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러빙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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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러빙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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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러빙유
2023.03.27.
그녀는 분명 핸드폰을 새로 사러 온 것일 뿐인데, 정신을 차려 보니 노래방에 있었다.
병원 회식도 아닌데, 그녀의 발로 노래방에 올 일이 있을 줄이야.
홍식은 마이크를 잡고 마치 무대 위의 가수처럼 열창했다.
태혁이 그녀의 귀에 대고 알려주었다.
“홍식이 꿈이 가수였어. 그래서 사람 만나면 무조건 노래방으로 와.”
그러고 보니 잘 부르긴 잘 불렀다.
“그런데 왜 가수가 못 됐어요?”
“살을 못 빼서.”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듯이 태혁은 절레절레 고개까지 저었다.
나영은 잠시 살과 가수의 상관관계를 생각하다가 포기했다.
간주 부분에 홍식이 돌아서서 감격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 형님이 짝을 만난 모습을 드디어 보니 감개무량합니다.”
사, 살아 있는 동안?
그건 표현이 너무 심한 거 같아서 나영은 표정이 굳었다.
“이 노래는 두 사람의 행복한 앞날을 위해 받칩니다.”
그리고 홍식은 다시 노래방 화면을 보며 고음을 시원하게 질렀다.
그냥 자기가 노래 부르고 싶어서 하는 거 같았다.
나영은 태혁에게 다가가 물었다.
“차현 감독님은 안 부르세요?”
그가 와야 이 요란한 분위기가 좀 진정이 될 거 같았다.
그런데 최태혁 교수가 그녀를 흘겨보았다.
“왜? 홍식이로는 부족해?”
나영은 바로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홍식은 이렇게 거리낌 없이 만나게 하면서, 차현은 은근히 차단하다니.
도대체 누가 더 기분 나빠할 일인가 싶었다.
내리 다섯 곡을 열창한 홍식이는 그제야 마이크를 태혁에게 양보했다.
“형님도 한 곡 부르시죠.”
태혁은 마이크를 거부했다.
“됐어. 난 태어나서 노래는 단 한 번도 한 적 없어.”
“하지만 오늘은 나영 씨도 같이 왔잖아요.”
홍식이 나영을 거론하며 어서 노래하라고 부추기자 태혁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노래하는 거 듣고 싶어?”
나영은 당연히 그런 거 하려고 노래방에 그녀를 데려온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방금 그의 입으로 말했다.
단 한 번도 노래한 적이 없다고.
하긴. 천상천하 유아독존 최태혁을 누가 감히 노래시킬 수 있겠나.
그가 하고 싶어야 하는 거지.
“제가 듣고 싶다면 하실 거예요?”
어쩐지 노래 엄청 못 할 거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나영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사람이 뭐든 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정말 노래를 못 해도 나영은 전혀 실망하지 않을 거다.
오히려 그런 서툰 모습에 더 정이 갈 거 같았다.
태혁이 대답 대신 손을 까닥이자 홍식은 바로 그의 손에 마이크를 올려주었다.
“뭐로 부르실 겁니까? 형님.”
“네가 불렀던 거 아무나.”
그가 노래는 부른 적 없지만 홍식이 따라 노래방은 자주 왔었다.
미국에서 한국 돌아오고 홍식이와 가장 처음 간 곳도 노래방이었다.
노래방 죽돌이 홍식이는 바로 노래방 기계에 번호를 입력했다.
화면에는 발랄한 걸그룹의 뮤직비디오가 재생되며 제목에 ‘러빙유’라고 떴다.
나영이 놀란 표정을 짓자, 태혁도 그제야 고개를 돌려 화면을 보고 바로 홍식에게 화냈다.
“야! 지금 나보고 걸그룹 노래를 부르라고! 당장 바꿔!”
홍식이 그의 말을 거역하며 하트를 날리자 태혁은 홍식을 향해 손에 잡히는 탬버린을 던졌다.
몸집이 큰 홍식은 그걸 가볍게 피하며 계속 하트를 날렸다.
홍식이 물건을 피하자 이번엔 태혁이 직접 움직여 홍식을 잡으려고 했다.
두 사람이 우당탕거리는 동안에도 노래 간주는 계속되고 있었다.
“형님! 노래 시작합니다. 지금이에요!”
노래가 시작되는 순간 어느새 두 사람은 등을 맞대고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홍식은 율동까지 하며 계속 태혁에게 같이 하라고 강요했다.
태혁은 할 수 없이 하트만 같이 날렸다.
“러빙 유우우우, 러빙 유우우우우.”
나영은 그 모습이 너무 어이없고 웃겨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계속 웃었다.
호랑이의 손에 떠밀려 병실로 굴러들어오던 곰돌이의 모습이 다시 생각나며 눈가에 눈물도 고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두 사람은 그녀를 웃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
핸드폰을 사고 노래방까지 들렀더니, 집에 도착한 시간은 벌써 자정이었다.
“교수님도 빨리 들어가세요.”
집이 근처이기는 했지만 일찍 일어나야 했기에 나영은 태혁에게 그만 가보라고 등 떠밀었다.
하지만 태혁은 오히려 그녀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앞으로 너도 필요한 거 있으면 그냥 홍식이한테 말해. 알아서 해줄 거야.”
“제가 어떻게 그래요.”
홍식은 최태혁 교수의 지인이었다. 그녀의 지인이 아니라.
“너 차현한테는 그러잖아.”
그가 또 차현에 대한 질투심을 드러내자 나영은 진심으로 말했다.
“만약 저 때문에 교수님이랑 차 감독님 사이가 멀어지면, 전 진짜 교수님 못 만날 거 같아요.”
차현은 최태혁 교수 인생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분명 그녀보다 더.
그러니 그런 친구를 잃는 건 그녀가 태혁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해악이었다.
그녀의 걱정에 태혁은 오히려 웃었다.
“이런 일로 멀어질 사이 아냐.”
나영이 차현을 더 의지하는 거 같을 때 질투가 나지만, 그 정도로 20년 우정이 깨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유치하게 화를 내는 정도지.
“그럼 다음에는 차현 감독님이랑 셋이 만날까요?”
“싫어.”
바로 그가 정색하며 싫다고 하자 나영은 단호하게 주장했다.
“그럼 두 사람이라도 만나서 식사해요. 그러실 거죠?”
태혁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인증 사진 찍어서 보내주세요.”
뭘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태혁은 못마땅했지만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럼 저 들어가 볼게요.”
그녀가 집으로 들어가야 그도 떠날 거 같아서 나영은 먼저 몸을 돌렸다.
그런데 태혁이 잡고 있던 손을 풀지 않고 잡아당기는 바람에 몸이 크게 회전하며 그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몸을 완전히 감싸는 커다란 몸에 나영은 두려움이 아니라 보호받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너무 모자란 거 같아.”
그가 아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영은 그녀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대답 대신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태혁의 손이 그녀의 등을 힘주어 감싸 안자 그녀는 더욱더 그의 품에 갇혔다.
이 작고 향기로운 존재를 이대로 놓아주기가 쉽지 않았다.
어차피 내일 다시 병원에서 볼 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교수님.”
그녀의 여린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빨리 들어가야 한다는 말일 거라 태혁은 못 들은 척하고 싶었다.
“오늘 교수님 덕에 행복했어요.”
뜻밖의 말을 듣고 태혁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행복하다는 그 말.
누구도 그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고, 누구한테도 그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전혀 그의 것이 아닌 줄 알았던 말이었다. 나영이 그에게 해주기 전까지는.
“정말?”
나영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며 속삭였다.
“교수님이랑 함께 있으면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잔잔한 바다에 뜨거운 해가 떠오르듯이 그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굉장한 말이네.”
그가 이 세상에 왜 굳이 태어난 건가 어릴 때는 항상 의문이었는데, 그녀를 구해서 존재의 이유를 찾았다.
그리고 그녀가 행복하다고 말해주어서 존재의 가치를 느꼈다.
그래서 더 그녀를 놓아주기가 싫어졌다.
“도저히 안 되겠어. 그냥 널 우리 집에 데려가도 될까?”
길고양이를 집에 데려가듯이 그녀를 데려가겠다는 말에 나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된다고.
***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태혁은 행복했다.
평소에 의미 없이 그냥 지나쳤던 거리의 가로등 불빛조차 아주 예뻤다.
기분이 아주 좋았기에 나영의 말대로 차현과 식사 약속을 잡기 위해서 먼저 전화했다.
[생각보다 빨리 전화했네. 한 1년은 나 안 볼 줄 알았는데.]
사실 나영이 강요하지 않았으면 꽤 오래 차현과 연락을 끊었을 거다.
“너랑 밥 먹고 인증샷 보내래. 언제 먹을래?”
주어가 빠졌지만 그런 일을 시킨 게 누군지 차현도 바로 알아들었다.
[그럼 내가 평일에 병원 쪽으로 갈게.]
“알았어.”
뚝.
태혁은 정말 용건만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나영에게 메시지를 적었다.
<어항 청소 좀 해.>
강원도 바다에 가던 날 나영의 집에 들렀을 때 어항 속에 선물을 숨겨놓았었다.
어항 청소하면 자연스럽게 발견할 줄 알았건만, 감감무소식인 거 보니까 아직까지 한 번도 어항 청소를 안 했나 보다.
이건 까망이를 위해서도 안 좋았다.
아무리 바빠도 살아 있는 생명체를 소홀히 대하면 안 되었다.
나영이 안 하면 그가 해준다는 핑계로 그 집에 드나들어야겠다.
메시지를 보내고 핸드폰을 내려놓는데 전화가 왔다.
홍식의 전화였다.
태혁은 짧게 짜증을 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형님이 황 여사님한테 무슨 일 있으면 무조건 바로 전화하라고 했잖아요.]
황 여사의 일이라는 말에 태혁은 빠르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게 오늘 황 여사님이 고향 가신다면서 열흘이나 휴가를 달라고 했대요.]
30년 동안 그렇게 오래 그 집을 떠난 적이 없는 황 여사였다.
황 여사한테 그곳이 집이었고, 그들이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진짜 친척과는 왕래가 거의 없었다.
태혁은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어서 홍식한테 지시했다.
“내일 황 여사님 없을 때 황 여사님 방 좀 살펴봐.”
[네? 나보고 황 여사님 방을 뒤지라고요?]
홍식은 화들짝 놀라며 어떻게 그런 짓을 하냐며 꺼렸다.
“황 여사님이 갑자기 열흘이나 집을 비우는 이유가 분명 있을 거야. 그거 찾아내라고.”
[헉! 설마 황 여사님이 나쁜 사람들 꼬임에 넘어간 걸까요?]
태혁은 홍식에게 몇 번이나 당부했다.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찾아내면 사진으로 찍어서 그한테 보내라고.
***
나영은 어항 청소하라는 태혁의 메시지를 아침에 확인했지만, 병원에 출근해야 해서 못 했다.
그리고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영은 어항 청소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점심시간에 일부러 최태혁 교수의 연구실로 찾아갔다.
사실은 잠깐이라도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였고, 어항 청소 배우는 건 핑계였다.
그녀는 최태혁 교수와 함께 마실 커피도 사서 연구동으로 향했다.
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릴 때 걸어가는 최태혁 교수를 본 나영은 반가움에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그의 뒤를 쫓아갔다.
최태혁 교수는 자신의 연구실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최…….”
막 그를 부르려던 나영은 멈칫하며 멈추어 섰다.
최태혁 교수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윤이나의 방이었다.
똑똑.
그는 노크한 뒤 바로 문을 열고 윤이나의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영은 멍하니 그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