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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쉽게 벗어날 수 없는 (40/84)


40화. 쉽게 벗어날 수 없는
2023.02.17.


태혁은 바로 몸을 세우고 눈에 힘을 주며 그녀를 보았다.


“누가 감히 날 닮아? 그건 그쪽이 짝퉁이야! 내가 아니라!”

그가 짝퉁 사기라도 당한 사람처럼 심하게 열을 내자 나영은 놀라서 굳어 버렸다.


“누구야? 어떤 놈 말하는 거야?”

그가 따져 묻자 나영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그가 계속 취조하듯이 몇 번이나 확인해서 나영은 아예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아무래도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를 구해주었던 오빠랑 뒷모습이 닮아서 끌렸다는 말은 절대 하면 안 될 거 같았다.

최태혁 교수가 이번에도 끝까지 찾아내서 그 오빠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그녀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꼴이 될 테니까.

***

태혁은 당직인 나영을 병원으로 데려다준 뒤 차현을 만나러 갔다.

차현은 갑자기 찾아와 술을 마시자는 그와 기꺼이 같이 술을 마셔 주었다.


“네가 문나영 과거 알아봐 달라고 했잖아.”

술잔을 기울이던 태혁이 고개를 돌려 차현을 보았다.


“알아냈어?”

차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에도 실렸더라고.”

차현이 핸드폰으로 찾아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 T 건설회사 상무 딸 유괴사건 >

유괴라는 말이 태혁의 눈동자에 가시처럼 박혔다.

왜 가족 전체가 이 일로 고통받았다고 나영이 말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만약 오늘 박길상과 함께 있었을 때 나영이 과거의 경험을 떠올렸다면 그녀는 정말 끔찍한 시간을 보냈을 거다.

기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태혁에게 차현이 더 설명해 주었다.


“알아보니까 이 사건 마포 경찰서 박재수 형사님이 있던 팀 담당이더라. 너 그 형사랑 아직도 연락해? 그럼 직접 물어봐봐. 기사보다는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거야.”

태혁은 눈가가 뜨거워졌다.

어째서 15년 동안 그의 인생에서 등장한 적 없던 이 이름이 오늘 이리 자꾸 등장하는 건가 싶었다.

마치 그가 몰인정해서 그의 죽음조차 몰랐다고 죽은 박재수가 꾸짖는 거 같아서 태혁은 심장이 아팠다.


“이젠 연락 못 해.”

태혁은 무겁게 대답한 뒤 술잔에 남은 술을 단번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의 인생이 어긋나는 것을 막아주었던 사람이 죽은 걸 알게 된 날이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준 사람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알게 된 날이었다.

맨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었다.

***

한강대학교 병원으로 돌아온 나영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액정이 깨진 핸드폰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전원이 켜지기는 했다.


“넌 겁도 없이 그 조폭 환자를 쫓아가면 어떡해. 그러다 큰일이라도 당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승희는 그녀의 행동을 나무랐다.


“당장 수술받아야 할 환자라서 다른 거 생각할 틈이 없었어.”

그녀가 택시에 같이 타지 않았다면 환자는 결국 인천공항 가는 길에 큰일이 났을 거다.


“그래도 난 이번에 최태혁 교수 다시 봤다. 자기 레지던트가 위험한 환자랑 사라졌다고 하니까 바로 병원 뛰쳐나가서 너 찾았잖아. 완전 멋있어.”

승희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최태혁 교수를 칭찬했다.

나영은 눈치를 보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데?”

“뭐라고 하긴. 최태혁 교수님한테 드디어 인간미가 생겼다고 하지. 핸드폰 새로 살 거야?”

“아! 아니. 켜지니까 그냥 쓰려고.”

아무래도 이번이 처음이라 다들 깊게 의심은 안 하는 거 같았다.

그런데 이런 일이 또 생기면 그땐 두 사람 사이를 눈치채는 사람이 나올 게 분명했다.

앞으로 특히 더 조심해야 했다.

나영은 최태혁 교수가 좋아졌어도, 그와의 사이를 병원 사람들에게는 죽어도 들키기 싫었다.

그건 상상만으로도 오싹했다.

그런데 최태혁 교수한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기분 상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나영은 고민하게 되었다.

예전이었다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이 그냥 말했을 거다.

안전한 그녀의 생활이 가장 먼저였으니까.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이 신경 쓰였다.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다고 생각하며 나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야! 역시 독사는 독사야. 어제 일로 여자들이 독사가 인간이 된 줄 알고 커피와 간식을 사다 바쳤는데 바로 쓸데없는 데 돈과 시간을 쓴다고 혼냈잖아.”

“쓸데없는 거 맞긴 하네. 최 교수는 문나영 찾으러 간 건데, 왜 자기들이 먹을 걸 사다 바쳐. 사가도 문나영이 해야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몰리자 나영은 얼굴 근육이 마비되는 걸 느끼며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저도 욕먹기 싫어요.”

그녀의 태도에 모두 그럴 줄 알았다면서 쑥덕였다.


“한쪽은 독사, 한쪽은 얼음공주니 저 둘이 딱 천생연분 같지 않아?”

“그러니까 더 잘 될 턱이 없지. 저 둘이 잘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하긴. 독사가 여자랑 잘되는 꼴을 보는 것보다 내가 전문의 되는 게 더 빠르겠다.”

나영은 조용히 일어나서 그 자리에서 도망쳐 나왔다.

심장이 브레이크 고장 난 듯이 뛰어대는 게 이 비밀을 지키다가 조만간 부정맥 올 거 같았다.


 

***

병원도 돈과 인맥이 있어야 운영되는 곳이었기에 VIP병실에 환자가 입원하면 더 신경을 써서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VIP 병실에 입원한 환자는 L백화점 사장인데 간암 판정을 받아 간 절제술을 받아야 했다.

태혁과 함께 VIP 병실로 향하던 박 과장이 그의 몸에서 나는 술 냄새를 맡고 얼굴을 찌푸렸다.


“도대체 어제 술을 얼마나 마셨기에 아직도 술 냄새가 진동하는 거야? 외과 의사라는 놈이. 쯧쯧.”

외과 의사로서 실격인 태도였지만, 태혁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럼 오늘은 그냥 연차 쓰고 쉬겠습니다.”

지금 바로 VIP 환자 만나러 가야 하는데, 그가 쉬겠다고 말하며 발을 빼려고 하자 박 과장은 눈에 흰자가 많이 보이게 뜨며 야단을 쳤다.


“헛소리 말고 VIP 병실에서 저쪽이 싸가지없이 굴어도 무조건 참아.”

VIP를 상대할 때 VIP보다 더 골치 아픈 건 어디로 튈지 모를 최태혁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박 과장도 같이 온 거였다.

의사 최태혁의 의술은 믿어 의심치 않지만, 인간 최태혁의 인성은 절대 믿을 수 없었기에.

태혁도 VIP 환자가 제일 짜증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병원에 치료받으러 온 게 아니라 서비스받으러 온 것처럼 구니까.


“네가 윤이나 반만 해도 내가 이렇게 걱정은 안 한다.”

“그럼 윤이나보고 간 절제술까지 하라고 하세요.”

“나도 그러고 싶어!”

박 과장은 마지막으로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고는 VIP 병실 문을 열었다.

병실에는 환자복은 입은 백화점 사장 이철권과 그의 비서, 아내 그리고 20대로 보이는 딸이 함께 있었다.

박 과장은 환자인 이철권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이 사장님. 우리 병원에서 수술 가장 잘하는 의사를 데리고 왔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철권의 시선이 박 과장 뒤에 서 있는 태혁에게 닿았다.


“아! 저 친구가 이번에 미국에서 왔다는 의사인가?”

친구라는 말에 태혁은 한쪽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어머! 의사가 왜 이리 잘 생겼어.”

박 과장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철권의 딸이 끼어들었다.


“아빠. 나 저 의사 마음에 들어.”

그 말이 꼭 저 인형 마음에 드니까 사달라는 소리로 들려와서 태혁은 눈썹 두 개가 전부 위로 솟았다.

박 과장이 곁눈으로 그를 보며 가만히 있으라고 눈짓했다.

태혁은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려 우선 한 번은 참았다.

이젠 그도 혼자가 아니라 신경 써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 환자 가족과 싸우는 망나니처럼 굴면 안 되었다.

박 과장의 바람대로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있다가 VIP 병실을 나온 태혁은 외과 병동으로 내려왔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걸어가던 태혁은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나영을 발견하고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데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멈칫하며 멈추어 섰다.

그의 착각인가 싶었는데, 나영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바로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태혁은 기가 막혀서 쳐다만 보다가 그녀의 뒤를 쫓아가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문나영 선생.”

그가 불러도 그녀가 멈추지 않자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거칠게 변했다.


“문나영! 당장 거기 서!”

그가 누구 때문에 VIP 병실에서 꾹 참았는데, 그를 보자마자 도망가다니.

이런 배은망덕한 여자를 봤나.

***



“…….”

최태혁 교수가 그녀의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노려보자 나영은 입을 꾹 다물고 서 있었다.

괜히 먼저 입을 놀려서 좋은 거 없다는 감이 왔으니까.


“왜 날 보자마자 도망친 거지?”

그가 취조하듯이 묻자 나영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아! 9번 베드 환자 약 처방 빠트려서 다시 돌아간 겁니다.”

“거짓말.”

“정말입니다.”

그녀가 끝까지 잡아떼니 태혁은 바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럼 스테이션에 전화해서 네가 몇 시에 9번 베드 오더 내렸는지 확인해 보면 알겠네.”

최태혁 교수의 집요함에 진 나영도 참지 못하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분간은 병원 안에서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그런 거예요.”

태혁은 나영이 사실대로 말해도 전혀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짜증이 났다.


“왜?”

“그래야 사람들이 저희 둘 사이 의심 안 하니까요.”

“원래도 의심 안 했어.”

그거야 그때는 그녀가 그와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런 거다.

하지만 이젠 그녀도 그가 좋아졌으니 조금만 방심해도 티가 날 게 분명하다고 나영은 생각했다.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잖아요. 교수님이 조금만 협조해 주시면 돼요. 괜찮으시죠?”

오늘따라 그한테 성질 죽이고 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 건가 싶었다.

태혁은 강한 저항감을 느꼈다.

뚜벅.


“그래서 내가 싫다면 어쩔 건데?”

뚜벅.

그녀한테 천천히 다가오며 말하는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나영은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곧 벽에 등이 닿으며 더이상 물러날 수 없게 되었다.

탁.

태혁이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며 그녀를 벽과 그의 몸 사이에 가두었다.


“교수님. 여기 병원이에요.”

나영은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태혁은 그 손을 붙잡고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어차피 내 방에는 아무도 안 와.”

손바닥에 그의 입술이 닿자 뜨거운 감촉에 감전되는 느낌이 들었고, 그녀를 삼킬 듯이 쳐다보는 곧은 시선에 자꾸 몸에 힘이 빠졌다.

쉽게 벗어날 수 없는 불가항력을 느끼고 있을 때.

벌컥!


“잘생긴 의사 선생님! 내가 왔…….”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VIP 병실 이철권의 딸은 가까이 붙어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을 발견하자 눈이 커지고, 태혁과 나영도 난데없이 쳐들어온 그녀의 등장에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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