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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내 마음이 느껴져? (41/84)


41화. 내 마음이 느껴져?
2023.02.20.



 
태혁은 나영을 먼저 보내놓고 이철권의 딸을 노려보며 차갑게 경고했다.


“오늘 본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요.”

그녀는 싱글 웃으며 오히려 그의 신경을 긁는 말을 했다.


“지금 나한테 약점 잡힌 거 맞죠?”

태혁은 그녀의 태도를 용납할 수 없어서 강하게 말했다.


“지금 당신 아버지가 암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당신 아버지 수술해 줄 의사인 나한테 이런 식으로 구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까?”

“그래서 우리 아빠 살릴 자신 없어요?”

태혁은 환자 가족 앞에서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당연히 살릴 거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이 불효녀는 바로 그의 약점을 잡았다고 득의양양할 게 분명했다.

태혁은 몸을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쉰 뒤에 묵직한 목소리로 불효녀에게 물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이 여자가 입을 함부로 놀려 병원에 소문이라도 나면 제일 힘들 사람은 나영일 게 뻔했다.

그래서 태혁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

나영은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최태혁 교수는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나영도 알았다.

나영은 조심스럽게 치프에게 VIP 병실에 입원한 이철권 가족에 관해 물었다.


“그 딸이 최태혁 교수님 앞에 두고 대놓고 잘생겨서 마음에 든다고 말했어. 암 걸린 아버지 옆에서 그러는 게 정상처럼 보이지는 않더라. 성격이 좀 제멋대로인 거 같아. 뭐, 우리 교수님 성격이 더 만만치 않기는 하지만 말이야. 하하.”

동건은 웃으면서 독사 성격이 최고라고 칭찬 아닌 거 같은 칭찬을 하며 마무리 지었다.

나영은 같이 웃을 수가 없었다.

최태혁 교수를 그 여자와 둘만 남겨두고 혼자 와 버린 게 이제야 후회가 되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녀가 무얼 할 수 있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만약 진짜 최태혁 교수와 그녀의 사이가 소문이 나면…….


“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기 이철권 딸이야.”

동건의 말을 듣고 나영은 심장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정말 연구실에서 마주쳤던 그 여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나영의 앞까지 걸어와 멈추어 서며 먼저 인사했다.


“우리 구면이죠?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난 VIP 병실에 입원한 L백화점 사장 딸 이주아라고 해요.”

이주아는 자기소개를 당당하게 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영은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동건은 불안한 눈으로 나영과 이주아를 번갈아 보았다.

꼭 무슨 일이 당장 터질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불안함이 두 여자 사이에서 퍼지고 있었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이주아는 씨익 웃었다.

이주아는 악수하기 위해 내밀었던 손을 위로 올려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잡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최 선생님이랑 이야기 잘 끝냈으니까. 그 이야기를 나보고 직접 당신한테 전하라고 하더라고요.”

손을 떼며 뒤로 물러난 이주아는 머리를 가볍게 까닥였다.


“그럼 또 봐요.”

이주아가 몸을 돌려 걸어가자 동건은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저 여자가 귓속말로 뭐라고 한 거야?”

나영은 손을 꽉 주먹 쥐었다.

그녀가 설령 정말 소문을 내지 않는다고 해도, 이주아가 착한 사람일 거라는 기대감은 단 1%도 없었다.

***

그날 나영은 퇴근하고 처음으로 먼저 최태혁 교수가 사는 집으로 찾아갔다.

그와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야 할 거 같았으니까.

최태혁 교수와 이야기가 잘 되었다는 이주아의 말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도대체 그가 이주아한테 무얼 약속한 건지 나영도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딩동.

초인종을 누르고 나영은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최태혁 교수가 병원에서 퇴근한 걸 알기에 당연히 집에 있을 줄 알았는데, 1분이 지나도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영은 핸드폰을 꺼내 최태혁 교수한테 전화를 걸었다.

Rrrrrrrrr Rrrrrrrrr-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서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최태혁 교수가 전화까지 안 받자 나영은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서 차현 감독한테도 전화를 걸었다.

만약 그가 병원 근무 끝내고 누군가를 만나러 갔다면 그건 차현 감독일 테니까.


[여보세요.]

차현이 전화를 받자 나영은 바로 물었다.


“혹시 최태혁 교수님이랑 같이 계세요?”

[아니, 나 지금 촬영장인데.]

차현이 최태혁 교수와 함께 있지 않다는 말에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요? 태혁이가 행방불명이에요?]

“네. 집에도 없고, 전화도 안 받아요.”

[설마 둘이 싸웠나?]

“아뇨.”

[그럼 설마 태혁이가 바람이라도 피울까 봐 찾는 거예요?]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차현이 지적한 순간 정말 불안함이 몰려왔다.

나영은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쉽지 않네요.”

이제 겨우 그와의 관계를 발전시킬 용기를 내려고 했는데, 그러자마자 이런 불안한 일이 생기니 나영은 자신감이 급격히 떨어졌다.


[쉽지 않은 만큼 얻었을 때 더 기쁜 거예요.]

차현의 말은 분명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걸 할 수 있는지는 오로지 그녀한테 달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차현은 보지 않아도 그녀의 상태를 느끼고 나영의 관심을 끌기 위해 먼저 물었다.


[태혁이가 왜 의사 일을 열심히 하는지 알아요?]

“그야 능력이 있어서.”

[설마 처음부터 그랬겠어요. 태혁이는 죽다 살아나서 자신의 진로를 정했어요. 의대에 가기로. 그래서 그 길이 얼마나 값진 건지 아는 거예요.]

나영은 숙였던 몸을 바로 세웠다.

처음 들어보는 최태혁 교수의 이야기에 그녀의 마음이 일렁였다.


[시련은 두려워하면 두려워한 만큼 비겁해지기 쉽고, 이겨내려고 하면 이겨낸 만큼 성장할 거예요. 그래서 내가 만드는 영화에는 반드시 시련이 있어요. 시련이 없는 이야기는 너무 밋밋하거든요.]

나영은 조용히 차현 감독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의 말은 단지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한 말이 아니라 그녀의 인생을 전부 관통하고 있었다.

시련은 그저 불행의 씨앗이 아니라 마음먹기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말이 그녀의 마음을 두드렸다.

나영은 자신이 용감해져야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더 깨달았다.

그래야만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었다. 피해자라는 딱지를 떼고.

차현과의 전화를 끊고, 나영은 그 집 앞에서 계속 최태혁 교수를 기다리기로 했다.

우선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히 해내다 보면 언젠가는 그녀가 정말 용감한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랐다.

***

띵.

태혁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나영은 여전히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기다린 시간이 꽤 되어서 나영은 쭈그려 앉아 잠이 들어 있었다.

태혁은 그녀의 앞에서 몸을 낮추고 어깨를 흔들어 깨었다.


“문나영. 일어나.”

몇 번이나 그녀의 이름을 부른 뒤에야 나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앞에 있는 그를 보고 나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주아랑 무슨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주아가 누군데?”

그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반응을 보이며 얼렁뚱땅 넘기자 나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갑자기 일어나니 머리가 핑 돌며 시야가 하얗게 변해서 나영은 몸이 휘청했다.

태혁은 바로 그녀를 한쪽 팔로 안고 다른 손으로 도어락 비번을 풀어서 문을 열었다.


“우선 들어가자.”

시야가 밝아지며 처음 와 보는 그의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집 안은 필요한 것만 갖추어져 있고 쓸데없는 잡동사니는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끼리만 살면 지저분할 거라는 편견을 완벽하게 깨주는 집이었다.

나영은 그의 팔에서 벗어나 거실로 걸어 들어갔다.


“앉아 있어. 커피 줄게.”

태혁이 부엌으로 향하자 나영은 고개를 돌려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제 전화는 왜 안 받으셨어요?”

“시끄러워서 못 들었어.”

“어디 계셨는데요?”

태혁이 캡슐을 커피머신에 넣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클럽.”

그와 그녀가 처음 만난 곳도 클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날 이후 클럽 근처에는 발걸음도 안 했기에, 그가 거길 또 갔다는 말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혼자 가셨어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그녀의 질문에 태혁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었다.

나영은 긴장한 눈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이스? 아니면 뜨거운 거?”

그의 말에 나영은 바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거나 주세요.”

나영은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사실 오늘 그가 진짜 이주아와 클럽에 갔어도 그녀는 그를 타박할 수가 없었다.

분명 그녀와의 소문을 막기 위해서 이주아한테 끌려다니는 거니까.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그녀의 탓이라고 할 수 있다.

나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다 알면서도 이걸 그냥 참기만 하면 그녀는 이전과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차현이 말했다.

시련을 두려워하면 두려워한 만큼 비겁해지기 쉽다고.

나영은 비겁해지고 싶지 않았다.


“다 됐어. 와서 마셔.”

그녀는 아직 마음의 정리가 다 되지 않았는데 태혁이 커피가 완성되었다며 그녀를 불렀다.

나영은 몸을 돌려 그가 있는 주방 쪽으로 향했다.

태혁은 아일랜드 테이블에 커피 한 잔을 올려놓고 그녀가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테이블 앞까지 걸어가자 태혁은 커피잔을 그녀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저 커피 마시기 전에 할 말이…….”

나직이 말하며 커피잔을 두 손으로 잡던 나영은 커피잔 안을 보고 놀라서 눈이 커졌다.

커피잔 안에 우유 거품으로 만든 하트가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자 최태혁 교수는 씨익 웃으며 자랑했다.


“어때? 커피에서 내 마음이 느껴져?”

 

 
나영은 갑자기 서러움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주아랑 클럽 가놓고 이걸로 절 위로한다고요?”

원망이 섞인 그녀의 말에 태혁은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부터 왜 자꾸 이주아를 찾아? 클럽은 홍식이랑 갔는데.”

그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나오자 나영은 잠시 얼이 빠졌다.


“홍식이?”

“그래, 내가 몇 번 말했잖아. 기억 안 나?”

당연히 기억났다.

벚꽃 꺾어다 준 홍식이, 황 여사님 병원에 모시고 온 홍식이.


“왜 홍식이랑 클럽에 가요?”

아직 만난 적도 없는 홍식이에 대한 그녀의 이미지가 확 나빠졌다.


“VIP 환자 딸이 거기 자주 간다고 해서. 내가 약점 찾으러 갔지.”

이주아가 그들의 약점을 쥐었으니, 그도 이주아의 약점을 찾으러 갔다는 말에 나영은 눈만 깜빡였다.

태혁의 손이 뻗어와 그녀의 뺨을 감싸 안았다.


“내가 이번에도 너를 꼭 지켜줄게. 안심해.”

이번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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