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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49/84)


49화.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2023.03.20.



 
태혁은 두 손으로 나영의 손을 감싸 쥐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알려주었다.

그때의 나영을 그도 알고 있었다는 걸.


“차현이 하트 목걸이 한 곰 인형을 사라고 해서. 그런데 가게를 몇 군데나 돌며 찾아봤는데 죽어도 없는 거야. 그래서 돼지 인형이 입고 있는 하트 무늬 티셔츠를 이 곰 인형한테 입혔어.”

그의 말을 듣고 나영은 마음이 울컥했다.


“그럼 그때 병원에 찾아왔던 호랑이가 교수님이에요?”

태혁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같이 갔던 곰돌이가 홍식이야.”

태혁이 몇 번이나 언급했던 이름의 주인공을 그녀가 이미 만났었다는 말에 나영은 저도 모르게 웃게 되었다.

눈으로는 울면서 입으로는 웃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태혁은 그녀가 자책할 필요 없는 이유를 알려주었다.


“그때 너는 작고 힘없는 아이였을 뿐이야. 널 지킬 힘이 없었다고 네 잘못이 되는 게 아냐. 널 지켜주지 못한 사람들의 잘못이 더 커.”

꾹.

이번엔 나영이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하지만 교수님이 저 구해줬잖아요.”

그녀의 말에 태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는 당연히 그녀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었다.


“설마 박재수 형사님이 말해줬어?”

나영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스스로 알아낸 거뿐이었다.


“목소리요.”

그녀는 실어증에 걸려 말을 못 했을 뿐이지, 귀는 멀쩡했기에 호랑이 탈을 쓴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누군지 알았다.

바로 차 트렁크에 갇힌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라는 걸.

***

17년 전.

어둠 속에서 손과 발이 묶인 채 눈은 안 보이고 입까지 결박당한 나영은 지옥 같은 몇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엄마와 아빠를 불러봐도 그들은 그녀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빠는 회사 일이 가족보다 중요했고, 엄마는 아빠한테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의심하며 요즘 짜증이 늘어났다.

사이가 나빠진 부모님을 화해시킬 선물을 사러 나왔던 길이었다.

아빠가 보낸 사람이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차에 탄 순간 악몽이 시작되었다.

제발 누가 자신을 구해달라고 몸부림치며 계속해서 속으로 빌었었다.


“트렁크 안 좀 봅시다.”

정말 누군가 나타나 차를 세웠지만,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또 다른 나쁜 사람인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덜덜 떠는 거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녀는 너무 나약하고 너무 쓸모없었다.

덜컹.

트렁크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몸을 붙잡고 일으켰을 때도 나영은 두려움에 얼어붙어 있었다.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가 벗겨지고 빛이 한꺼번에 그녀의 눈을 덮쳤다.


“겁먹지 마. 나 안 무서운 사람이야.”

빛과 함께 들려온 그 목소리에 나영은 처음으로 안도했다.

그대로 의식을 잃고 다시 깨어났을 때 나영은 병원에 있었다.

경찰들이 있었고, 엄마는 계속해서 울고, 아빠는 계속해서 화를 냈다.

정작 그녀를 구해준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영아. 미안해. 다 엄마 탓이야.”

그래서 엄마가 자기 탓을 할 때도 아니라고 말해주지 못했다.

병원에서 수십 가지 검사를 받았지만 그녀의 상태는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나영은 여전히 목소리가 안 나왔고, 사람들도 무서웠다.

누군가 다가올 때마다 움찔거리며 얼어붙었다.

호랑이가 곰돌이를 손으로 밀며 병실에 등장했을 때도 나영은 깜짝 놀랐다.

얼굴은 귀여운 인형들이 행동은 사내아이처럼 거칠었다.

나영은 그 인형들과 전혀 놀고 싶지 않았기에 꼼짝도 안 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나 안 무서운 사람이야. 아니, 호랑이야.”

호랑이가 말했을 때 나영은 그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그녀를 트렁크 속에서 구해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영은 손을 뻗어 호랑이가 준 곰 인형을 받았다.

그리고 말을 하기 위해서 입을 벌렸지만 목구멍이 꽉 막힌 듯이 답답하기만 했다.


“아……. 아…….”

그녀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애쓰며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지자 엄마가 당황해서 박재수 형사에게 말했다.


“아이가 힘들어하네요.”

박재수 형사는 바로 호랑이와 곰돌이를 병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나영아. 잠깐만 혼자 있어. 엄마 금방 올게.”

엄마도 나가버리자 나영은 할 말 있을 때 사용하라고 놓아둔 종이와 펜을 집어서 글자를 꼭꼭 눌러 썼다.

말이 안 나오니까 글로라도 써서 줄 생각이었다.

글을 다 쓰고 난 뒤 나영은 침대에서 나와 병실 입구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엄마는 박재수 형사와 이야기 중이었다.

그리고 호랑이와 곰돌이는 이미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나영은 작은 두 손에 쪽지를 꼭 쥐고 호랑이를 쫓아서 병실을 나왔다.

사람들과 부딪힐까 봐 잔뜩 몸을 웅크리고 걸어가 엘리베이터까지 탔다.

1층 로비에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이 많은 사람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갈 자신이 생기지 않는데 저 멀리 호랑이가 탈을 벗는 게 보였다.

호랑이가 사람이 되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검은 머리칼과 높게 솟은 콧날, 날렵한 턱선.

나영이 볼 수 있는 건 단지 뒷모습뿐이었지만, 보이는 모든 것이 특별하게 눈에 담겼다.

트렁크에서 나온 뒤부터 모든 사람이 무서웠는데, 그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나영이 사람들 사이를 뚫고 그한테 다가갈 용기를 차마 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그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녀의 손에는 전하지 못한 쪽지만 쥐어져 있었다.

그렇게 17년이 흘러 버렸다.

***

태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날 날 쫓아왔었다고?”

그는 병실을 나온 뒤 나영을 만난 적이 없기에 전혀 상상조차 못 했었다.


“꼭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제발 살려달라고 빌 때 그녀의 기도에 응답해 준 사람은 그뿐이었으니까.


“말을 못 하니까 종이에 적었어요.”

태혁은 그걸 자신이 못 받았다는 것에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하여튼 운 없는 건 알아줘야 했다.

만약 그 쪽지만 제대로 받았어도 두 사람의 인연은 더 깊어졌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 주려고 했던 그 쪽지는 버린 거야?”

나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제가 가지고 있어요.”

여전히 나영이 간직하고 있다는 말에 태혁은 기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말? 어디 있는데?”

태혁은 지금이라도 받고 싶었다.

나영은 들고 있던 곰 인형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소매 사이에 끼워두었던 종이를 꺼냈다.

그녀가 태혁에게 주려고 쓴 쪽지는 태혁이 선물로 주었던 곰 인형과 계속 함께 있었다.

나영이 곰 인형의 옷 속에서 오래된 쪽지를 꺼내는 걸 보고 태혁은 눈빛이 일렁였다.

오래도록 잃어버린 소중한 걸 되찾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드릴게요.”

나영은 쪽지를 그의 손에 올려주었다.

그녀도 이 쪽지를 제대로 전해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기에 이 순간이 꼭 꿈인 것만 같았다.

17년 동안이나 어긋난 조각이 두 사람의 만남으로 인해 제대로 맞추어졌다.

태혁은 오래된 종이가 찢어질까 봐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 안에는 어린아이가 꼭꼭 눌러쓴 글씨로 감사의 인사가 적혀 있었다.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그 글을 읽는데 웃음이 나오면서도 눈가가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나영은 그가 그녀를 구했다고 하지만 그녀 역시 그의 인생을 변화시켰다.


“난 말이지. 이때 내가 정말 재수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했었어.”

태혁이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붉어진 그의 눈을 보니 나영도 마음에 파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런 나라서 널 구할 수 있었으니, 이젠 모든 사람에게 감사해.”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죽어버린 부모님들도, 아이를 제대로 키우는 법을 전혀 몰랐던 할아버지도, 잔소리만 했던 박재수 형사도…….


“내가 세상에 감사하는 법을 알게 해주었는데, 어떻게 네가 잘못된 선택일 수가 있어?”

절망만 가득했던 그녀의 질문을 희망으로 가득 채워서 돌려주는 그의 말에 나영은 눈물이 차올랐다.


“우리가 서로에게 소중하지 않으면, 누가 될 수 있는데?”

이제 태혁은 감히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반드시 만났어야 할 운명이라고.

그렇기에 클럽에서 마주쳤을 때 스쳐 지나가지 않고 서로를 알아보고 끌린 것이었다.

그저 하룻밤의 유희가 아니었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만났기에 불꽃이 피어난 것이었다.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넌 동의할 수 없어?”

툭.

곰 인형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나영은 두 팔을 뻗어서 태혁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벅찬 마음을 힘겹게 뱉어냈다.


“저도 교수님이랑 함께하고 싶어요.”

그건 그가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라는 걸 알기 전부터 품고 있던 마음이었다.

그런데 현실에 치여, 부정적인 마음에 눌려 감히 꺼내놓지 못했었다.

그녀는 감히 그런 관계를 감당할 수 없을까 봐.

그래서 최태혁 교수가 그녀에게 실망하고, 미워하게 될까 봐.

하지만 이젠 감당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만약 그녀가 또 나약한 마음에 주저앉고 뒷걸음친다면, 그가 또 그녀를 구해주기 위해서 손을 뻗어줄 거라는 걸 믿기에.

그녀에게 이런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호랑이 탈을 쓴 이 사람을 빼고 누가 있을까.


“고마워요. 교수님.”

17년 전에는 그녀를 구해줘서.

17년 후에는 그녀를 끝까지 붙잡아 주어서.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자 내내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보호막을 깨고 나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태혁의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싸고 들어 올렸다.

마주한 두 사람의 눈동자는 모두 물기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둘 다 이렇게나 많은 마음을 나눈 건 처음이었다.

아마 앞으로 이렇게 마음을 모두 내놓고 이야기하는 건 힘들 것이다.

그들도 보통의 연인들처럼 의견 차이가 생길 때는 서로 다투기도 하고, 오해로 힘들기도 하고, 질투하는 일도 생길 거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이 있었기에, 앞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쉽게 깨어질 일은 없었다.

나영이 먼저 다가가 그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태혁의 눈꺼풀이 감겼다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는 보답하듯이 그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꾹 눌러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게 시작된 입맞춤은 금세 열기를 품고 깊어졌다.

태혁은 나영에게 키스하며 함께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물결치듯이 탐스럽게 펼쳐졌다.

나영은 그녀의 몸을 압박하는 그의 무게감을 느끼며 두 눈을 감았다.


 
그가 고개를 틀며 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다시 다가올 때는 더 큰 자극으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자극받아 현기증이 일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그녀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꼭 그날 밤과 비슷했다.

처음으로 그에게 안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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