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17년 전 (43/84)


43화. 17년 전
2023.02.27.



 
기둥 뒤에 숨어서 훔쳐보고 있던 레지던트들은 최태혁 교수가 걸어오자 각자 살길을 찾아서 빠르게 흩어졌다.


“남호진!”

하지만 이 소문을 가장 빨리 퍼다 나른 남호진만은 최태혁 교수한테 딱 걸려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남호진이 겁에 질린 눈으로 돌아보자 태혁은 손가락을 까닥였다.

당장 튀어와.

남호진은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나영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영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가만히 있었다.

남호진은 한 번씩은 제대로 혼이 나야 사고를 덜 치니까.

남호진을 혼낸 뒤 태혁은 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역시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너 이주아가 소문낼 거 안 무서워?”

“갑질하는 VIP 환자 딸 말보다는 그래도 같이 일하는 제 말을 병원 사람들이 더 믿을 거라고 생각해요.”

태혁은 의외라는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방금 제가 이주아 기분 상할 행동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주아가 소문을 내면 저한테 보복하는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겠죠.”

“그러니까 방금 그 행동이 계산된 거였다는 거야?”

날 구해준 게 아니라?

나영은 힐긋 태혁을 돌아보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근무 시간이잖아요. 그럼 전 응급실 가볼게요.”

그대로 떠나버리는 나영의 뒷모습을 보며 태혁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주 많이 감동했는데 말이다.

그래도 나영이 이주아 일로 기죽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었다.

예전보다 좀 강해진 것도 같았다.

그렇다고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태혁은 핸드폰을 꺼내서 홍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홍식아. 너만 믿는다. 뭐든 하나만 찾아와.”

[그런데 형님 여자랑 싸우는 건 아무래도 아닌 거 같아요. 그래도 사나이 체면이 있는데.]

“난 싸우려는 게 아니고 지키려는 거야.”

태혁은 전화에 대고 말하며 나영이 떠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누구든 다치게 하면 절대 용서 안 할 거야.”

[형님 왜 그러세요? 설마 옛날 버릇 나오는 거예요? 이러다 또 경찰서 가겠네.]

홍식이 진정하라며 그를 말렸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내가 구한 아이니까 끝까지 책임져야지.”

[네?]

곰 인형, 박재수 형사, 그리고 17년 전 기사.

모든 게 나영이 그 아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

17년 전.

태혁이 태어나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재수 없는 아이’라는 소리였다.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죽었으니 그런 소리를 들을 만도 했다.

더군다나 유일한 보호자인 할아버지는 돈에 미쳐 있었으니 혼자 남은 손자를 바르게 키울 덕망이 부족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그는 소악마나 마찬가지였다.

전혀 사람 노릇을 못 했다.


“네 아버지는 사람을 지키는 경찰이었는데, 넌 사람을 패서 경찰서에 오냐!”

그런 그를 처음으로 제대로 혼낸 사람이 박재수 형사였다.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파트너였던 경찰.

태혁은 그의 아버지가 경찰이었다는 것도 박재수의 말 때문에 처음 알았다.

그때부터 쌈질하다 경찰서 가는 게 창피한 일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억누를 수 없는 반항기를 다른 쪽으로 풀기 시작했다.

그의 손으로 직접 잡범들을 잡았다.

싸움도 하고, 사회 정의도 실현하고.

훨씬 더 만족스러웠는데 할아버지가 그한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네가 학생이지! 네가 경찰이야! 왜 그딴 놈들을 잡으러 다녀!”

할아버지는 박재수 형사가 그한테 바람을 넣었다며 경찰서까지 쳐들어가서 난리를 피웠다.

태혁은 그런 할아버지가 쪽팔려서 처음으로 가출을 했다.

집 나온 그를 다시 집에 데리고 간 것도 박재수 형사였다.


“할아버지는 네가 네 아버지처럼 될까 봐 무서워서 그러시는 거야.”

하지만 태혁은 할아버지를 위해 얌전히 공부만 하며 살 수는 없었다.

그럼 진짜 그가 답답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날은 학교를 땡땡이치고 오토바이를 타서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

피 끓는 17세한테 서울은 너무 좁게 느껴져서 이대로 쭉 부산까지 질주하기로 마음먹었는데.

탁 탁.

무언가 둔탁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태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로 한복판에 온통 차뿐이었기에 소리가 날 곳은 딱히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또 소리가 들렸다.

탁 탁.

그건 꽤 가까이서 들리는 소리라 태혁은 옆에 세워진 검은색 SUV를 보았다.

선팅을 과하게 해서 차 창문을 통해 안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 차에서 나는 소리야?’

태혁은 가만히 차를 응시하였다.

신호등의 불이 주황에서 초록으로 바뀌는 순간 다시 소리가 들렸다.

탁 탁.

그 소리는 차의 좌석이 아니라 차의 트렁크 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태혁이 탄 오토바이도 바로 그 뒤를 따라 달려 나갔다.

부아아아앙.

차의 옆으로 오토바이를 몰고 가 운전석 쪽을 쳐다보며 태혁은 외쳤다.


“이봐요! 트렁크에 뭐 넣었어요?”

바로 SUV는 속도를 높이며 앞서 나갔다.


‘이것 봐라.’

태혁은 부산 대신 저 차를 끝까지 쫓아가기로 했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그는 작은 일에도 죽자고 달려드는 피 끓는 17세였으니까.

그래서 저 차의 트렁크 안을 꼭 봐야 직성이 풀릴 듯했다.

***

서울을 벗어나 인적이 끊긴 시골 비포장길에서 SUV가 처음으로 섰다.

운전석에서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내려서며 그에게 거칠게 화를 냈다.


“너 왜 계속 쫓아와!”

설마 오토바이 탄 꼴통이 이렇게 집요하게 쫓아올 줄은 예상 못 했나 보다.

태혁은 오토바이에 앉은 채 턱으로 차 트렁크를 가리켰다.


“트렁크 안 좀 봅시다.”

탁.

트렁크 좀 보자고 했을 뿐인데 남자는 품에서 칼을 뽑아서 그를 겨누었다.


“죽기 싫으면 당장 꺼져.”

태혁은 차만 보고 나쁜 놈을 잡아낸 자신의 촉에 감탄했다.

거의 천재였다.

아니, 이 정도면 초능력이다.

태혁은 칼 든 나쁜 놈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한번 와서 죽여봐요.”

그 순간 그의 인생이 꼭 한 편의 액션 영화처럼 느껴졌다.

그런 정신상태로 살고 있었으니 할아버지가 그 때문에 화병 나실 만했다.

***

그가 학교 땡땡이친 걸로 벌을 받고 있을 때 박재수 형사가 학교로 찾아왔다.


“어쨌든 네 덕에 여자아이가 무사했다.”

한 번만 더 그가 경찰 흉내 내면 박재수 형사에게 책임을 물어서 옷을 벗게 하겠다고 할아버지가 으름장을 놓았기에 태혁은 박재수 형사에게 전화해서 유괴 사건에 대해 알리고 그는 바로 사건 현장에서 빠져나왔다.

유괴될 뻔한 아이의 가족들은 아이를 구한 게 경찰인 줄 알고 있을 거다.


“그런 초짜 유괴범 별거 아니던데요.”

너스레를 떠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던 박재수 형사는 한마디 했다.


“너는 한 번도 피해자에 대해서는 안 묻는구나.”

태혁은 잘못을 지적당한 거 같아서 바로 목소리가 불퉁해졌다.


“방금 무사하다면서요.”

“그래, 진짜 유괴당했으면 죽었을 텐데, 안 죽었으니까 무사한 거지.”

트렁크에 갇혀 있던 작은 여자아이가 죽을 뻔했다는 말에 태혁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아이는 헬멧을 쓴 그가 나쁜 놈인 줄 알았는지,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풀어준 그를 보자마자 그대로 기절했다.


“충격이 컸는지 실어증이 왔어. 그래서 안정을 찾을 때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할 거야.”

태혁은 흠칫 놀랐다.


“말을 못 한다고요?”

설마 내 탓도 있는 건가.

그는 박재수 형사의 말대로 피해자들을 위해 나쁜 놈을 잡은 게 아니었다.

그저 그가 영웅이 된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나쁜 놈을 잡은 것이었다.

태혁은 자신이 영웅 놀이에 빠져서 아이한테 제대로 신경을 못 써준 게 그제야 죄책감이 들었다.

교실로 돌아간 태혁은 차현을 붙잡고 물었다.


“어린 여자아이한테는 뭘 선물해 줘야 좋아하냐?”

차현은 시나리오를 계속 쓰며 대충 대답했다.


“귀여운 인형.”

“공룡 같은 거?”

그제야 차현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곰 인형으로 사. 목에 하트 목걸이 같은 거 있으면 더 좋아.”

다음 날 태혁은 홍식이를 데리고 인형을 파는 가게로 갔다.


“목에 하트 목걸이 있는 곰 인형을 찾아.”

홍식이는 열심히 찾다가 난감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하트 목걸이 한 곰 인형은 없는데요.”

대신 하트 그림 그려진 옷을 입고 있는 돼지 인형이 있었다.

그래서 태혁은 돼지 인형과 곰 인형을 같이 사서 돼지 인형의 하트 옷을 곰 인형에게 입혔다.


“그런데 형님 이걸 꼭 저까지 해야 합니까?”

홍식이는 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태혁은 눈에 힘을 주며 홍식에게 강요했다.


“나 혼자 하면 쪽팔리잖아.”

17세는 창피한 게 세계 종말보다 더 재앙이었다.

***

아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 VIP 병실까지 가는 동안 참 많은 사람이 그와 홍식이를 구경하였다.

아이들은 손가락질하며 두 사람의 뒤를 쫓아오기도 했다.

그들이 오늘 유독 튀기는 했다.

차현이 여자아이한테는 무조건 귀여운 게 좋다고 해서 태혁이 생각해 낸 것이었다.


“태혁이냐?”

아이가 입원한 VIP 병실 앞에 있던 박재수 형사는 인형 탈을 쓰고 나타난 두 사람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태혁은 잔말 말고 병실 문이나 열라며 박재수 형사를 재촉했다.

그는 후딱 해치우고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박재수 형사가 병실 문을 열어주자 태혁은 곰돌이 탈을 쓴 홍식이의 등을 밀어 먼저 들어가게 했다.

홍식이가 넘어질 듯 구르며 병실 안으로 들어가고 호랑이 탈을 쓴 태혁이 그 뒤를 어슬렁어슬렁 따라 들어갔다.

병실 침대에 누워 있던 아이가 깜짝 놀라 그들을 쳐다보았다.

홍식이 곰 발바닥을 낀 두 손을 두드리며 아이를 칭찬했다.


“와아! 너 정말 예쁘구나. 혹시 천사니?”

하기 싫다고 한 놈이 더 잘하고 있었다.

태혁은 아이에게 아부를 떨고 있는 곰돌이 홍식이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았다.

홍식이의 말대로 아이는 정말 예뻤다.

커다란 눈망울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인형 가게에서 보았던 인형보다도 더 인형 같았다.

그래서 그날 아이가 얼마나 겁에 질렸었는지 태혁은 그제야 깨달았다.

실어증에 걸렸다는 아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곰돌이와 호랑이를 쳐다만 보았다.

그래도 인형이라서 낯선 사람을 보듯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호랑이 탈을 쓴 태혁이 아이에게 손을 내밀며 처음으로 말했다.


“어흥. 나는 정의로운 호랑이야. 어서 인사해야지.”

홍식이 곰 발바닥으로 그의 어깨를 때리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어쩌냐고 나무랐다.

태혁이 곰돌이 탈을 손으로 때려서 목이 돌아가게 하자 홍식이는 앞이 안 보여서 버둥거렸다.

그 사이 태혁은 손에 들고 있던 곰 인형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란다.”

병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아이의 행동을 주시했다.

아이가 이 인형을 받으면 그래도 호전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이었기에.

아이는 가만히 곰 인형을 쳐다만 보았다.

태혁은 몸을 앞으로 숙이며 곰 인형을 아이에게 좀 더 가까이 가져갔다.


“받아주라. 나 안 무서운 사람이야. 아니, 호랑이야.”

아이가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동자로 한 번 그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곰 인형에 손을 뻗었다.
 

 
17년 뒤, 나영의 방에서 하트 무늬 옷 입은 곰 인형을 보았을 때 태혁은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한테는 까맣게 잊힌 기억이었기에.

그래서 나영의 유괴 기사를 보았을 때 더 괴로웠다.

그녀의 인생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그 사건을 그는 그리 쉽게 잊어버렸다는 게.

그가 영웅의 자격이 부족해서인가 보다.

결국 박재수 형사가 죽어서 그가 그녀를 구해주었다는 걸 증명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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