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마지막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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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마지막 기회
2023.01.30.
최태혁 교수는 의자 등받이에 두 팔을 기대고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강요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가 제대로 대답해야 한다는 걸 나영은 느꼈다.
“그럼 저는 병원 일하는 게 힘들어질 거예요. 저는 교수님처럼 노련한 의사도 아니고, 성격이 대담하지도 못하고, 사람들 시선 무시하지도 못하니까요.”
그녀의 대답이 긍정적이지는 않았기에 태혁은 씁쓸한 눈으로 정면을 보았다.
이건 그러니까 타이밍이 안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하필 레지던트 1년 차일 때 만난 게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되었다.
“그런데 만약 교수님이 정말 좋아진다면 그 이유로 교수님을 잘라내지는 않을 거 같아요.”
뜻밖의 말이 들려오자 태혁은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희망을 품은 눈으로 물었다.
“그 말은 내가 정말 좋아졌다는 거야?”
나영은 머뭇거림 없이 바로 대답했다.
“그건 진짜 소문이 나 봐야 제 본심을 알 거 같아요. 어떤 결정을 하고 싶은지.”
역경이 닥치면 가장 순수한 본심만이 남게 될 거다.
그 순간 나영은 최태혁 교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어떤 건지 확실히 알 수 있게 될 거 같았다.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내가 직접 소문 퍼트릴 수도 있어.”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태혁이 겁을 주자 나영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이기적으로 제 일을 방해하려는 분을 제가 어떻게 진심으로 좋아하죠?”
“너 이젠 대놓고 나 구박한다.”
최태혁 교수가 앓는 소리를 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나영은 피식 웃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오는 윤이나 교수를 발견하고 얼굴이 굳었다.
나영은 바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태혁도 고개를 돌려 윤이나를 확인했지만, 굳이 나영처럼 제 발 저린 듯이 반응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또각또각.
윤이나는 먼저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걸어와서 최태혁 교수에게 말을 걸었다.
“난 퇴근하는 길이야. 넌 당직이야?”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아는 나영은 윤이나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최태혁 교수에게 말을 거는 게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보통 심장이 아닌 건 확실했다.
“아니, 문나영 보러 온 거야.”
최태혁 교수가 대놓고 그녀의 이름을 말하자 나영은 흠칫 놀랐다.
윤이나의 시선이 그녀한테 옮겨졌다.
최태혁 교수 앞이라서인지 은별의 병실 앞에서처럼 대놓고 그녀를 미워하는 눈으로 쳐다보지는 않았다.
“문나영 선생이 응급실 당직인가 보네. 수고해.”
나영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거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또각또각.
떠나는 윤이나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며 나영은 최태혁 교수에게 물었다.
“지금 뭐였죠?”
“인사한 거잖아.”
“그게 정상인가요?”
“윤이나는 그게 가능한 멘탈인 거야. 너도 저건 배워.”
그녀한테 윤이나를 본받으라고 하자 나영은 썩은 음식이라도 먹은 표정으로 최태혁 교수를 쳐다보았다.
태혁도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말이었다.
“의사는 멘탈이 강해야 해. 소문 한 번에 와장창 무너지는 것보다는 저렇게 뻔뻔한 게 낫잖아.”
나영은 대꾸할 가치조차 못 느껴서 바로 응급실로 걸어갔다.
태혁은 인사도 없이 가버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내 무덤을 팠군.”
그래도 아까 말은 진심이었다.
의사로 성장하려면 강한 멘탈이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영은 몇 번의 고난을 거쳐야만 그런 멘탈이 생길 거 같아서 태혁은 마음이 씁쓸했다.
그건 결코 그가 대신 겪어줄 수 없는 고난일 테니까.
***
매일 새벽 5시에 시작되는 바쁜 일상을 살다가 어쩌다 쉬는 날이 되면 아침에 늦잠 잘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나영은 일부러 핸드폰도 무음으로 해놓고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푹 자고 일어나면 병원에서 다시 열심히 일할 체력이 쌓일 거다.
그런데 하필 꿈에 최태혁 교수가 나왔다.
그것도 윤이나와 세트로.
두 사람은 다정하게 옆자리에 앉아서 의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여자 의사는 너밖에 없어. 이나야.’
최태혁 교수가 연인이라도 보는 눈빛으로 윤이나를 보며 하는 말을 듣는데, 나영은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녀의 꿈이었건만, 주인공은 최태혁 교수와 윤이나였다.
윤이나가 세상을 다 가진 눈으로 최태혁 교수를 보며 웃었다.
‘언젠가 네가 날 인정해 줄 줄 알았어.’
그만! 그만하라고!
나영은 더이상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아서 그곳을 떠나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문나영은 자격이 없잖아. 안 그래?’
번쩍.
눈을 뜬 나영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최태혁 교수 어머니한테 시달리는 꿈을 꾼 이후로 최악의 개꿈이었다.
그런데 개가 안 나와도 개꿈이 성립하나?
나영은 더 자고 싶다는 마음이 안 들어서 일어나 앉았다.
“왜 하필 윤이나가 나온 거지?”
최태혁 교수가 그녀를 안 좋아하게 돼도 윤이나를 좋아할 일은 없다는 걸 알았다.
두 사람이 잘될 운명이었으면 최태혁 교수가 미국 가기 전에 이루어졌을 거다.
그런데 왜 그녀는 바보같이 윤이나를 신경 쓰고 있나.
아무래도 그건 윤이나가 인정받는 의사이기 때문인 거 같았다.
지금의 그녀로서는 죽어도 쫓아갈 수 없는.
최태혁 교수까지 자기 입으로 말했잖은가.
윤이나를 본받으라고.
나영은 씻어야 이 답답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아서 느릿느릿 침대에서 나와서 문으로 걸어갔다.
달칵.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온 나영은 그대로 욕실로 향하려고 했는데.
“이제야 일어났어?”
“꺄악!”
갑자기 들린 남자 목소리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소파에 앉아 있던 태혁도 놀랐고, 그를 발견한 나영도 놀랐다.
“교, 교수님이 어떻게 여기 계세요?”
“초인종 누르고 들어왔지.”
그 말은 승희가 최태혁 교수한테 문을 열어주었다는 소리였다.
나영이 승희를 찾아 두리번거리자 태혁은 알려 주었다.
“오승희는 승준이랑 집에 갔어.”
집들이 때 그걸로 사기를 친 적이 있기에 나영은 또 그 수법이냐는 비난의 눈으로 태혁을 쳐다보았다.
“이번엔 진짜야. 오늘 제사래.”
그러고 보니 제사 때문에 집에 가는 거 귀찮다고 했던 승희의 말이 기억났다.
“그럼 교수님은 왜 여기 계시는 건데요?”
“너랑 약속한 바다에 가려고.”
태혁이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말에 나영은 동의할 수 없었다.
“네? 그게 오늘이라고 말한 적 없잖아요.”
“너 쉬는 날 안 가면 언제 가는데?”
“그럼 어제 말씀하셨어야죠.”
“난 당연히 너도 아는 줄 알았지.”
“…….”
“…….”
꼭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싸움하는 것처럼 들려서 더 따지는 것도 무의미해졌다.
“전 먼저 씻어야겠어요.”
나영은 서둘러 욕실로 피신했다.
혼자 남은 태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영의 방으로 향했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간 태혁은 어항이 있는 곳으로 곧장 걸어갔다.
***
어쨌든 같이 바다에 가자고 한 건 미리 약속되었던 일이었기에 나영은 최태혁 교수의 차에 같이 올라탔다.
“먹을 거라도 사가야 하지 않아요?”
아무 준비도 없이 그냥 몸만 가는 게 신경 쓰여서 나영은 운전하는 최태혁 교수에게 물었다.
“거기 다 있어.”
그의 말도 틀린 게 아니라서 나영은 더 말하지 않았다.
꽉 막힌 서울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리자 정말 여행이라도 떠나는 기분이 되어서 나영은 창틀에 팔을 올리고 창밖을 구경하였다.
여기서는 응급콜이 와도 당장 병원에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 좀 홀가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교수님은 여행 자주 다니세요?”
“병원에서 근무 시작하기 전에는 차현이랑 다녔어.”
최태혁 교수한테 화목한 가정은 없어도, 곁에 있어 주는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저는 열 살 이후 여행을 가본 적이 없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태혁이 고개를 돌려 조수석 쪽을 보았다.
창가에 팔을 올리고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옆모습은 마치 청춘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지만 태혁은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
태혁은 일부러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라도 나랑 같이 여행 다니면 되지.”
그의 말에 나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외과 의사가 어떻게 마음대로 여행을 가요.”
공항까지 갔다가도 응급콜 받으면 바로 병원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녀의 말이 틀린 게 아니라서 태혁은 미간이 좁아졌다.
호기롭게 세상 어디든 데려가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게 거짓말이 될 가능성이 크다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차로 세 시간을 달려서 강원도 양양 바닷가에 도착했다.
오늘 눈을 뜰 때만 해도 강원도에 오게 될 줄은 전혀 몰랐던 나영은 탁 트인 동해를 보고 가슴을 쭉 폈다.
바다 냄새가 청량했다.
하지만 바닷바람이 강해서 긴 머리가 날렸다.
어쨌든 데이트라서 머리를 풀고 나왔더니 이럴 때 불편했다.
손으로 머리를 꾹 누르는데 갑자기 바람이 멎었다.
이상하게 생각해서 뒤를 돌아보았더니 최태혁 교수가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그녀가 빤히 쳐다보자 태혁은 한소리 했다.
“바다를 봐. 날 보지 말고.”
그녀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안 그럼 실없이 웃게 될 거 같았다.
“교수님은 바다에 와서 주로 뭘 해요?”
그가 물을 좋아한다고 해서 바다로 온 것이기에 나영은 그의 의견을 물었다.
나영은 이렇게 서서 바다를 구경하는 거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었다.
“하는 게 있긴 있는데 네가 별로 안 좋아할 거 같은데.”
“오늘은 제가 교수님한테 맞춰드릴게요.”
태혁이 의외라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웬일로 이렇게 친절하지?”
사실 그녀도 이유가 다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잖아요. 앞으로 이럴 기회 없을지도 모르니. 악!”
마지막은 그녀의 비명으로 끝났다.
그녀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최태혁 교수가 갑자기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들고 바다를 향해 그대로 돌진했기에.
그가 이대로 그녀를 안은 채 바다로 뛰어들 거 같자 나영은 그의 옷을 손으로 잡아 뜯으며 말렸다.
“교수님! 멈춰요!”
“나한테 맞춰준다며. 그럼 당연히 나랑 같이 바다에 들어가야지.”
최태혁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알았다면 함부로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었다.
“꺄악! 저 옷도 안 가져왔다고요!”
철썩.
밀려온 파도가 최태혁 교수의 구두와 바지를 거침없이 적셨다.
그녀의 심장도 같이 염분에 절여지는 기분이었다.
“교수님!”
나영은 최태혁 교수를 목놓아 부르며 두 팔로 그의 목을 꽉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차마 두 눈 뜨고 앞으로 닥쳐올 참상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1초가 지나고, 몇 초가 지나도록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자 나영은 용기를 내서 고개를 들었다.
최태혁 교수는 그녀를 안은 채 바닷물에 무릎까지 담그고 서 있었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시작되어서 지척까지 밀려왔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짙은 눈빛이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해서 나영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넌 정말 이 바다가 우리의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
그의 질문에 대답한 건 그녀의 심장이었다.
찌르르 아프다가 불꽃처럼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