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교수님을 구한 레지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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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교수님을 구한 레지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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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교수님을 구한 레지던트
2023.02.24.
그러고 보니 윤이나가 은별을 이용해 그녀를 모함하려고 했을 때도 최태혁 교수가 구해주었다.
아마 그때의 일을 말하는 듯했다.
그녀가 웃기만 하고 커피를 안 마시자 태혁이 권했다.
“마셔 봐.”
“마시면 하트 망가지잖아요.”
그녀의 말이 귀여워서 태혁도 쿡 웃고 말았다.
“그럼 내가 또 그려주면 되지.”
그래도 나영은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
“전 이게 좋아요.”
그가 처음으로 만들어준 하트가 너무 예쁘고 따뜻했다.
그래서 아주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그거 다 마시기 전까지는 이 집에서 못 나가.”
그의 경고에 나영은 짧게 눈썹을 찌푸렸다.
“난 씻고 올 테니까 천천히 마셔.”
클럽에서 묻히고 온 담배 냄새가 거슬려서 태혁은 욕실로 향했다.
그가 없는 동안 나영은 핸드폰을 꺼내 커피잔 속 하트를 사진으로 찍었다.
여러 장 찍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먹기 아까웠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태혁이 사라진 문 쪽을 보았다.
“분명 차현 감독한테 배웠을 거야.”
아무래도 이런 낭만적인 일이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빠르게 씻은 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거실로 나온 태혁은 그녀가 여전히 커피를 한 모금도 안 마신 걸 알고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그냥 이 집에서 살기로 한 거야?”
“저 이제 집에 갈 거예요.”
그녀가 바로 떠나려고 하자 태혁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이 정도 말에 그리 놀래.”
“깍! 머리 만지지 마세요. 헝클어지잖아요.”
나영은 당황하며 그의 손을 피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머리에서 내려오자마자 바로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고는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그와 가까워졌다.
“난 만지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데.”
그가 씻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상쾌한 샴푸 냄새가 후각을 점령했다.
계속 그 향기를 맡고 있으려니 취하는 기분이었다.
“교수님 샴푸 뭐 쓰세요?”
그녀의 입에서 생각도 못 한 질문이 나오자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휘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
“향이 좋아서요. 남동생한테 입대 선물로 주려고.”
나영은 대답하고 나니 부끄러워져서 그의 눈을 피해 내리깔았다.
도자기 인형처럼 아기자기한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흐르던 그의 시선이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서 멈추었다.
그녀의 입술은 부드러운 꽃잎처럼 탐스러워 보였다.
“그럼 치약은 뭐 쓰는지 안 궁금해?”
“네?”
그녀가 시선을 들어 그를 보는 순간 태혁은 바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놀란 나영이 뒤로 물러나려고 하자 태혁은 그녀가 그한테서 벗어나지 못하게 목덜미를 감싼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고개를 틀며 더 깊이 키스하자 짓눌린 입술 사이에서 더운 숨결이 흘러나왔다.
숨을 참느라 제대로 호흡하지 못한 나영의 하얀 얼굴은 금세 붉게 피어올랐다.
아랫입술을 베어 물고 떨어질 거 같던 입술은 다시 더 깊게 파고들었다.
나영은 손으로 그의 어깨를 움켜잡고 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안까지 파고들어 오는 뜨거움에 속수무책으로 데여서 눈가에 눈물까지 고였다.
한참 만에야 입술을 뗀 태혁은 그녀의 눈망울을 채운 물기를 보고 눈을 좁혔다.
“내가 지금 울린 거야?”
나영은 민망해서 바로 손으로 눈을 비볐다.
이건 울려고 한 게 아니라 생리적인 현상이었다.
아무래도 빨리 이 집을 떠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나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집에 갈 거예요.”
“안 돼. 아직 커피 다 안 마셨잖아.”
그가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커피 타령을 하자 나영은 두 손으로 커피잔을 잡고 들어 올려 원샷하듯이 마셨다.
탁.
태혁은 빈 잔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아까는 아까워서 못 마시더니.”
정말 아깝긴 했지만, 커피를 물건처럼 평생 간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마시는 게 맞았다.
나영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며 웃었다.
“다 마셨으니 전 갈게요.”
태혁은 그녀를 더 붙잡고 싶었지만, 명분이 없었다.
좋아하니까 같이 있자고 말해봤자 그녀는 그를 도둑놈처럼 볼 게 뻔했다.
연애를 하면서 군자처럼 구는 건 참 못할 짓이었다.
***
탁 탁 탁.
병원 복도를 달려가는 남호진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무언가 큰일이 벌어진 듯 보였다.
의국 문을 박차고 들어간 남호진은 병원이 떠나갈 듯이 외쳤다.
“지금 독사가 카페테리아에서 웬 여자랑 커피 마시고 있어!”
의국에 있던 의사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정말이야?”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그것도 어리고 예쁜 여자야.”
레지던트들은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떼를 지어 의국을 나왔다.
복도를 걸어오던 나영은 우르르 몰려오는 그들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 생겼어요?”
김영미가 그녀를 지나쳐 가며 빠르게 알려주었다.
“독사가 카페테리아에서 여자랑 있대서 구경 가.”
환자인 줄 알았는데, 최태혁 교수 일이라는 말에 나영은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그녀를 두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거라면 이렇게 병원에서 대놓고 만날 리가 없었다.
나영은 짐작 가는 사람이 있어서 카페테리아로 우르르 몰려가는 레지던트들의 뒤를 쫓아서 갔다.
“봐! 내 말이 맞지?”
카페테리아와 좀 떨어진 거리에 숨어서 보며 남호진이 득의양양하게 자랑했다.
“저 여자 VIP 병실 환자 딸이잖아.”
“뭐야. 그냥 환자 가족이랑 이야기 중인 거네.”
사람들이 그럼 그렇지 하고 김샜다는 반응을 보일 때 남호진은 단호하게 주장했다.
“거기 비서랑 부인도 있는데, 왜 굳이 딸만 따로 만나서 이야기하냐고. 저게 정말 안 수상해?”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런 거 같아서 레지던트들은 다시 훔쳐보는 자세로 돌아갔다.
최태혁 교수는 다리를 꼬고 몸을 거의 반대편으로 틀어서 다른 곳을 보고 있었고, 여자만 빤히 최태혁 교수를 보며 이야기 중이었다.
“저 여자 L백화점 상속녀야.”
“대박. 독사가 저 여자랑 결혼하면 재벌 사위 되는 거네. 역시 독사도 돈 앞에서 약해지는구나.”
“지금도 독사 기운이 뻗치는데, 재벌 사위 되면 얼마나 더하겠어. 저 선남선녀의 투 샷에서 불행한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레지던트들은 교수님의 사생활을 훔쳐보며 열심히 씹어대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들을 지나쳐 용감하게 최태혁 교수와 백화점 상속녀에게 다가가는 용자가 있었다.
다들 기겁해서 말렸다.
“문나영! 가지 마!”
“당장 돌아와!”
“지금 독사한테 가면 너 죽어!”
다들 말렸지만 나영은 개의치 않고 단정한 걸음으로 카페테리아로 걸어갔다.
***
고분고분하게 살아본 적이 없는 태혁은 지금 딱 죽을 맛이었다.
이 불효녀의 말대로 해야만 하는 이 상황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에게 이주아가 한마디 했다.
“좀 웃어요.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으면 커피 맛이 떨어지잖아요.”
웃어보라니. 누굴 광대로 아나.
그녀의 말에 그의 반항아 기질은 10배씩 증가하고 있었다.
이러다 못 참으면 어느 순간 폭발할지도 몰랐다.
그 전에 이주아의 약점을 반드시 찾아내야만 했다.
이렇게 성격이 오만하고 갑질만 해대는데, 그동안 착하게 살아왔을 리가 없다.
클럽에서는 수확이 없었지만, 홍식에게 이주아가 다니는 대학교에 가보라고 했으니, 분명 좋은 소식이 있을 거다.
“그냥 커피나 마셔요. 이게 내 한계니까.”
태혁은 이주아의 얼굴은 쳐다도 보지 않고 사람들만 구경하였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한정판 명품 같은 남자의 수려한 옆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주아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손 위에 턱을 올렸다.
“내가 남자를 많이 만나봐서 잘 아는데요.”
나이가 몇 살이나 되었다고 아는 척인가 싶어 태혁은 그녀의 말이 가소로웠다.
“당신같이 까칠한 남자도 결국 돈 앞에서는 순해지더라고요.”
태혁은 그녀의 단정이 가장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거야말로 그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돈입니다.”
“거짓말.”
태혁은 태어나 처음으로 먼저 할아버지에게 전화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기 전에 뜻밖의 사람이 등장했다.
태혁은 이쪽으로 걸어오는 나영을 발견하고 바로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똑바로 앉았다.
이주아도 나영을 똑똑히 기억하기에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았다.
우뚝.
나영은 두 사람 앞에서 멈추어 서서 이주아를 보며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이주아는 느긋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게요.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태혁은 두 여자가 인사하는 모습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처음 느껴보는 싸늘한 공포감이 그를 휘어 감았다.
“아직 근무 시간이 안 끝나서 지금 제가 최태혁 교수님을 좀 데려가야겠습니다.”
“안 되는데, 최 교수님은 나랑 같이 커피 마시기로 했어요. 그렇죠?”
이주아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동의를 구했다.
여기서 싫다고 하면 뒷감당은 알아서 하라는 눈빛이었다.
태혁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는 나영을 위해서 이주아의 제멋대로인 행동을 참고 있던 건데, 나영이 나타나서 이 자리를 직접 깽판치고 있었으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난…….”
그가 대답을 머뭇거리며 나영을 쳐다보자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확실하게 말했다.
“저랑 같이 가세요.”
태혁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그는 당연히 그녀가 소문을 막는 쪽을 선택할 줄 알았다.
최악의 경우에는 그 소문을 피하려고 그와 끝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소문에서 자신을 지키는 쪽이 아니라 그를 선택했다.
드르륵.
태혁은 의자에서 일어나 나영의 앞에 섰다.
몸과 몸의 거리는 이전과 똑같았지만, 마주 보는 눈빛에서 마음은 훨씬 가까워진 듯했다.
이주아가 두 사람의 모습을 고까운 눈으로 보며 경고했다.
“두 사람 이대로 가면 내 입이 조용히 있지 않을 텐데.”
하지만 둘 다 더 이상 이주아를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태혁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동화로 치면 네가 마녀에게 잡힌 왕자님을 구한 거네.”
나영은 바로 부정했다.
“레지던트가 농땡이 부리는 교수님 잡으러 온 거죠.”
뭐든 이 순간 태혁은 행복했다. 더할 나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