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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우리 키스하자 (38/84)


38화. 우리 키스하자
2023.02.10.


나영은 문을 열려고 했는데 안 열려서 당황했다.

열린 문틈으로 밖을 보았다가 문 앞에 있는 커다란 인형을 보고 더 깜짝 놀랐다.

태혁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이자 그제야 어둠 속의 사람이 최태혁 교수인 걸 알고 나영은 야단치듯이 말했다.


“왜 거기 계세요?”

그녀가 화를 내도 태혁은 기분이 좋았다.


“널 만나고 내 운수가 트였나 봐.”

이렇게 운빨이 좋아지다니.

평생 재수 없다는 소리만 주야장천 들으며 살아온 태혁은 이 작은 우연에도 뿌듯했다.


“몇 시간 더 자려고 강원도에 남은 거잖아요. 그런데 안 주무실 거면 그냥 지금 서울 가요.”

하지만 나영이 이어서 하는 말을 듣고 태혁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는 바로 사라졌다.

역시 갑자기 운이 좋아질 리가 없나 보다.

태혁은 못마땅한 어투로 물었다.


“그 말 하려고 문 연 거야?”

“네. 잘 거예요? 서울 가실 거예요?”

태혁은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몸을 일으켜서 느릿한 걸음으로 소파로 다가가 그대로 그 위로 쓰러졌다.

그의 몸이 워낙 길어서 큰 소파도 버거워 보였다.

문틈으로 그의 행동을 감시하듯이 쳐다보던 나영은 태혁이 소파에 누운 뒤 아무런 미동도 없자 문을 조금 더 열어서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침실에 있던 아로마 향초가 들려 있었다.

나영은 향초를 소파 옆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잠잘 때는 아무 생각 안 하는 게 좋대요. 뇌를 쉬게 해주세요.”

엎드려 누워 있던 태혁은 머리만 옆으로 돌려 향초를 피우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차라리 술 마시는 게 더 나을 거 같은데.”

나영이 힐긋 그를 흘겨보았다.


“내일 아침 일찍 운전해야 하잖아요. 술은 안 돼요.”

태혁도 불만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계속 재미없는 소리만 하네.”

“제가 재미있는 성격인 줄 아셨어요? 그럼 사람 잘못 고르셨네요.”

그대로 일어서서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강한 힘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단번이 끌어당겼다.

무너진 몸은 최태혁 교수의 위로 쓰러졌다.

나영은 깜짝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뭐 하신 거예요?”

나영은 분명 그가 못되게 군 거라고 생각했는데 최태혁 교수는 오히려 그녀를 나무라듯이 말했다.


“나한테 기회를 달라며. 그런데 또 선을 긋고 있잖아.”

나영은 전혀 인식하지 못했기에 살짝 당황했다.

그녀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교수님이 먼저 안 주무시고 시간 낭비하니까.”

태혁이 또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당기자 나영은 그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베일 듯한 콧날에 진짜 찔릴 거 같아서 나영은 숨을 훅 참았다.

그가 눈을 내리깔며 묵직하게 물었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는 게 시간 낭비라고?”

“…….”

나영은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태혁이 좀 더 다가와 그의 이마로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찧으며 말했다.


“만약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네 머릿속부터 개조해야겠네.”

그 작은 접촉에 심장이 간질거려서 나영은 발끝이 오그라들었다.

타닥타닥.

아로마 향초 타는 소리가 은은하게 두 사람을 감쌌다.

밤의 절정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사로잡혀 나영은 점점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문나영.”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그녀의 이름이 달콤한 초콜릿처럼 녹아내려 마음을 감쌌다.


“우리 키스하자.”

그날 밤 두 사람은 하룻밤 사이 정말 많은 키스를 나누었다.

그런데 지금이 꼭 첫키스인 듯 나영은 낯설게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정말 사랑하는 사이처럼.”

사랑이라는 말은 더 낯설어서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헤맸다.


“그게 가능해요?”

나영은 그와 연애하는 것도 아직 자신이 없는데, 사랑이라니.


“안 될 건 뭐야.”

그가 그녀의 입술을 머금자 그의 목소리는 그녀의 안으로 퍼졌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에 사로잡혀 나영은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태혁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 쥐며 더 깊이 파고들어 왔다.

어느새 그의 커다란 몸이 위에서 그녀를 짓눌러 왔다.

턱이 들리며 입술이 삼켜지자 세상이 빙글 돌았다.

나영은 차오르는 숨을 몸 안에 가둔 채 힘겹게 그를 쫓아갔다.

여전히 사랑보다는 욕망에 가깝다고 해도.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계속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

엥엥엥.

엠블런스 사이렌 소리는 그녀의 알람 소리였다.

빨리 일어나서 병동에 가야 했다.

밤사이 환자들 상태도 확인해야 했고, 드레싱도 갈아야 했고, 회진도 해야 했다.

레지던트 1년 차는 아침부터 할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나영은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핸드폰 알람을 끄려다가 손에 닿은 게 범상치 않아서 눈을 번쩍 떴다.


“!”

그녀의 손이 더듬고 있던 건 남자의 가슴이었고, 그녀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건 최태혁 교수의 잠든 얼굴이었다.

마치 과거의 그 날처럼!

나영은 벌떡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의 팔이 그녀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어서 불가능했다.

나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 사람은 거실 바닥에 누워 있었다.

넓고 푹신한 침대도 놔두고, 소파도 놔두고, 바닥에서 자다니!

이럴 거면 차라리 강원도 거리에서 노숙할 걸 그랬다.

그나마 다행인 건 둘 다 옷은 제대로 입고 있다는 거였다.

만약 어젯밤도 이성을 잃고 끝까지 갔다면 나영은 오늘 아침 강원도 바다에 빠지고 싶었을 거다.

알람 소리가 왜 평소보다 작게 들렸나 했더니, 침실 안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나영은 최태혁 교수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그를 깨웠다.


“교수님! 일어나세요! 우리 바로 서울 가야 해요!”

태혁은 귀찮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어차피 지각이야.”

교수인 그가 늦으면 뭐라고 할 사람이 없지만, 레지던트 1년 차인 그녀가 지각하면 중범죄 지은 죄인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손으로 때려도 소용없자 나영은 다리로 그를 걷어차며 단번에 깨웠다.


“당장 일어나라고요!”

“악!”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낀 태혁은 바로 두 눈을 번쩍 떴다.


“너…….”

처음 같이 밤을 보낸 아침에는 몰래 도망치더니, 두 번째로 같이 밤을 보낸 아침에는 그를 고자로 만들려고 하다니. 아무래도 아침과 상극인가 보다.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영은 치프 동건에게 전화해서 늦을 거 같다고 말하며 몇 번이나 사죄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신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죄송합니다.”

[그래, 알았어. 가능한 한 빨리 와.]

뚝.

그녀가 전화를 끊고 길게 한숨을 내쉬자 운전하던 최태혁 교수가 한마디 했다.


“통화 한 번에 죄송하다는 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하는 거야?”

나영은 고개를 돌려 그를 가볍게 흘겨보았다.


“교수님은 좋으시겠어요.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으니까.”

“그럼 내가 이동건한테 대신 설명해줘?”

“네? 절대 안 돼요!”

그녀가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이자 태혁은 피식 실소를 흘리며 차의 속도를 높였다.


“어차피 대신 해명해주지도 못하고, 혼나는 걸 막아주지도 못하니 교수도 별거 없네.”

나영은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최태혁 교수는 칼을 잡고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대단한 게 아니면 누굴 대단하다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병원 앞까지 최태혁 교수의 차를 타고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나영은 병원 진입로 들어가기 전에 차를 세워달라고 말했다.

8시 되기 3분 전이었다.

죽도록 뛰어야 아침 회진에 그나마 정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차가 멈추어 서자마자 그녀가 차 문을 박차고 나가는 걸 보고 태혁이 서둘러 그녀를 불렀다.


“문나영!”

나영이 뛰어가기 직전에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자 태혁은 급하게 말했다.


“일 끝나고 내 방에 와.”

“저 오늘 무조건 당직이에요.”

나영은 바로 거절의 대답을 하고는 부리나케 병원으로 뛰어가 버렸다.

태혁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병원 돌아오자마자 본모습으로 컴백이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분명 바다에 가기 전보다 더 발전했다.

이젠 병원 안에서든, 병원 밖에서든 태혁은 그녀에게 각인시켜줄 생각이었다.

그가 그녀의 인생에 꼭 필요한 사람이란 걸.

***

병원에 돌아왔으니 그녀는 다시 간담췌 외과 레지던트 1년 차로, 그리고 그는 최태혁 교수로 돌아가 본분에 충실히 행동해야 했다.

그녀가 지각해서 다른 동료에게 피해를 주었기에 응급실 당직을 나서서 맡았다.

그리고 마치 벌을 내리듯이 그날은 정신없이 응급실 콜이 울려댔다.

역시 사람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하나 보다.

그래야 똥 밟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응급실 레지던트 2년 차 이호가 환자의 검사기록을 보여주었다.


“CT상 간 쪽에 출혈이 보여서 호출했어.”

“TA환자인가요?”

“그건 아닌데…….”

이호가 말끝을 흐리자 나영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만 들을 수 있게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딱 봐도 조폭들이야. 싸우다 다친 거 같아.”

나영은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의사는 환자를 가려서 받을 수 없었다.

나영은 마스크를 쓰고 환자가 있는 침대로 걸어갔다.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 큰 남자 세 명이 침대를 에워싸고 있어서 환자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나영은 차분한 어조로 그들에게 지시했다.


“다친 환자만 빼고 모두 응급실에서 나가주세요.”

덩치 세 명이 동시에 험악한 인상을 쓰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

수술실에서 나온 태혁은 시간의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나영과 함께 강원도 바다 다녀온 게 아주 먼 추억처럼 느껴졌다.

태혁은 밥 먹는 대신 그녀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어차피 레지던트 1년 차는 외과 병동 아니면 응급실에 있을 게 뻔했으니까 그리 노력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태혁은 나영을 만나러 가는 길에 차현에게 메시지로 간단하게 한 가지만 물었다.


<엄청 바쁜 연인한테 하기 좋은 말이 뭐야?>

차현은 바로 답변을 보내주었다.


<말 대신 네 어깨를 빌려주며 딱 10분 만이라도 편하게 쉬게 해줘.>

이제 나영을 만나서 해야 할 일도 완벽히 준비되었는데, 이상하게도 병원 안에서 나영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외과 병동에서도, 응급실에서도 나영이 보이지 않자 결국 태혁은 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이 전화 전원이 꺼져 있어서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24시간 대기 중이어야 할 레지던트 전화가 꺼져 있자 태혁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태혁은 곧장 스테이션으로 가서 간호사에게 물었다.


“문나영 선생 지금 어디 있습니까?”

간호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응급실에서 수술받을 환자가 사라져서 찾으러 가셨어요.”

수술받아야 할 만큼 위중한 응급실 환자가 자기 발로 사라지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태혁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어떤 환자요?”

“응급실 사람들 말로는 조폭이라는데. 어?”

이야기하던 간호사는 최태혁 교수가 갑자기 뒤돌아서 뛰어가 버리자 말을 멈추고 놀라서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응급실에서 사라졌다는 그 환자보다 지금 최태혁 교수가 사라진 속도가 더 빠를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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