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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겁나? (50/84)


50화. 겁나?
2023.03.24.



 
고작 몇 달밖에 안 지났는데 마치 꿈속의 일인 듯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날 밤의 일을 나영은 내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절대 저지르지 않았을 행동이었기에.

그런데 그는 그저 뒷모습이 닮은 사람이 아니라 정말 그 사람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그를 모르는 사람인 듯 지나칠 수 있었겠는가.

태혁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를 꾹 누르고 뜨거운 열기를 전했다.

나영은 턱을 들어 올리며 온몸을 떨었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안으로 손을 찔러넣자 태혁이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마주친 눈빛에는 서로에 대한 갈망만이 타올랐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만나려고 할 때.

똑똑.


“저기. 두 사람 괜찮은 거 맞죠?”

문밖에서 들린 노크와 승희의 목소리를 듣고 나영은 감겼던 눈이 번쩍 떠졌다.

태혁은 본능적으로 손에 잡히는 대로 베개를 문으로 집어 던졌다.

탁.

그제야 문밖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승희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나영은 그한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만 가세요.”

태혁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오승희가 훼방 놓은 게 이번이 벌써 두 번째였다.

이제 보니 그의 가장 큰 천적이 오승희였나 보다.

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나영은 그한테서 벗어나 문으로 달려가 벌컥 문을 열었다.

밖에 있던 승희가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나영은 일부러 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교수님 이제 가신대.”

승희는 나영의 뒤로 걸어오는 최태혁 교수의 얼굴을 보고 숨을 참았다.

좋지 않았다.

이 오싹한 느낌 전에도 분명 느낀 적이 있었다.

승희는 최태혁 교수한테 잡혀서 또 타이 고문을 당하기 전에 서둘러 그녀의 방으로 피신했다.

태혁은 문 앞에서 나영을 마주했다.


“그럼 난 진짜 갈게.”

지금은 그가 계속 이 집에 남아 있는 게 더 난감했기에, 태혁이 먼저 간다고 말해서 다행이었다.

승희가 문을 두드리지 않았으면 그녀는 이 집에 승희가 있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을 거다.

어떻게 오늘은 술도 한 모금 안 마셨는데, 그때와 똑같이 흘러간 건가 싶었다.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푹 자.”

나영은 부끄러움 때문에 그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린 채 말했다.


“네, 내일 병원에서 봬요.”

아까와는 달리 그와 눈도 못 마주치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태혁은 몸을 돌려 현관으로 걸어갔다.

오늘 온 건 그럴 목적이 아니었으니, 더 욕심내봤자 그만 나쁜 놈 되는 거였다.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태혁은 그 생각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그 집을 나왔다.

***

안하무인으로 갑질하던 VIP 병실 이철권의 딸이 최태혁 교수 앞에서 조신한 여자로 바뀌는 건 이제 병원 사람 누구나 알게 된 사실이었다.

독사의 독이 성격 개조에 특효약이라는 웃지 못할 농담도 떠돌았다.

하지만 나영은 이제 신경 쓰지 않았다.

설령 이주아가 진심으로 최태혁 교수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해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일 뿐이니까.

그런데 그 마음조차 이철권의 퇴원보다 더 빨리 끝날 거라고는 나영조차 생각 못 한 일이었다.

이번에도 남호진이 요란스럽게 달려와서 모두에게 알려주었다.


“지금 이철권 딸이 독사를 붙잡고 로맨스 드라마를 찍고 있다!”

처음보다 더 극적으로 변한 스토리를 듣고 어찌 구경하러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독사의 경고도 잊고 또 우르르 몰려갔다.

안타깝게도 그때 나영은 응급실에 있어서 그때 일어난 일은 나중에 전해 들은 것이었다.

이주아는 사람들 다 보는 병원 복도에서 최태혁 교수를 붙잡고 자신을 붙잡아 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는 정말 진심인 듯 느껴졌다.


“나는 당신이 날 받아주기만 한다면 한일 그룹 사장 아들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요.”

남호진이 평소처럼 오바한 줄 알았더니 정말 이주아는 병원 한복판에서 로맨스 드라마 대사를 읊어대고 있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저 말을 TV가 아니라 현실에서 직접 들었다는 것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최태혁 교수는 팔짱을 끼고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월급쟁이 의사랑 재벌 후계자를 비교하면 누구라도 당연히 후자를 선택하겠죠. 난 다 이해합니다.”

붙잡지 않을 테니까 제발 그 재벌 후계자한테 가라는 뜻이 명확했다.

하지만 이주아한테는 그 말이 그녀를 위해 보내준다는 뜻으로 들렸는지,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전 정말 당신 좋아했어요. 제 마음 알죠?”

누가 들으면 아주 진하게 사랑이라도 한 사이인 줄 알겠다.

최태혁 교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봐도 돼요?”

태혁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지 참아줄 수는 없었다.


“여긴 병원입니다.”

그의 거절에 이주아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뛰어갔다.

그녀가 한일 그룹 사장 아들과의 맞선을 선택할 건 뻔한 일이었기에 태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병원에는 그가 재벌 후계자 때문에 이주아한테 까였다는 소문이 돌겠지만, 이 정도로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태혁은 홀가분했지만 또 그렇지 않기도 했다.

윤이나도 이렇게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만약 윤이나가 나영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게 나영의 과거를 알고 그런 거라면 태혁은 죽어도 윤이나를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

승희는 나영이 이주아 때문에 힘들었던 걸 알기에 이주아에 대한 소식을 알려주려고 일부러 나영을 찾아갔다.


“한일 그룹 사장 아들이랑 맞선 본대. 역시 진심으로 최태혁 교수님 좋아한 게 아닌 거야.”

그 소식을 듣고 좋아할 줄 알았던 나영이 묵묵히 커피만 마시자 승희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직도 불안해?”

“그게 아니라 너무 공교로워서.”

“응? 뭐가?”

“이철권 사장은 지금 암 수술을 받아서 병원에 입원해 있어. 이 일로 백화점 주식이 떨어지면 떨어졌지 오르지는 않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그런 대단한 맞선 자리가 생긴다고?”

한일 그룹은 L백화점과 비교하면 훨씬 큰 회사였다.

그러니까 이주아도 한일 그룹 사장 아들과의 맞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거다.

다신 오지 않을 기회였으니까.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

승희는 나영의 말에 동조하며 빨대로 과일주스를 쭉 들이켰다.


“그래도 너한테는 좋은 일이잖아. 안 그래?”

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주아가 다른 남자와 맞선을 보면서 최태혁 교수한테 계속 관심을 보일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참! 나 차현 감독 전화번호 좀 알려줘.”

승희가 갑자기 차현 감독의 연락처를 묻자 나영은 복잡한 생각을 접고 미간을 좁히며 승희를 쳐다보았다.


“왜?”

승희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지금까지 그 전화번호 때문에 서운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오빠한테 알려달라고 해도 혼만 내고 안 알려주고, 최태혁 교수님한테 알려달라고 했더니 이상한 소리만 하고 또 안 알려주고. 영화사에 전화해도 잡상인 취급하며 안 알려주잖아. 이젠 오기로라도 알아야겠어.”

나영은 승희가 내민 손을 붙잡으며 진심으로 충고했다.


“넌 차현 감독님 전화번호 모르는 게 좋아.”

나영까지 전화번호를 안 알려주겠다고 하자 승희는 정말 짜증 나는 표정을 지었다.


“너까지 왜 그래! 내가 그 전화번호 들고 무슨 짓을 한다고 다들 나한테 이러는데.”

“네가 내 친구라서 그래.”

“그러니까 알려달라고! 나도 유명인 전화번호 좀 가지고 있자.”

사실은 나영을 도와주기 위해서 차현 감독 전화번호를 알아두려던 거였는데, 어느새 그 이유가 변질되었다.

***

오늘도 늦은 시간에 퇴근한 나영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1층 로비를 걸어가며 핸드폰을 꺼냈다.

최태혁 교수한테서 온 연락은 없었다.

그래도 그녀한테 먼저 연락해서 이주아의 일을 설명할 줄 알았는데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녀가 듣기 싫어할 거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말 안 하는 건가?

아니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영은 자신이 여전히 생각이 많은 걸 알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성격은 정말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나영은 최태혁 교수의 연락처를 눌렀다.

굳이 최태혁 교수가 연락해오길 기다릴 필요 없이 그녀가 먼저 전화하면 되었다.

그런데 전화해서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나영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핸드폰에 찍힌 이름만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먼저 이주아 이름을 말하기는 싫었다.

저녁 먹었냐고 묻기에도 너무 늦은 시간이고.

아! 황 여사님이 어떠신지…….


“뭐해?”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나영은 화들짝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놓쳤다.

대리석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은 그대로 액정이 쩍 갈라졌다.

원래도 조금 깨어져 있던 액정이라 이번엔 완전히 사망 수준이었다.


“…….”

“…….”

핸드폰을 떨어뜨린 나영도, 원흉인 태혁도 이 재난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허리를 굽혀 핸드폰을 주운 태혁은 상태를 확인하고 눈을 찌푸렸다.


“기껏 기다렸는데 사고만 쳤네.”

나영은 핸드폰을 받기 위해서 손을 내밀었다.


“그냥 주세요.”

그 때문에 망가진 게 맞지만, 일부러 그녀를 기다렸다고 하니 화는 나지 않았다.

태혁은 핸드폰이 아니라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끌어당겼다.


“가자. 내가 핸드폰 새로 사 줄게.”

아직 병원이었기에 나영은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겁나?”

그가 돌아보며 묻자 나영은 잘못한 걸 들킨 사람처럼 눈이 커졌다.
 

 


“손 놓을까?”

나영은 그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고 태혁은 피식 웃었다.


“예전엔 다른 사람 눈치를 보더니, 이젠 내 눈치를 보네.”

결국 그녀는 항상 눈치를 본다는 말이라 나영은 바로 그를 흘겨보았다.

태혁은 자신의 핸드폰으로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나 지금 당장 새 핸드폰 필요해.”

그가 다짜고짜 그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리기에 나영은 궁금해졌다.


“누구한테 전화하신 거예요?”

태혁은 가보면 안다고 말할 뿐 가르쳐 주지 않았다.

분명 핸드폰 파는 가게가 다 문을 닫았을 시간인데, 태혁이 그녀를 데리고 간 매장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두 사람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덩치가 큰 두 남자가 아주 큰 소리로 인사까지 했다.

나영은 그 소리에 놀라서 태혁의 뒤로 몸을 피했다.

태혁이 살이 포동포동 오른 남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쟤가 홍식이야.”

생각도 못 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게 되어 나영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홍식이 태혁과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신기한 눈으로 나영을 쳐다보았다.


“와! 그때 그 작은 꼬마가 이렇게 어엿한 숙녀가 되다니.”

나영도 신기했다. 그때는 곰돌이였는데 지금은 사람이었으니까.


“핸드폰 파세요?”

그녀의 질문에 홍식은 뒤에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저쪽이 매장 사장이라고 알려주었다.

태혁이 자랑하듯이 말했다.


“웬만한 물건은 홍식이한테 말하면 다 나와.”

조언이 필요할 때는 차현한테, 물건이 필요할 때는 홍식이한테.


“그럼 저는 언제 필요하세요?”

그녀의 질문이 너무 귀여워서 태혁은 못 참고 그녀의 머리를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홍식이는 옆에서 신나게 손뼉까지 쳐대서 나영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차현 감독이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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