윤이나 교수가 있었다.
“저게 도대체 무슨 그림이야?”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고, 나영은 함께 있는 최태혁 교수와 윤이나를 보고 눈빛이 가라앉았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이 따라가지 못했다.
지금 최태혁 교수와 윤이나는 황 여사님을 살리기 위해 같이 있는 거였다.
그녀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
나영은 고개를 돌렸다.
그때 홍식이 그녀를 발견하고 황 여사의 어깨를 손으로 두드렸다.
황 여사가 고개를 돌리자 홍식이 손으로 나영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황 여사는 마중 나온 윤이나에게 말했다.
“그럼 윤 선생님 나중에 봐요. 제가 지금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어서.”
황 여사가 갑자기 자리를 뜨자 태혁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태혁은 홍식을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홍식이 씨익 웃기만 하자 태혁은 손을 들어 올리다가 황 여사가 걸어가는 방향에 나영이 있는 걸 발견하고 멈칫했다.
간담췌 외과 레지던트들은 최 교수와 함께 있던 부인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걸 보고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영 양.”
그녀의 이름이 불리자 등을 돌리고 걸어가던 나영은 멈칫하며 멈추어 섰다.
고개를 돌리니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황 여사가 보였다.
황 여사의 손에는 익숙한 도시락 가방이 들려 있었다.
“오늘 병원 오게 되어서 도시락 쌌어요.”
황 여사가 내미는 도시락을 나영은 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설마 오늘 이 도시락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맛있게 먹어요.”
사실 진짜 위로가 필요한 건 아픈 황 여사였다.
그런데 황 여사가 도시락으로 그녀를 위로해준 것만 같아서 나영은 눈가가 촉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