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정식으로 만날 거예요
(47/84)
47화. 정식으로 만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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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정식으로 만날 거예요
2023.03.13.
딩동 딩동.
그가 초인종을 몇 번이나 눌러도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태혁은 주먹으로 현관문을 두드렸다.
쾅 쾅.
“문나영. 안에 있는 거 다 알거든. 문 좀 열어 봐.”
문이 열린 건 그가 두드린 현관문이 아니라 옆집이었다.
“좀 조용히 하세요! 계속 그러시면 경비실에 항의할 거예요.”
태혁은 더 이상 현관문을 두드릴 수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나영이 왜 이리 화가 난 건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이주아가 그렇게 안하무인인 건 처음부터 알았으면서 유독 오늘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건 왜 그런 건지 도통 모르겠다.
태혁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펼쳤다.
이주아의 사인이 들어간 각서였다.
이것만 받으면 다 해결될 줄 알았더니만 더 나빠질 줄이야.
암담해서 꼼짝도 못 하고 있는데,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최 교수님. 여기서 뭐 하세요?”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나영과 함께 사는 오승희가 놀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우러러보는 교수님이 지금은 그녀가 사는 집 앞에서 노숙자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쭈그려 앉아 있으니 놀랄 만도 했다.
태혁은 승희에게 부탁했다.
“문나영한테 나 밖에서 기다린다고 전해줘.”
승희는 최태혁 교수가 이리 대놓고 나영에게 접근할 줄은 몰랐기에 표정 관리가 안 되었다.
“서로 합의된 관계 맞으세요?”
나영이 남자한테 얼마나 칼 같은지 알기에 승희는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승희까지 그를 의심하자 태혁은 바로 눈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라고 하면 네가 날 내쫓겠다는 거야?”
승희는 서둘러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몇 분 뒤 승희는 현관문을 살짝 열고 밖에 있는 태혁에게 나영의 말을 전해주었다.
“차현 감독님 부르시면 이야기하겠대요.”
태혁은 너무 기가 막혔다.
여기서 왜 차현이 나오나!
“차현을 왜?”
“저야 모르죠.”
승희는 왜 자기한테 화내냐면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
“…….”
“…….”
“…….”
바삭바삭.
조용한 분위기에서 승희가 과자 먹는 소리가 거슬리자 태혁은 바로 그 과자를 빼앗아 버렸다.
승희는 너무하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분위기 보니까 잘못은 최태혁 교수가 한 거 같은데 반성도 없이 남이 먹는 과자나 빼앗다니.
역시 폭군이었다.
승희는 나영의 옆으로 붙어 앉으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태혁이 또 승희에게 화를 내려고 하자 차현이 손을 들어 올리며 차분하게 이야기 서두를 끊었다.
“굳이 날 부른 건 두 사람만 대화해서는 절대 해결 안 될 일이기 때문인 거 같은데. 맞아요? 문나영 선생.”
나영은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태혁은 억울해서 항변했다.
“나는 오늘 이주아한테서 이 각서밖에 안 받았어.”
태혁이 각서를 꺼내서 모두의 앞에 보여주었다.
이주아가 어떤 말을 퍼트리던 문나영 이름은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각서였다.
각서를 보고 승희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보기에는 최태혁 교수가 나영을 위해 해준 일 같았으니까.
차현이 각서를 한 번 훑어보고는 나영에게 물었다.
“이 각서 때문에 화난 거예요?”
나영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지금 처음 봐요.”
“그럼 넌 왜 최 교수님한테 화난 거야?”
승희는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나영에게 물었다.
태혁도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기에 대답을 기다리며 나영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나영은 각서를 바라보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내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이었던 이주아가 오늘은 진심 같았어요.”
나영은 고개를 들어 태혁을 노려보았다.
“교수님이 뭔가 하지 않았다면 이주아의 마음이 바뀔 리가 없어요.”
태혁은 그 말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난 오늘 이주아 아버지를 수술해서 생명을 살렸어. 그거 때문에 나한테 감동했다고 내 탓은 아니지!”
차현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아버지 수술할 의사인 건 처음부터 알았잖아. 그걸로 갑자기 마음이 바뀔 리는 없어.”
태혁은 차현을 노려보았다.
넌 도대체 누구 편이야!
차현은 공명정대한 재판관처럼 그에게 물었다.
“오늘 이주아한테 정확히 어떤 말들을 했어? 다 말해 봐.”
태혁은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다 말할 수밖에 없었다.
“수술동의서 사인할 때 이 각서 주면서 사인하라고. 이주아가 협박하는 거냐고 하니까. 아버지 목숨보다 자기 자존심만 중요한 후안무치라고 정말 재수 없게 말했어.”
태혁은 강조했다. 그가 이주아한테 그리 못되게 굴었다는 걸.
하지만 나영의 표정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사인은 네가 하고 싶으면 하고 난 수술하러 간다고 했지. 그리고 왜 자길 이렇게 대하고 문나영만 소중하냐고 하니까. 말해줘도 모른다고 하고 나와서 수술하러 바로 갔어.”
“그래서 이 각서는 수술 끝나고 받은 거야?”
태혁은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각서에 사인했기에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했지. 그게 끝이야.”
그리고 그는 바로 나영을 만나러 갔다.
여기서 자신이 잘못한 게 뭐냐고 태혁은 호소하듯이 나영과 차현과 승희를 번갈아 보았다.
승희가 듣기에도 최태혁 교수가 딱히 이주아에게 불미스러운 행동을 한 건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 수술을 빌미로 각서에 사인하게 했으니 최태혁 교수를 더 미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 말이 문제였네.”
그런데 차현이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나영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태혁은 화난 눈으로 차현에게 경고했다.
“너 잘 생각하고 말해라. 말 잘못 하면 나랑 오늘 절교할 수도 있어.”
“교수님이야말로 오늘 저랑 절교하고 싶으세요?”
절교라는 말은 그가 먼저 꺼냈지만, 나영이 그대로 그에게 하자 태혁은 상처받았다.
나영은 차현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이주아가 왜 마음이 움직인 건데요?”
차현은 태혁을 잠깐 보았지만, 오늘은 어찌해도 도와줄 방법이 없었기에 그가 알아낸 그대로 말했다.
“내내 차갑고 냉정하게 굴며 그 여자를 하찮게 여겼던 태혁이가 마지막에 각서 때문에 그 여자한테 진심으로 고맙다고 인사했어요. 그 진심 어린 감사에 그 여자 마음이 움직인 거 같은데.”
로맨스 소설 마니아인 승희도 완전히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봐도 맞는 거 같아요. 원래 여자는 나쁜 남자가 백 번 못되게 굴어도, 한 번 잘해주는 것에 뻑 가거든요.”
태혁은 너무한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이것들이 사람을 앞에 앉혀놓고 생매장을 하고 있었다.
이제 그를 보는 나영의 눈빛에는 살얼음만 가득했다.
여기서 태혁은 그녀를 위해 각서를 받은 거라고 변명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걸 태혁이 잘못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게.”
차현이 이제야 그의 편을 들어주자 태혁은 눈물이 날 거 같았다.
“이주아가 각서에 사인을 안 할 줄 알았는데, 사인을 했잖아요. 그러니 고마움을 표시하는 건 당연한 사람의 예의였어요. 오히려 의아한 건 두 사람 말대로라면 이주아는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라 그리 쉽게 사인할 리가 없는데 왜 했지?”
차현이 또 뭐 놓친 거 없냐는 눈빛으로 태혁을 쳐다보았다.
태혁은 이미 숨김없이 다 말했기에 할 말이 없었는데,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서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이주아한테 각서 주고 나왔을 때 우연히 윤이나를 마주쳤어.”
하필 이 순간 듣게 된 그 이름에 나영은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이주아가 소리치는 걸 들었는지 나한테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
차현은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유추했다.
“그럼 윤이나가 유도했을 수는 있겠네. 이주아가 각서에 사인하게. 하지만 그게 결국 이주아의 마음을 움직일 거라는 건 그때는 윤이나도 몰랐을 거야. 그건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야. 그러니 윤이나의 의도는 나도 잘 모르겠네.”
나영은 윤이나의 이름만 들어도 거북했기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됐어요. 저는 더 알고 싶은 거 없어요. 다들 그만 돌아가세요.”
나영이 방으로 들어가 버리려고 하자 태혁은 서둘러 그녀를 붙잡았다.
“네가 이대로 가버리면 내가 정말 잘못한 거 같잖아.”
“이거 놔요!”
“못 놔! 난 진짜 억울하다고.”
자존심 다 내려놓고 나영을 붙잡는 최태혁 교수의 모습을 구경하며 승희는 아까 태혁이 빼앗아 간 과자를 다시 먹었다.
“와. 굉장하네.”
재미있는 구경거리 때문인지 과자도 더 맛있었다.
승희가 실실 웃으며 구경했다면 차현은 정반대로 심각한 표정이었다.
“…….”
아무래도 오늘 나영이 그를 부른 것 때문에 앞으로 그와 태혁의 관계가 당분간 냉각기일 거 같아서.
그렇다고 나영이 도움을 청할 때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영은 멘탈이 그렇게 강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공감 능력이 좋지 못한 태혁한테 맡기면 두 사람은 엇나가기만 할 수도 있었다.
***
사실 나영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최태혁 교수가 잘못한 게 없다는 걸.
그렇다고 마음이 풀리지는 않았다.
윤이나가 최태혁 교수에게 집착하는 건, 그리고 이주아가 최태혁 교수를 좋아하게 된 건 모두 정말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설마 내가 짝을 잘못 찾은 건가.
나영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만약 윤이나가 바란 게 그녀가 흔들리는 거라면, 나영은 너무 분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안에서 들려온 나긋한 여자 목소리를 듣고 나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달칵.
나영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윤이나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이 방에 마지막으로 찾아왔던 건 은별 일에 대해서 그녀의 잘못을 인정하기 위해서였다.
그게 윤이나가 의도한 일인 것도 모르고.
지난 일에 대한 감정도 남아 있었기에 윤이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그리 곱지 못했다.
“교수님한테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래? 뭔데?”
이주아의 일에 대해 대놓고 윤이나에게 따져 물을 수도 있었지만, 나영은 그러지 않을 거다.
이제 와서 윤이나에게 따져봐야 너무 늦었다.
이번 일은 은별 때와는 그 성격이 너무나 달랐다.
그때는 원인을 바로잡으면 결과를 바꿀 수 있었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이주아의 마음은 이미 변해버렸으니까.
“저 최태혁 교수님이랑 정식으로 만날 거예요.”
선포와도 같은 그녀의 말에 담담하던 윤이나의 눈빛이 처음으로 요동쳤다.
“그러니까 최태혁 교수님한테 남아 있는 마음 접어주세요.”
이렇게 말한다고 윤이나가 순순히 그 마음을 접을 거란 믿음은 없었다.
그래도 한 번은 이렇게 제대로 정리할 필요는 있었다.
그녀의 마음에 믿음을 주기 위해서라도.
“나랑 최태혁은 스무 살에 처음 만났어. 벌써 14년 전이네.”
윤이나가 갑자기 과거 이야기를 꺼내더니 오히려 그녀에게 물었다.
“그때 넌 뭐 하고 있었지?”
나영의 눈빛이 유리알처럼 깨어졌다.
그때 그녀는 유괴의 후유증 때문에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