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어쩌다 맞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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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어쩌다 맞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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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어쩌다 맞선
2023.01.27.
태혁의 예상대로 나영은 옥상에서 최태혁 교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가다가 멈추었을 때는 이미 옥상에서 한참이나 내려온 뒤였다.
나영은 벽을 손으로 짚고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정말 꼼짝없이 들키는 줄 알고 심장이 철렁했었다.
최태혁 교수의 순발력 때문에 안 들킨 건 다행인데 어쩌다 보니 그녀 혼자 도망쳐 왔다.
천하에 최태혁 교수를 병원 사람 중 누가 감히 해코지할 수 있을까 싶긴 했지만, 같이 저지른 일을 그한테만 떠맡기고 그녀만 도망 온 게 걸려서 나영은 계단 밖으로 고개를 빼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최태혁 교수가 내려오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차마 다시 옥상으로 올라갈 엄두는 나지 않아서 핸드폰을 꺼내 최태혁 교수에게 전화하려고 했는데, 메시지가 먼저 도착했다.
<네가 버리고 간 내 심장 어쩔 거야?>
메시지와 함께 그가 찍어 보낸 장미 꽃잎을 보자 나영은 눈 밑이 잘게 떨렸다.
위기를 극복하고 나서 그는 그녀를 행운의 여신이라고 했는데, 위기가 닥치자 그녀는 그를 버리고 혼자 도망쳤다.
이거 설마 내가 크게 잘못한 건가?
아니야. 최태혁 교수는 그냥 농담하는 걸 거야.
이게 그렇게 큰일도 아니고 어쩌다 생긴 해프닝인데.
이 일로 그녀가 최태혁 교수한테 선을 그으면 그거야말로 진짜 그를 상처입히는 일이었다.
예전이었다면 나영은 반드시 그렇게 했겠지만, 지금 그녀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나영은 최태혁 교수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서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그가 전화를 받지 않자 나영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행운의 여신 약빨이 이리 빨리 떨어질 줄이야.
***
똑똑.
나영이 노크하고 연구실 문을 열었을 때, 방 주인은 없고 책상 위에 도시락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제 혼자 가버린 걸 사과하려고 일부러 커피까지 사 왔던 나영은 최태혁 교수를 만날 수조차 없자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가신 거지?’
그 시간 태혁은 소아과 중환자실에 들러서 수술한 아기 환자를 제일 먼저 확인한 뒤 아침 회진에 참석했다.
나영이 할 말이 있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태혁은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평소에는 일부러 그와 시선을 안 마주치려고 피하더니, 지금은 오매불망 그만 쳐다보고 있으니 이 상황을 즐기고 싶어졌다.
생각해 보니 병원에서 그녀를 만나고 지금껏 너무 그만 그녀의 뒤를 쫓아다녔었다.
일방적인 건 좋지 않았다.
가끔은 그녀도 그의 관심을 갈구해야 관계의 형평성이 맞았다.
태혁은 차현의 도움 없이 자신이 그 이치를 깨달았다는 것에 더없이 뿌듯했다.
“황명순 환자 오늘 퇴원입니다.”
황명순 환자는 그가 한국에 돌아와 처음 한 간이식 수술 환자였으니 특별하다면 특별했다.
태혁은 황명순 환자에게 집에서 몸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간략하게 알려주었다.
“선생님. 이쪽이 우리 손녀예요. 예쁘죠?”
그런데 황명순 환자가 갑자기 보호자로 있던 손녀딸을 그에게 소개해 주면서 분위기가 그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레지던트들은 일제히 눈동자를 움직여 황명순 환자가 예쁘다고 자랑한 손녀딸을 쳐다보았다.
항상 딸이 병상 옆을 지키고 있었는데, 오늘은 어쩌다 손녀딸이 대신 있는 건가 싶었는데 황명순 환자는 계획이 다 있었던 거다.
손녀딸은 할머니의 맞선 계획에 착실히 동참하여 얼굴을 붉히며 최태혁 교수한테 수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회진이 갑자기 맞선 분위기로 흘러가자 레지던트들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딱 한 명만 빼고.
과연 독사는 환자 보호자한테도 독을 뿜어댈 것인가, 아니면 반듯한 맞선남의 면모를 보여줄 것인가.
“선생님 전화번호 좀 알려주시겠어요? 할머니가 편찮으시면 전화해서 물어보게.”
여자가 먼저 핸드폰을 내밀며 전화번호를 요구하자 레지던트들은 독사의 반응을 기대하며 구경하였다.
“그땐 바로 병원으로 오시면 됩니다.”
역시 독사.
그런데 독사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불안해 보였다.
설마 손녀딸에게 흔들리고 있는 건가?
그럼 더 대박이었다.
“그래도 감기 같은 건 응급실 오기 곤란하잖아요.”
“전 간 전문이지. 가정의학과 의사가 아닙니다.”
그냥 너한테 전화번호 알려주기 싫다는 느낌이 강했기에 레지던트들은 서로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 맞선은 글렀다.
***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서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전화 연결이 되지 않자 태혁은 핸드폰을 움켜잡고 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태혁은 억울했다.
그는 업무에 충실하게 회진 중이었을 뿐이다.
병실에서 수술로 겨우 살아난 노인과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황명순 환자 손녀딸을 사무적으로 대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왜 나영은 그의 전화를 안 받는 건가?
태혁은 결국 전화 받지 않는 나영 대신 차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분간 나한테 전화 걸 일 없을 줄 알았는데.]
태혁의 동의 없이 그의 이야기를 나영에게 해버렸으니 당연히 태혁이 그에게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문나영이 내 전화 안 받아.”
[병원에 출근도 안 했어?]
차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병원에서 일은 잘하고 있는데, 내 전화만 안 받는다고.”
태혁이 나영의 설득을 받아들여서 수술한 걸로 이젠 두 사람이 잘되는 일만 남은 줄 알았기에 차현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나영이 네 전화 무시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내가 먼저 문나영 전화를 안 받았지.”
[그게 다야?]
“그리고 회진하는 중에 환자가 자기 손녀딸을 나한테 소개해줬지.”
[아!]
상황 파악이 끝난 차현은 길게 소리를 이어갔다.
태혁은 다리를 꼬고 앉으며 하소연했다.
“나도 일방적으로 당한 건데 이게 내 잘못이야?”
[그래도 문나영은 기분이 나쁜 거지.]
“날 버려두고 혼자 도망친 건 문나영이 먼저였어. 잘못을 따지면 그게 더 크지 않아?”
[그래서 넌 문나영을 이기고 싶어?]
태혁은 바로 기가 꺾였다.
“아니. 그냥 잘 지내고 싶어.”
[그럼 그냥 사과해.]
사과하라는 말에 태혁은 발끈했다.
“사과하라고?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렇게 속 좁게 하나하나 따지면 계속 싸우게 될걸. 네 마음의 그릇을 크게 키우라는 말이야. 남자답게 문나영을 포용할 수 있게.]
태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은혜는 은혜로 갚고, 원수는 원수로 갚는 성격이었다.
너그러움은 익숙하지 않았다.
“나 너한테 부탁할 거 있어.”
[문나영한테 대신 사과해주는 건 못 한다.]
당연히 그건 아니었다.
“문나영이 어릴 때 큰일을 겪은 거 같아. 알아봐 줄 수 있어?”
[알아보는 건 문제가 아닌데, 네가 이렇게 따로 조사한 거 알면 문나영은 안 좋아할걸.]
“남자답게 문나영을 포용하려면 무슨 일인지 알긴 알아야 하잖아.”
[그래, 그럼 내가 알아보고 연락할게.]
뚝.
전화를 끊은 태혁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사실 나영이 말한 안 좋은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차현에게 전화한 거였다.
“구해준 사람이라.”
그가 대신 찾아주면 나영은 분명 기뻐할 거 같은데, 딱히 내키지 않았다.
회진에서 튀어나온 환자 손녀딸보다 더 골치 아픈 존재일 거 같아서.
***
오늘은 유독 응급실 호출이 많았던 날이었다.
이런 날은 진상을 만날 확률도 높았다.
“의사 아가씨. 엄청 미인이네. 그 얼굴로 왜 이런 곳에서 생고생이야. 내가 유명 매니지먼트 사장이랑 잘 아는 사이인데 관심 있어?”
그녀가 맡은 환자도 아니고 환자 보호자가 자꾸 그녀에게 시비 걸듯이 말을 붙였지만 나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봉합만 했다.
“거짓말 아니라니까. 내 핸드폰에 사진 좀 봐. 다 이름만 대면 아는 연예인들이야.”
핸드폰을 아예 그녀의 얼굴 앞에 들이밀며 시야를 차단하자 그제야 나영은 고개를 들며 차갑게 말했다.
“저의 아빠가 서울중앙지검장이랑 친구 사이이신데, 저도 소개해 드릴까요?”
지검장이란 말에 남자는 잠깐 움찔했지만 곧 크게 웃으며 농담 취급했다.
“하하하하. 이 아가씨가 농담까지 잘하네. 아주 마음에 들어.”
사실 그녀는 농담이 아니라 사실을 말한 거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대학 보낼 때 신신당부한 말이었다.
남자가 괴롭히면 검찰청에 일하는 아버지 친구에게 바로 전화하라고.
그때는 부장검사였는데, 이제는 지검장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병원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한테 고백하는 사람은 있어도, 함부로 집적이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
나영이 서울중앙지검장한테 전화해서 응급실 진상을 물리친 소식을 밥 먹다가 전해 들은 태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승준을 쳐다보았다.
“서울중앙지검장?”
승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서울중앙지검장이 문나영 아버지 절친이래. 그래서 문나영이 집적이는 놈 있으면 바로 거기로 전화하잖아. 이야! 문나영 아버지 굉장하지 않냐? 딸을 지키려고 서울중앙지검장을 보디가드로 세우다니.”
듣고 있으려니까 태혁은 목이 꽉 막혀왔다.
“그냥 말만 그런 거 아니고?”
승준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너처럼 어떤 놈이 못 믿겠다면서 당장 와 보라고 했더니, 진짜 병원까지 왔어. 정말 뉴스에서 봤던 서울중앙지검장이더라고. 하하하하하하하하. 죽이지?”
태혁은 밥맛이 뚝 떨어져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언젠간 그가 그 서울중앙지검장한테 붙잡혀 가서 심문받을 거 같았기에.
그가 밥을 못 먹는 걸 보고 승준이 위로라면서 말했다.
“오히려 넌 좋아해야지. 네가 집적인다고 문나영이 서울중앙지검장한테 전화한 적은 없잖아. 얼마나 다행이야.”
태혁은 바로 오승준의 다리를 걷어차 버렸다.
결국 밥을 대충 먹고 끝낸 태혁은 식당을 나와서 핸드폰을 꺼냈지만, 나영에게 선뜻 전화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오늘 그녀가 응급실에서 서울중앙지검장한테 한 전화가 그에 대한 화풀이처럼 느껴졌으니까.
이건 그가 넓은 마음으로 포용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그도 서울중앙지검장은 무서웠다.
문나영 아버지는 왜 하필 그런 사람과 친구인 걸까 한탄하며 태혁은 수술실로 향했다.
***
응급실이 한가해지자 나영은 그제야 핸드폰을 꺼내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태혁의 전화가 오다가 뚝 끊긴 것을 보고 나영은 미간을 좁혔다.
수술 들어간 거라는 걸 뻔히 알지만 그래도 기분은 별로였다.
나영은 핸드폰을 두 손으로 잡고 메시지를 적었다.
<환자 보호자가 또 여자 소개하면 어쩌실 거예요?>
적고 보니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그래서 그냥 지워버리려고 했는데, 그녀의 귓가 근처에서 최태혁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혼할 여자가 있다고 해야지.”
나영은 화들짝 놀라 급하게 몸을 옆으로 피했다.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최태혁 교수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넌 우리 사이 병원에 소문나면 단칼에 나 잘라낼 거야?”
나영은 멍하니 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