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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기대할게 (44/84)


44화. 기대할게
2023.03.03.



“네? 그때 병원에서 본 아이가 지금 만나는 여자분이라고요?”

홍식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쩍 벌렸다.

그도 그럴 것이 홍식이는 10살 때의 나영밖에 만나본 적이 없기에.

그러고 보니 벌써 17년이나 흘렀다.


“그럼 그 여자분도 형님이 자기 구해준 거 알아요?”

태혁은 라면을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홍식은 더 흥분해서 그를 다그쳤다.


“그럼 당장 가서 말해야죠. 그걸 알면 그 여자분도 형님을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할 거 아닙니까.”

“걔는 그때 내 얼굴도 못 봤어.”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계속 트렁크에 갇혀 있다가 나오자마자 기절했고, 그도 헬멧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병원에 찾아갔을 때도 호랑이 탈을 쓰고 있었고, 누구라고 제대로 말한 것도 아니었다.


“형님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하면 믿겠죠.”

“나보고 그 끔찍한 사건을 하나하나 자세히 문나영한테 설명하라고?”

홍식이는 잘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태혁을 보았다.


“그땐 자랑하듯이 잘만 말했잖아요.”

“그때랑 지금이랑 똑같으면 더 큰 일이지!”

태혁이 버럭 성을 내니 홍식이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태혁은 열이 확 올라서 술이 마시고 싶어졌지만, 내일 수술이 잡혀 있어서 오늘은 술을 마실 수 없었다.

그는 술 대신 물을 잔에 가득 따랐다.


“형님이 말 못 하겠으면 박재수 형사님한테 부탁하세요. 그때 사건 담당 경찰이 말해주면 당연히 믿겠죠.”

홍식이 입에서 또 그 이름이 나오자 물잔을 잡은 그의 손에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그의 울대가 한 번 크게 출렁한 뒤 태혁은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걔가 몰라도 상관없어. 중요한 건 지금이야.”

홍식이는 동의할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형님이 인어공주 되는 거 아닌가요?”

그를 여성화 시키는 홍식이의 말에 태혁은 눈썹이 위로 솟았다.


“인어공주가 왕자를 구해주었는데 왕자는 딴 사람이 구해준 줄 알잖아요. 딱 지금 형님 상황이랑 똑같아요.”

“그래서 그게 뭐?”

“인어공주 결말 모르세요?”

태혁은 갑자기 기분이 아주 나빠졌다.

반대로 홍식이는 좋은 생각이 난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제가 그 아가씨한테 말할까요? 저도 그때 병원에 같이 갔잖아요. 그 돼지가 입었던 하트 옷 벗겨 곰 인형한테 입혀서 선물로 줬잖아요. 그거 말하면 되겠네.”

“그건 그냥 선물을 준 거야. 구해준 게 아니라.”

홍식이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형님이 그 유괴범이랑 싸워서 구해준 게 맞잖아요. 저도 이렇게 아는 걸 어떻게 그 아가씨가 모른 채 살 수 있어요?”

그건 그저 십 대 시절의 그가 영웅 놀이에 빠져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것밖에 안 되었다.

태혁은 물잔을 들어 올리며 쓴 표정을 지었다.


“그때의 난 내 몸 하나 감당하지 못해서 미쳐 날뛰었던 천둥벌거숭이였을 뿐이야.”

그 시절의 자신이 태혁은 자랑스럽지 않았다.

그런데 그 못난 소년이 나영을 구했다.

그가 부모도 없이 태어나 방황하며 살았기에 나영이 죽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 운명을 탓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

이주아는 바로 병원에 소문을 퍼트릴 줄 알았건만 뜻밖에도 조용했다.

그래서 나영은 더 찝찝했다.

분명 이대로 조용히 지나갈 인격자가 아니었기에.


“교수님이 이주아 만났을 때 뭐라고 안 했나요?”

VIP 병실에 다녀온 최태혁 교수에게 물었더니, 그는 짓궂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때는 계획이 다 있는 듯이 굴더니, 사실은 걱정되나 보지?”

설령 그게 진짜라고 해도, 이건 그가 그녀를 놀릴 일이 아니었기에 나영은 그를 흘겨보았다.


“그래서 이게 저만 걱정할 일인가요?”

태혁도 더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기에 바로 웃는 표정으로 바꾸며 그녀에게 살갑게 굴었다.


“지금 우리한테 더 중요한 건 이주아가 아냐.”

당장 이주아가 제일 골치 아픈 폭탄이라고 생각했던 나영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태혁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나영이 전혀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니 태혁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네가 나한테 기회를 달라고 했잖아.”

아!

그제야 그의 말을 깨달은 나영은 입이 벌어졌다.

그녀의 반응을 보고 태혁은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까먹고 있었던 거야?”

나영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주아가 나타난 뒤로 완전히 까먹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말하면 큰일 날 거 같았으니까.


“그럴 리가요. 저 그 기회 어떻게 쓸 건지 이미 다 생각해 뒀어요.”

태혁은 팔짱을 끼며 그녀를 시험해 보듯이 물었다.


“그래? 그럼 첫 번째 기회를 어떻게 쓸 건지 말해 봐.”

“저랑 같이 영화 봐요.”

“…….”

태혁은 한 3초 정도 아무 반응 없이 그녀의 얼굴을 쳐다만 보았다.


“……내 친구가 영화감독인 건 알지?”

“차현 감독님이요? 당연히 알죠.”

대한민국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아는 감독인데 설마 그녀라고 모르겠나.


“난 차현 영화도 영화관에서 끝까지 본 적이 없어.”

“…….”

“항상 깨어나 보면 영화가 끝나 있더라고.”

“그럼 차현 감독님 영화가 재미없었나 보죠.”

태혁은 바로 정색하며 말했다.


“내 친구 영화 욕하지 마.”

영화 보다가 잔 건 자기이면서 왜 그녀한테 뭐라는 건가!

나영은 기가 차서 팔짱을 끼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저랑 같이 영화 보기 싫다고요?”

“내가 영화보다가 자도 상관없으면 나도 좋아.”

영화관 가기도 전에 김새는 말을 하는 그를 나영은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교수님이 제가 정말 좋으면 같이 있을 때 잠이 오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영화관은 어두워서 너 안 보이잖아.”

졌다.

나영은 더 따지기 싫어서 바로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는데 태혁이 물었다.


“그래서 영화는 언제 볼 거야?”

그따위로 말해놓고 영화는 보겠다니.

나영은 됐다고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뱉은 말은 꼭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기에 꾹 참으며 대답했다.


“교수님 수술 없고, 저 당직 아닌 날 밤에 봐요.”

“그럼 내일이네.”

나영은 고개를 돌려 최태혁 교수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네 스케줄 미리 확인하니까. 넌 내 스케줄 모르나 보지?”

할 말이 없어진 나영은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럼 내일 밤 볼 영화 제가 예약할게요.”

“그래. 기대할게.”

영화관에서 잠이나 잘 거라고 사전 예고한 사람치고는 참 희망적인 세련된 말이었다.


“진짜 기대되세요?”

그녀가 의심하며 되묻자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우리 데이트잖아.”

데이트라는 말이 낯간지러워서 심장 위를 개미들이 떼지어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의 마음도 궁금하다는 듯이 나영에게도 물었다.


“너는?”

나영은 문을 열고 나가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저는 교수님 하는 거 봐서 결정할 거예요.”

탁.

그녀가 문을 닫고 떠나자 태혁은 중얼거렸다.


“나야 널 위해 뭐든 하지.”

그의 아버지는 일면식도 없던 일반 시민을 지키다가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아들인 그는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태혁도 궁금했다.

***

이철권 사장은 간암 2기였기에 수술만 잘 끝나면 항암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간암은 재발률이 높은 암에 속해서 안심하기는 일렀다.


“우리 학교에 나에 관해 물어보고 다니는 인간이 있다는데, 혹시 최 교수님이 아는 사람이에요?”

이주아는 확실히 자기 아버지에게 관심이 없는 거 같았다.

아버지 병에 대해서는 한 번도 물은 적 없고, 오로지 그와 힘겨루기만 하고 있었다.


“떳떳하게 살았으면 겁낼 일도 없겠죠.”

“그러는 그쪽은 내가 왜 아직도 입 다물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이주아는 그를 보며 빙글 웃었다.


“문나영에 대해 알아보니까 꽤 재미있는 게 나오더라고요. 문나영 아버지가 태영 건설 전무던데.”

태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주아를 쳐다보았다.

이주아는 그의 얼굴을 구경하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돈 싫어한다면서 결국 만나는 여자도 돈 있는 집안 딸이잖아. 역시 거짓말일 줄 알았어.”

그가 아무 말이 없는 게 기가 죽어서라고 생각한 이주아는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었다.

또각.

이주아가 그한테 한발 다가서며 아량을 베풀 듯이 말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요. 잘 생각해요. 그쪽은 전무 딸, 나는 사장 딸. 답이 딱 나오지 않아요?”

태혁은 이주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게 긍정적인 답변인 줄 알고 이주아의 눈빛이 반짝였다.

태혁은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만약 문나영이 L백화점을 가지고 싶다고 하면 내가 그 백화점 사다가 문나영한테 줄 거예요.”

이주아의 얼굴에 가늘게 경련이 일었다.

L백화점이 구멍가게도 아니고, 그걸 마음대로 산다고 하는 말이 너무 기가 찼다.

분명 그녀를 놀리는 말이 틀림없었다.

이주아는 히스테릭한 눈빛으로 태혁을 노려보며 화를 냈다.


“당신 선을 넘었어.”

“선은 그쪽이 처음부터 넘었고.”

태혁은 이주아에게 경고했다.


“한 번만 더 이러면 당신 아버지한테 수술 다른 병원 가서 받으라고 할 겁니다.”

“우리 아빠 수술해줄 수 있는 의사 당신 말고도 많아!”

“당신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가서 물어보던가.”

이주아가 몸을 돌려 씩씩대며 병실로 걸어갔다.

태혁은 짧게 혀를 차고는 VIP 병동을 떠났다.

그런데 이주아가 나영의 아버지가 누군지까지 알아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별일은 없겠지?

병원에서 퍼질 소문은 그가 몸을 던져서라도 해결할 수 있는데, 나영의 아버지는…….


‘그 일 때문에…… 아버지는 병적으로 절 보호하려 하세요.’

‘문나영 아버지 굉장하지 않냐? 딸을 지키려고 서울중앙지검장을 보디가드로 세우다니.’

솔직히 그도 무섭다.

***

영화는 그녀가 보자고 한 건데, 퇴근 직전에 주치의를 맡은 환자한테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되었다.

병원에서 같이 출발할 수는 없어서 최태혁 교수와는 영화관에서 보기로 했다.

나영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있는 힘껏 뛰었다.

영화는 두 시간이면 충분하니까 평일에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 게 그녀의 오만이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영화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미 영화는 시작되었을 텐데도 영화관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 다른 영화를 보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일 거다.

최태혁 교수는 상영관 출입구 앞 소파에 앉아서 팝콘을 먹고 있었다.

공중으로 높이 던져진 팝콘은 정확히 그의 입으로 들어갔다.

그걸 신기하게 구경하는 아이들까지 그의 곁에 있었다.

나영은 그의 앞까지 뛰어가서 몸을 반으로 꺾으며 사과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헉헉.”

태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괜찮아. 영화 금방 시작했어.”

“네, 얼른 들어가요.”

표를 받는 직원에게 서둘러 걸어가던 나영은 최태혁 교수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걸 알고 고개를 돌렸다.


“왜 안 오세요?”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오늘의 목표는 그냥 영화 보는 게 아니라, 네가 진정한 용기를 내는 거잖아. 그런데 그냥 들어가면 되겠어?”

뭘 어쩌라는 건가 싶었다.

태혁이 비어 있는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용기 있게 사람들 앞에서 손잡기. 자! 어서 잡아.”

나영은 당황해서 열 손가락이 전부 오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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