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걸 교수님이 어떻게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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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그걸 교수님이 어떻게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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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그걸 교수님이 어떻게 알아요?
2023.03.17.
세미나 자료를 들고 윤이나 교수를 찾아가던 승희는 윤이나 교수의 방에서 나오는 나영을 발견하고 멈칫하며 멈추어 섰다.
‘어? 쟤가 왜 저기서 나와?’
나영의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신경이 쓰였다.
설마 어제 차현 감독이 윤이나에게 책임이 있는 듯이 말해서 따지러 간 건가 싶었다.
그건 정말 간이 부은 행동이었다.
여긴 병원이었고, 윤이나는 교수였다.
아무리 문나영이 만나는 남자가 교수라도, 그녀는 레지던트 1년 차일 뿐이었다.
“이런. 어쩌지. 최 교수님한테 말해야 하나.”
최태혁 교수 성격을 생각했을 때 그럼 더 일이 커질 것만 같았다.
승희는 어제 차현 감독의 전화번호를 안 받아놓은 걸 후회했다.
딱 봐도 차현 감독 포지션이 중간에서 해결해주는 역할이었으니 이런 일이 생겼을 때는 차현 감독한테 말하는 게 제일 안전했다.
“그런데 세계적인 감독씩이나 되면서 왜 남의 연애 해결사 노릇이나 하는 거지?”
그게 취미인가?
역시 천재 감독은 남다르다고 생각하며 승희는 윤이나 교수의 방으로 향했다.
그 시간 태혁은 차현한테 욕을 한 바가지 써서 보내고 있었다.
원래는 차현한테 17년 전 그가 나영을 구해준 일을 말할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차현한테만은 죽어도 말하지 않을 거다.
이 배신자.
차현한테 욕 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태혁은 VIP 병실로 갔다.
환자가 잘 회복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환자 보호자는 만나기 싫은 난처한 상황이 되었지만 태혁은 그냥 평소대로 하기로 했다.
그가 살면서 악연이 어디 이거 한 번뿐이겠는가.
사실 그는 좋은 인연보다 악연이 더 넘쳐났다.
쿨하게 만나서 재수 없었다, 다신 마주치지 말자 하고 헤어지면 되는 거다.
드르륵.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가던 태혁은 멈칫하며 멈추어 섰다.
너무 과하게 차려입은 이주아는 시선을 안 줄래야 안 줄 수 없는 비주얼이었다.
환자 간병이 아니라 맞선을 나갔어야 어울릴 모습이었다.
태혁은 애써 외면하며 이철권한테 다가갔다.
“불편한 곳 있으세요?”
이철권은 수술한 곳이 아직 아프다고 말하며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많이 아프시면 진통제 처방해드리겠습니다.”
이철권의 아내가 언제쯤 퇴원할 수 있는지 묻기에 태혁은 수술 회복기가 열흘 정도 걸릴 거라고 대답해 주었다.
“아빠. 입원한 김에 그냥 여기서 한 달 정도 푹 쉬어.”
이주아의 말에 좋은 표정을 지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
원래는 어제 황 여사를 만나러 본가에 갈 생각이었는데, 이주아 문제가 터지는 바람에 오늘 가게 되었다.
집에 가기 전에 나영에게 몇 번이나 전화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이미 차현이 모든 걸 다 설명했으니 그가 이제 와서 나영에게 해명할 건 없었다.
사실 그도 차현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알아챘다. 상황이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역시 성격 나쁜 놈은 그냥 나쁜 채 살아야 하나 보다.
거기서 왜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하고 자빠졌는지.
Rrrrrrrrr Rrrrrrrrr-
전화가 울리기에 나영인가 싶어서 바로 확인해 보았는데 오승준인 걸 알고 바로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태혁은 열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야! 차현 그놈이 감히 내 동생도 건드렸어! 내가 가만 안 둬!]
통화가 되자마자 오승준이 소리치는 바람에 귀가 먹먹했다.
“뭔 헛소리야?”
태혁은 차현의 여자 취향을 잘 알았다.
오승희는 절대 아니었다.
[안 그럼 승희가 왜 그놈 전화번호를 달라고 나한테 자꾸 조르냐고!]
“그럼 네 동생 취향이 차현인가 보지.”
오승준이 욕을 해대자 태혁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오늘은 오승준을 상대할 기분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집에 온 그를 홍식이 제일 먼저 반겨주었다.
“형님. 오셨습니까!”
“그래, 황 여사님은 좀 어떠셔?”
“아직도 방에 누워 계세요.”
태혁은 바로 황 여사님이 사는 별채로 향했다.
봐서 상태가 안 좋으면 오늘 직접 병원에 모시고 갈 생각이었다.
“여사님. 저 왔어요.”
태혁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누워 있던 황 여사님이 일어나려고 해서 바로 말렸다.
“그냥 누워 계세요.”
“아휴. 이제 괜찮다니까. 괜히 왔네.”
태혁은 제일 먼저 열이 있나 확인했는데, 다행히 정상 체온이었다.
굳이 병원에 데리고 갈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런데 크게 아픈 것도 아닌데 이리 오래 누워 있는 것도 황 여사님답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나이 탓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태혁은 더 마음이 안 좋았다.
“그 아가씨랑은 잘 지내고 있어?”
황 여사는 오랜만에 집에 온 그에게 제일 먼저 나영에 관해 물었다.
“홍식이가 아무 말 안 해요?”
“홍식이가 왜?”
평소였으면 벌써 떠벌렸을 텐데, 그를 진짜 인어공주라고 생각해서 불쌍하게 여긴 건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알고 보니까 제가 고등학교 때 구해준 아이더라고요.”
“어머나. 그런 인연이 있었어?”
황 여사는 깜짝 놀랐다.
“네, 보통 인연이 아니죠?”
“그러게. 그럼 더 잘해줘야겠네.”
태혁은 그럴 거라고 대답했다.
“저녁은?”
그가 안 먹었다고 하면 분명 황 여사가 저녁 차린다고 일어날 게 뻔했기에 태혁은 일부러 먹었다고 했다.
“오랜만에 집에 온 김에 어르신 보고 가면 좋은데.”
“걱정 마세요. 오늘은 할아버지 만나고 갈 거예요.”
이주아 때문에 부탁할 일이 있었기에.
그럼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빚 갚으라고 할 게 뻔했지만, 이번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 일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그의 할아버지뿐이었다.
***
자기 전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 방에서 나왔던 승희는 나영의 방에 아직도 불이 켜진 걸 보고 방문으로 걸어가서 노크했다.
“나영아. 안 자?”
1초 정도 지난 뒤 나영의 대답이 들려왔다.
“응, 잘 거야.”
평소였으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냥 자러 갔을 텐데 오늘은 윤이나의 방에서 나오던 나영이 생각나서 승희는 마음에 걸렸다.
승희는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방문을 살짝 열고 안을 살펴보았다.
나영은 곰 인형을 품에 안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저 인형은 나영이 병원 레지던트 숙소에 있을 때도 가지고 있던 거였다.
나이가 몇 살인데 애착 인형을 가지고 있는 거냐고 놀렸더니, 나영은 저 인형이 곁에 있어야 안심이 된다고 했었다.
인형을 끌어안고 망부석이 된 걸 보니 마음이 불안한 듯 보였다.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승희는 이걸 어찌해야 하나 싶어 방문 앞에서 오락가락했다.
오빠 승준이 죽어도 차현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아서 결국 차현 감독한테는 연락하지 못했다.
혹시나 해서 영화사 쪽으로도 전화해 보았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방으로 돌아온 승희는 핸드폰을 손에 잡았다.
힘든 사람을 위로하는 최태혁 교수의 모습은 전혀 상상조차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영이 선택한 남자이니 승희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승희는 최태혁 교수에게 보낼 메시지를 적었다.
<나영이가 좀 불안해 보이는데 와 주실 수 있습니까?>
승희는 바로 메시지를 보내지 못했다.
자신이 화약고에 불씨를 던지는 건 아닐까 싶어서.
‘에라 모르겠다.’
승희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기력이 다해서 침대 위로 쓰러져 누웠다.
막 잠이 들려고 할 때쯤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깬 승희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핸드폰을 보니 발신자에 ‘독사’라고 무섭게 찍혀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문 열어.]
최태혁 교수는 최종 보스처럼 할 말만 던졌다.
승희는 엉금엉금 기어서 침대에서 나와 현관으로 향했다.
달칵.
승희가 문을 열자 거대한 존재가 바람을 몰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안경을 안 쓴 승희는 찌푸린 눈으로 늦은 밤에 찾아온 최태혁 교수를 쳐다보았다.
“나영이는 자?”
최태혁 교수의 질문에 승희는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본인이 직접 확인하겠다는 듯이 승희를 지나쳐 나영의 방으로 걸어갔다.
“아 참. 교수님.”
승희가 갑자기 그를 부르자 태혁이 돌아보았다.
“차현 감독님 전화번호가?”
“관심 꺼. 너한테 차현은 아냐.”
승희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눈알이 데구르르 굴렀다.
‘근데 왜 내가 기분이 나쁘지?’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어서 더 불쾌했다.
***
달칵.
태혁이 방문을 열었을 때 나영은 인형을 안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걸어갔다.
아직도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었기에 행동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문나영.”
그가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나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나한테 화났어?”
그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태혁을 쳐다보는 그녀의 표정은 어제와 달리 고요했다.
그게 더 그를 불안하게 하였다.
“말을 해 봐.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난 알 수가 없어.”
태혁은 그녀의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앉으며 몸을 낮추었다.
“오늘 윤이나 교수님을 만났어요.”
윤이나라는 이름에 그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윤이나가 널 괴롭힌 거면 내가 찾아가서 몇 배로 갚아줄게.”
나영은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윤이나 교수님은 교수님이랑 14년 전에 처음 만났다며 그때 전 무얼 하고 있었는지 물었어요.”
14년 전이라는 말에 태혁은 심장이 불안하게 뛰어댔다.
그 당시의 나영은 전혀 잘 지내지 못했을 거 같았으니까.
“그때 전 정신과 상담받고 있었어요.”
말을 한 것만으로도 그 당시로 돌아간 듯 반듯한 나영의 이마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4년이나 받았어요.”
태혁은 손을 뻗어 나영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나영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이런 내가 정말 교수님과 어울리는 상대가 맞아요? 사실은 교수님이 잘못 선택한 걸 수도 있어요.”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그녀가 그리 오래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불쌍하게 보거나 불편하게 볼 것이었다.
그래서 나영은 자신감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최태혁 교수도 알게 되면 그녀를 보는 시선이 전혀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평생 모르게 하고 싶은 마음과 그건 상대방을 속이는 거라는 괴로움이 끝없이 부딪혔다.
그렇게 나영은 다시 자기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다시 무력한 그 어린 계집애가 된 것만 같았다.
그런 나영을 태혁은 절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어려움에 부닥치면 그는 몇 번이고 그녀를 구해낼 거다.
태혁은 그녀가 안고 있는 곰 인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영에게 물었다.
“이 곰 인형이 왜 하트 무늬 티셔츠 입고 있는지 알아?”
그가 갑자기 인형에 관해 묻자 나영은 멍하니 태혁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지금 왜 그런 걸 묻는 건지 나영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태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돼지 인형이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겨서 이 곰 인형한테 입힌 거야.”
나영의 눈빛이 빛과 함께 일렁였다.
“그걸 교수님이 어떻게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