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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네가 이긴 거야 (52/84)


52화. 네가 이긴 거야
2023.03.31.



 
윤이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태혁한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먼저 그녀를 찾아온 용건은 또 문나영 일로 그녀를 탓하려는 게 뻔할 텐데도, 그래도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녀의 심장은 점점 빨리 뛰었다.

최태혁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지금껏 그녀의 심장은 이 남자 앞에서만 뛰었다.

윤이나는 자신이 이러는 게 태혁한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황순덕 씨. 이번에 우리 병원에서 건강검진 받았었어.”

태혁이 환자에 대해 말하자 윤이나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문나영 때문에 찾아온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그 사실이 윤이나는 은근히 기뻤다.


“아는 사람이야?”

태혁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출렁였다.


“내시경에서 이상소견 나와서 재검받으라고 통보했을 텐데 우리 병원으로 다시 안 왔어. 다른 병원으로 가서 검사받고 위암 2기 판정받았어.”

태혁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황순덕의 상태에 대해 읊었다.

그리고 바로 그가 먼저 윤이나를 찾아온 목적을 말했다.


“네가 수술해줬으면 좋겠어.”

최태혁이 먼저 그녀에게 수술을 부탁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건 그 사람이 최태혁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윤이나는 황순덕의 기록을 보았다.

나이는 만으로 58세.

설마 어머니인가?

그렇다면 윤이나는 당연히 이 환자를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왜 김태식 교수님이 아니라 나한테 수술 부탁하는 거야?”

김태식 교수는 윤이나의 스승이었고, 위암 수술의 권위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개인적인 이유로 최태혁이 꺼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수술을 부탁하려면 김태식 교수가 더 적합한 의사였다.


“김태식 교수한테 의료 과실 인정하라고 압박했던 게 나야.”

김태식 교수는 의사 생활하면서 한 번 의료 사고 소송에 휘말렸었는데, 김태식 교수가 스스로 자신의 실수를 사람들 앞에서 인정했었다.

의료 사고는 증명해내는 게 쉽지 않기에 의사가 먼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껏 그게 김태식 교수의 정직한 인성인 줄 알았건만 태혁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했다는 걸 알게 된 윤이나는 좀 허탈해졌다.


“김 교수님은 수술로 보복할 사람이 아냐.”

“그래도 사람이니 내 얼굴 보면 그때 일이 떠오르겠지.”

황 여사의 수술에 그도 반드시 들어가야 했다.

그러니 김태식 교수는 적당하지 않았다.

김태식이 유능한 의사일지는 몰라도 수술실에서 그의 얼굴을 보면서도 끝까지 차분할 정도로 대인배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도 수술에 들어가서 어시스트할 거야.”

태혁이 수술 어시스트한다는 말에 윤이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심이야?”

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수술 집도를 할 수 없으면 어시스트라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의사가 된 의미가 전혀 없었다.

***



“이거 정말 나 주려고 산 거 맞아?”

휘핑 올라간 캐러멜마키아토만 먹는 승희는 나영이 준 아메리카노를 간장 보듯이 쳐다보며 나영에게 물었다.

나영은 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봐도 무슨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나영이 커피 사 줄 사람은 아주 극소수였기에 승희는 바로 유추할 수 있었다.


“최 교수님이 그새 또 널 속상하게 했어?”

이주아 일이 해결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건만, 또 나영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아주 상습범이었다.

승희가 봤을 때 그냥 헤어지는 게 더 나을 거 같았다.


“교수님이 윤이나 교수 방으로 들어가는 걸 봤어.”

“그럼 환자 때문이겠지.”

“하지만 지금 우리 과에 너희 과랑 협진할 환자는 없는데. 그리고 진짜 그런 거라도 컨퍼런스 시간에 언급해야지. 직접 찾아가는 게 아니라.”

이젠 나영이 좀 예민해 보여서 승희는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네가 너무 윤이나 교수를 신경 쓰는 거 아냐?”

둘이 밀회하는 걸 본 것도 아니고, 최태혁 교수가 윤이나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본 거뿐이었다.

승희가 보기에는 환자 때문일 가능성이 거의 100%였다.

나영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인정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그게 쉽지 않아.”

“왜? 넌 레지던트인데 윤이나 교수님은 교수라서?”

병원 내에서의 서열만 보면 나영은 결코 윤이나를 쫓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윤이나가 나영보다 일찍 태어나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난 윤이나 교수의 집착이 무서워.”

최태혁 교수가 아무리 무심하고 모질게 굴어도 14년 동안이나 그에게 집착하는 마음을 나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짝사랑까지 네가 하지 말라고 할 권리는 없잖아.”

승희가 윤이나의 입장에서 말하자 나영은 서운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승희는 그런 나영이 신경 쓰여서 바로 그녀를 위로했다.


“하여튼 마지막에 최태혁 교수님을 차지한 건 너잖아. 그러니까 네가 이긴 거야.”

그런데 나영은 지금 전혀 승자처럼 당당하지 못했다.


“왜 윤이나 교수 찾아갔는지 교수님한테 직접 물어봐도 될까?”

그녀가 그를 의심하는 거 같아서 오히려 마음 상하게 하는 건 아닐까.


“그런 건 나보다 차현 감독한테 묻는 게 낫잖아. 어서 전화해 봐.”

승희가 전화하라고 독촉하며 그녀의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나영은 바로 핸드폰을 들고 그 자리를 떴다.


“뭐야! 숨어서 전화하려는 거야? 내가 차현 감독 전화번호 훔쳐볼까 봐?”

사실 그럴 의도가 다분히 있었지만, 승희는 나영에게 서운했다.

그깟 전화번호 하나에 진짜 이렇게까지 한다고.

***

나영은 차현 감독한테 전화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럴 기분조차 안 들었다.

터벅터벅.

힘없이 병동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응급콜인가 싶어 전화를 확인한 나영은 최태혁 교수의 이름이 보이자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나 오늘 황 여사님 만나러 가야 하는데 너도 같이 갈 수 있어?]

황 여사님이라는 말에 나영은 눈이 커졌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네가 말하는 거 더 나을 거 같아서.]

설마 하는 마음에 나영은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혹시 황 여사님이 아프세요?”

최태혁 교수의 대답 대신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무언가를 참는 듯이 잔뜩 억눌린.

그리고 뒤늦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암이야.]

나영은 심장이 돌처럼 굳어지는 듯 잠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이 없는 2기라서 수술만 하면 괜찮아질 거야.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분명 그녀보다 더 힘들 그가 오히려 그녀를 안심시키자 나영은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녀는 그것도 모르고 그가 윤이나를 찾아간 걸 속상해하며 유치하게 굴었다.

그런 자신이 너무 창피하고 그한테 미안했다.


[우리 걱정 안 시키려고 황 여사님이 아무 말 안 하고 다른 병원에서 검사받고 수술 예약 잡았어. 그래서 오늘 가서 우리 병원에서 수술받게 설득해야 해.]

최태혁 교수는 자신이 감정적으로 굴까 봐 그녀를 데려가려는 거 같았다.

나영은 그를 안심시켰다.


“제가 황 여사님한테 잘 말씀드릴게요.”

[응. 부탁할게. 우리 집 사람들은 아무 도움이 안 돼.]

이렇게 가라앉은 최태혁 교수의 목소리는 처음 들었기에 나영은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

그와 황 여사가 함께 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두 사람은 피를 나눈 모자보다도 더 가족 같았었다.

그리고 최태혁이란 사람은 타인에게는 독사라는 말로 불릴 정도로 괴팍할 수 있어도, 곁을 내준 사람에게는 그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가 지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겠나.

너무 슬퍼서 결국 자기 탓을 하게 될 거다.

황 여사님이 암에 걸린 건 의사인 그가 미리 알지 못해서라고.

그녀의 가족이 이리된 건 그녀가 똑똑하지 못해 납치당했기 때문이라고 나영이 스스로 자책했듯이.

***

그날 나영은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 퇴근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기에 평소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입원한 환자들한테 문제만 없으면 최태혁 교수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다행히 당장 위급한 환자는 오늘 없었다.

그리고 간담췌 외과에 위급한 환자가 생기면 태혁도 퇴근하지 못할 테니 그때는 아무도 황 여사를 만나러 못 가는 거였다.

그러니 제발 오늘만은 병동에도 응급실에도 위급한 환자가 안 생기길 바랄 뿐이었다.

만약 황 여사를 설득하는 게 하루가 더 늦어지면 최태혁 교수는 더욱더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갈 테니까.

그녀의 기도가 통했는지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응급콜은 울리지 않았다.

나영이 퇴근하려고 할 때 6번 베드 환자가 복통을 호소해서 달려가긴 했지만, 다행히 금방 해결되었다.

나이트근무 간호사에게 6번 베드 환자를 잘 봐 달라고 부탁한 뒤 그녀가 막 병동을 떠나려고 할 때.


“아악!”

오늘 당직인 김영미가 갑자기 두 손으로 배를 움켜잡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나영이 깜짝 놀라서 쳐다보는 동안 동건이 빠르게 김영미에게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치프 동건이 나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난 영미 응급실에 데려갈 테니까. 넌 우선 영미 대신 당직하고 있어 줘.”

“안 되는데.”

그녀의 입에서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영미를 부축하던 동건이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뭐?”

나영은 당황한 눈으로 동건과 아픈 영미를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결국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픈 사람한테 꾹 참고 당직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네, 제가 병동에 있을게요. 치프는 김 선배 어서 응급실로 데리고 가세요.”

동건이 영미를 부축해서 떠나고 나영은 핸드폰을 꺼냈다.

최태혁 교수한테 전화를 거는데 마음이 울컥했다.

별일도 아니건만.

***



[김 선배가 아파서 제가 대신 당직해야 할 거 같아요. 죄송해요. 오늘 같이 못 가서.]

나영의 전화를 받은 태혁은 미간에 실금이 그어졌다.

그래도 목소리는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괜찮아. 나 혼자 가도 돼.”

[그럼 황 여사님한테 잘 말씀드리세요.]

“그래. 끊을게.”

태혁은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아래로 툭 떨어뜨리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사실 오늘은 혼자 황 여사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황 여사 앞에서 그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었다.

그래서 나영에게 옆에 있어 달라고 한 거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태혁은 바로 표정을 갈무리하고 사무적으로 말했다.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사복 차림의 윤이나가 들어왔다.


“황순덕 씨 내일 입원하는 거 환자랑 이야기 다 된 거야?”

태혁은 핸드폰을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지금 이야기하러 갈 거야.”

“너 그런 이야기 잘 못 하잖아. 내가 도와줄까?”

태혁은 말없이 윤이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그런 태혁을 쳐다보며 윤이나는 나긋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내 도움받으려고 수술 부탁한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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