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어차피 말해줘도 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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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어차피 말해줘도 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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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어차피 말해줘도 넌 몰라
2023.03.10.
여자가 남자의 사탕발림 같은 말에 홀랑 넘어가서 몸과 마음을 아낌없이 퍼주는 걸 나영은 바보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헤어진 뒤에 그때 남자의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면 너무 늦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그의 말도 완전히 믿으면 안 된다고 그녀의 이성은 경고했지만, 그래도 기쁜 마음은 줄어들지 않았다.
적어도 이 말을 할 동안은 진심일 수 있잖은가.
“교수님이 그런 말씀 하시는 거 저한테 바라는 게 있어서 그런 거죠?”
그녀가 입꼬리에 웃음을 달고 말은 추궁하듯이 하자 태혁은 피식 웃었다.
그녀의 작은 머릿속에 무슨 생각들이 바쁘게 지나가고 있는지 알 거 같았으니까.
누군가의 친절을 믿었다가 납치될 뻔한 나영이 사람 말을 쉽게 믿는 어른이 되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적당한 경계는 그녀의 안전을 위해 나쁠 거 없었다.
그게 설령 그를 향한 거라고 해도 말이다.
태혁은 그녀를 향해 몸을 숙이며 나직하게 말했다.
“당연히 있지.”
역시 아무 대가 없이 여자에게 잘해주는 남자는 없었다.
나영은 한번 말해 보라는 듯이 큰 눈망울을 또랑또랑 뜨고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늘 밤 내 꿈 꾸라고.”
전혀 생각도 못 한 말에 나영은 눈이 커졌다.
그가 풋풋한 소년의 나이도 아니고 왜 그런 걸 바라는 건가 싶었다.
“키스까지 하면 무조건 꿀 거야.”
그가 그리 말하며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으려고 하자 나영은 서둘러 몸을 돌려 도망쳤다.
태혁은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쫓아가며 몇 번이고 말했다.
오늘 밤은 꼭 그의 꿈을 꿔야 한다고.
나영은 교수라는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왜 이러는 건지 정말 이해가 불가능했다.
***
에에에에에엥엥엥.
사이렌 알람 소리에 눈을 뜬 나영은 평소처럼 바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최태혁 교수가 주문을 건대로 진짜 꿈에 최태혁 교수가 나왔다.
웃긴 게 꿈속에서 그녀와 그는 같은 강의실에서 공부하는 의대 동급생이었다.
최태혁 교수는 똑같은 학생이 되어서도 자신은 수술 천재라며 잘난 척이 심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모든 여학생이 그를 좋아해서 나영은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밤새 동급생이 된 최태혁을 짝사랑만 하다가 잠이 깨어서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개꿈이야.”
역시 개는 안 나왔지만 분명 개꿈이었다.
부스스 일어나 침대에서 나가려고 하는데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손을 뻗어 확인해 보니 최태혁 교수가 보낸 것이었다.
<내 꿈 꿨어?>
나영은 메시지를 그 대신 노려보았다.
분명 그가 의대 다닐 때도 꿈속에서처럼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살았을 거 같았다.
나영은 답변을 보내지 않고 그냥 핸드폰을 침대 위에 던져놓았는데 메시지가 한 통 더 도착했다.
<황 여사님이 몸이 안 좋으셔서 당분간 도시락 못 싸신대.>
황 여사님 이야기인 걸 보고 나영은 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어서 메시지를 적었다.
<많이 안 좋으세요? 그럼 병원에 모시고 와야죠.>
<감기라는데. 집으로 한번 찾아가 보려고.>
그동안 도시락 얻어먹은 정이 있어서 나영도 황 여사님의 건강이 신경 쓰였다.
최태혁 교수가 황 여사님을 만나러 갈 때 그녀도 같이 갈 수 있으면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황 여사님이 계신 곳은 최태혁 교수의 본가이니 그녀가 함부로 가면 안 될 거 같았다.
그 집에 분명 최태혁 교수의 할아버지도 살고 계실 거다.
그러니 그 집에 가는 건 그녀와 최태혁 교수의 사이가 결혼할 정도로 진지한 사이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나영은 고민하다가 결국 같이 가도 되느냐는 메시지는 보내지 못했다.
***
평소처럼 병원 근무를 하려고 했는데 치프 동건이 그녀에게 질문을 던진 순간 균열이 생겼다.
“혹시 이철권 환자 딸이랑 별일 있어?”
나영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동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동건의 성격상 소문을 듣고 이런 말을 함부로 물어볼 사람은 아니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세요?”
“이철권 환자 딸이 너로 주치의를 바꾸고 싶다고 하더라고.”
가까이 두고 갑질이라도 하고 싶다는 뜻인가 보다.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최 교수님이 단칼에 잘랐지. 병원에 원칙이 있으니 함부로 주치의 바꿀 수 없다고.”
나영은 최태혁 교수한테 그런 말은 전혀 듣지 못했다.
아무래도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거 같아서 그한테도 불퉁한 마음이 생겼다.
결국 그녀한테 숨긴 거니까.
“이철권 환자 오늘 수술이죠?”
동건은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주아가 지금껏 조용한 것도 아무래도 아버지 수술 때문인 거 같았다.
수술 전에 집도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좋을 게 전혀 없었으니까.
결국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건 수술이 끝난 뒤였다.
그런데 처음 들켰을 때만큼 그렇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난 영원히 널 배신하지 않을 거야.’
‘내 부모님 이름을 걸고 하는 말이야.’
‘네가 훨씬 더 중요하지.’
만약 영화관에서 최태혁 교수가 한 말이 모두 진심이라면, 그녀 역시 그가 가장 중요했다.
두 사람이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그저 서로 좋아한 거뿐이다.
그러니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다면 그거야말로 이 마음에 미안한 일이었다.
“치프. 만약 내가 남자랑 연애한다면 어떨 거 같아요?”
그녀의 질문에 동건은 한 대 맞은 거 같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네가 연애를 한다고?”
이리 놀라는 걸 보니 그녀가 사람들한테 어떤 모습이었는지 짐작이 되었다.
“많이 안 어울려요?”
“그렇긴 한데. 원래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변한다잖아.”
나영은 사랑이란 말에 얼굴 붉히며 부정했다.
“사랑이 아니라 그냥 연애요.”
“연애도 마음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특히 너라면 분명 그러겠지.”
동건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감히 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하여튼 난 정말 좋은 일이라고 봐.”
동건이 웃으면서 그리 말해주니 나영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용기가 생기는 거 같았다.
“우리 병원에서 연애랑 제일 안 어울리는 사람은 최태혁 교수님뿐이지.”
그런데 동건이 농담처럼 덧붙인 말에 나영은 표정이 굳었다.
“네? 최태혁 교수님이 왜요?”
“왜긴 왜야. 최 교수님 나르시시스트잖아. 자기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남을 배려하며 연애할 수 있겠어? 최 교수님은 분명 연애 결혼이 아니라 맞선보고 결혼할 거야. 하하하하하.”
웃는 동건의 뒤통수를 나영이 노려보았지만, 동건은 알아채지 못했다.
***
이주아는 수술 전에 태혁을 찾아왔다.
“우리 아버지 수술 제대로 안 하면 내가 당신 이 땅에서 의사 못 하게 만들 거야.”
곧 수술 들어가야 하는 의사한테 잘 부탁한다는 인사가 아니라 협박을 하는 이주아를 태혁은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래도 딸이 아버지 걱정하는 마음에 하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굳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나는 내 아버지의 원수가 와도 사적인 감정으로 수술할 일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아버지 수술하길 바란다면 여기 수술동의서에 사인이나 해요.”
태혁은 이주아의 앞에 수술동의서를 내밀었다.
원래는 주치의가 할 일이지만, 이주아는 특별히 그가 맡았다.
따로 또 받아야 할 사인이 있어서.
이주아가 펜을 들어서 수술동의서에 사인하자 태혁은 또 다른 종이도 내밀었다.
“여기도 사인해요.”
그가 내민 종이에 적힌 글을 보고 이주아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설마 내가 여기 사인 안 하면 우리 아버지 수술 안 한다는 거예요?”
태혁이 또 내민 종이는 이주아가 문나영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각서였다.
“잘 읽어봐요. 나에 대해서는 소문내도 상관없어요. 그냥 문나영 이름만 안 말하면 돼.”
이주아는 그게 더 기분 나빴다.
그녀한테는 관심도 없는 남자가 문나영은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애쓰는 모습이 정말 꼴 보기 싫었다.
이주아는 펜을 으스러지게 움켜잡으며 태혁을 노려보았다.
“내가 사인하기 싫다면 어쩔 거예요?”
“그건 본인 자존심이 아버지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건데. 그럼 아버지 후광에 기대 갑질하는 것도 그만둬야죠. 그것마저도 싫다면 그냥 후안무치 인생이지.”
이주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의 말이 억울했는지 눈가가 파들파들 떨렸다.
그래도 태혁은 상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기에 사인할지 말지는 본인이 정해요. 난 당신 아버지 수술하러 갈 테니까.”
그가 문으로 걸어가서 열려고 할 때 이주아가 그의 등에 대고 외쳤다.
“내가 뭐가 그렇게 나쁘다는 거야! 그 여자는 뭐가 그렇게 소중하고!”
달칵.
태혁은 문을 열고 나가며 한마디로 정리했다.
“어차피 말해줘도 넌 몰라.”
이주아는 그저 이 순간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녀를 특별히 더 미워하고 싶지도 않고, 더 설득하는데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야?”
이주아가 외치는 소리를 들은 듯이 윤이나가 복도에 서서 탐색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태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 아니야.”
정말 무서운 건 윤이나였다.
윤이나가 가진 끈기와 참을성은 태혁이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그에게 복수심을 품는다면 그거야말로 가장 최악의 결과를 불러올 거다.
***
이철권의 수술은 3시간 정도 걸려 끝이 났다.
태혁은 이철권의 아내와 이주아에게 암세포를 완전히 제거했다고 알려주었다.
이철권의 아내는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이주아는 붉어진 눈으로 종이 한 장을 그에게 던졌다.
그가 수술동의서와 함께 사인하라고 내밀었던 각서였다.
이주아의 행동에 놀란 이철권의 아내가 바로 딸을 혼냈다.
방금 아버지 수술해 준 의사한테 이게 무슨 무례한 태도냐고.
태혁은 몸을 숙여 각서를 집어 들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원하는 걸 얻었으니.”
태혁은 각서에 사인 된 걸 확인하고 처음으로 웃는 얼굴로 이주아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정말 고마워요. 이건 내 진심입니다.”
이주아는 파르르 떨며 그를 쳐다보았다.
분해서 그런 건지, 다른 이유인지 그가 알 도리는 없었다.
태혁은 바로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
오늘 할 수술을 다 끝냈으니, 나영을 만날 시간이었다.
<지금 어디야?>
<교수님 앞이요.>
나영이 보낸 답변을 보고 태혁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신관과 연결된 구름다리에 나영이 서 있는 걸 발견한 태혁은 기분 좋은 얼굴로 손에 들고 있는 각서를 들어 올려 흔들었다.
“이게 뭔 줄 알아?”
당연히 그게 무언지 알 수 없는 나영은 눈만 깜빡였다.
태혁은 자랑하기 위해서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는데, 갑자기 뒤에서 훼방꾼이 등장했다.
“최태혁!”
이 병원에서 그의 이름을 그리 함부로 부른 사람은 이주아였다.
각서에 사인까지 했으면서 왜 또 나타난 건가 싶었는데, 그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나를 이렇게 대한 남자는 당신이 처음이야! 그래서 당신을 꼭 내 걸로 만들어야겠어!”
태혁은 뜨악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짱돌인 줄 알았던 게 갑자기 거대한 바위가 되어서 그를 향해 돌진해 왔다.
태혁은 빠르게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나영이 몸을 돌려 떠나려 하고 있었다.
태혁은 급하게 나영을 향해 뛰어갔다.
“문나영! 잠깐만!”
난 무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