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행운의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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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행운의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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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행운의 여신
2023.01.23.
3시간 전.
그녀는 이식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평소처럼 일하면서 차분하게 기다리려고 했는데, 외과 레지던트들이 자꾸 불길한 소리를 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 수술이 최태혁 교수가 이 병원에 와서 처음 테이블데스(수술 중 사망)될 확률이 제일 크다.”
“어휴! 아기만 불쌍하지.”
쾅!
그녀가 의학 서적을 세게 테이블에 내려놓자 그제야 조용해졌다.
나영은 차가운 눈으로 남호진과 김영미를 쳐다보며 화를 냈다.
“수술받고 있는 환자가 죽을 거라고 말하는 게 의사가 할 짓이에요?”
남호진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비난했다.
“갑자기 왜 독사 편을 들어? 설마 독사가 특별히 너한테만 잘해줬어?”
나영은 남호진과 싸우면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의국을 나왔다.
아직 수술이 끝나지 않아서 그녀도 불안하긴 했지만, 걱정하면서 기다릴 바에는 차라리 수술이 끝난 최태혁 교수를 축하해줄 준비를 하는 게 나을 거 같았다.
분명 그는 성공적으로 수술을 끝낼 테니까.
나영은 지갑을 챙겨서 병원 밖으로 나갔다.
가로등 불빛이 줄지어 반짝이는 도심 거리를 걸으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회상했다.
최태혁 교수를 병원에서 처음 보고 재앙이라고 생각하며 경악했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젠 최태혁 교수가 있는 병원이 익숙해졌다.
아니, 그가 이 병원에서 사라진다면 오히려 아주 많이 허전할 거 같았다.
***
옥상 문을 열고 나온 태혁은 촛불이 켜진 케이크와 샴페인을 보고 멈추어 섰다.
나영은 손뼉을 치며 그를 반겼다.
그가 옥상으로 왔다는 건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는 뜻일 테니까.
“와서 촛불 끄세요.”
“내 생일도 아닌데 왜?”
“수술 성공 기념이요.”
태혁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틀며 실소했다.
“지금껏 내가 성공한 수술이 몇 개인데 고작 이걸로 축하는 무슨.”
“수술 안 한다고 도망치려다 한 수술은 처음이잖아요.”
태혁은 뼈를 맞은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았다.
“어서요.”
나영이 케이크를 그의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대고 재촉해서 할 수 없이 태혁은 입으로 바람을 불어 촛불을 껐다.
나영이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 제대로 못 드셨을 거 같아서 음식도 준비했어요. 드세요.”
케이크와 샴페인 외에도 식사할 수 있는 음식도 준비되어 있었다.
태혁이 초밥과 샌드위치를 쳐다만 볼 뿐 손을 대지 않자 나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안 드세요?”
“내가 지금 제일 먹고 싶은 건 컵라면이야.”
그의 말에 나영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서 이것저것 사 왔더니 기껏 찾는 게 컵라면이라니.
“그냥 초밥 드세요.”
“컵라면이랑 같이 먹으면 얼마나 더 맛있겠어.”
나영은 한 대 때리고 싶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의자 아래 편의점 봉투에서 컵라면을 꺼냈다.
그가 많이 먹는 걸 알기에 혹시나 하고 예비로 사 왔던 컵라면이었다.
그런데 이게 메인이 될 줄이야.
최태혁 교수는 그녀가 꺼낸 컵라면을 보자마자 세상을 다 가진 거 같은 표정을 지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고작 컵라면 따위로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았다.
최태혁 교수는 바로 컵라면 봉지를 벗겨내어 수프를 털어 넣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구경하듯이 바라보던 나영은 물었다.
“왜 하필 컵라면을 제일 먹고 싶은 거예요?”
오래 굶어서 배가 고프면 당연히 제대로 챙겨 먹어야 했다.
최태혁 교수는 그녀가 텀블러에 담아온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부으며 심플하게 대답했다.
“옥상 올라오면서 이게 제일 먼저 생각났어. 너랑 같이 옥상에서 컵라면 먹던 거.”
사실 그녀도 이 옥상에 다시 올라왔을 때 자연스럽게 그날 일이 떠올랐었다.
“그때 엄청 맛있었어.”
나영은 그때 굉장히 분했었다.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 그한테 끌려가는 거 같아서.
태혁은 3분이 되기 전에 뚜껑을 열고 컵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세 젓가락 만에 컵라면 하나를 다 먹는 그의 모습은 외과 의사가 아니라 푸드파이터에 더 어울렸다.
그리고 그녀가 사 온 음식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그의 먹방은 끝나지 않았다.
안 먹고 보기만 하는 그녀에게 태혁이 물었다.
“넌 저녁 이미 먹은 거야?”
사실 같이 먹으려고 많이 사 온 것인데, 그가 너무 잘 먹어서 구경하는 게 더 좋았다.
나영은 그냥 먹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먹는 걸 본 것만으로 이미 배가 찬 기분이기도 했다.
최태혁 교수는 마지막으로 샴페인을 원샷 했다.
그리고 나서야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좀 살겠네.”
그가 편해 보여서 나영도 마음이 놓였다.
“오늘 정말 고생하셨어요.”
마지막 이 한마디가 달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최태혁 교수는 그녀를 돌아보며 가벼운 투로 말했다.
“내가 수술 시작하기 전에 그 아기한테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나영은 별로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수술 꼭 성공하겠다고요?”
최태혁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나영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그녀의 뇌는 별로 효율이 높지 못했다.
“그럼 뭐라고 하셨는데요?”
그가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그녀의 귓가에 작게 말했다.
어차피 듣는 사람도 없는데.
“나 수술 끝나고 문나영이랑 바다에 가야 하니까 너 꼭 건강하라고.”
나영은 짧게 웃었다.
“놀러 갈 생각하시면서 열심히 수술했다고요?”
“아니.”
최태혁 교수는 넌 왜 그렇게 못 알아듣는 거냐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부터 네가 내 행운의 여신이라고.”
나영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였다.
그 말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잘 가늠이 안 되었다.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태혁은 그녀의 하얀 손을 끌어와서 꽉 움켜쥐었다.
“그래, 이제 네가 없으면 내 수술은 행운이 사라지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꼭 내 옆에 있어야 한다고.”
그에게 잡힌 손이 욱신거렸다. 아니, 욱신거리는 건 그녀의 마음이었다.
차현 감독이 말했다.
그와 그녀가 만난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나영도 이제 그리 믿고 싶었다.
두 사람은 그저 하룻밤의 인연이 아니라, 이렇게 함께할 운명이라고.
최태혁 교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준비했어.”
준비?
뭔가 싶었는데 최태혁 교수가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빨간 꽃잎을 하늘 높이 뿌렸다.
또 꽃잎이었다.
전에는 벚꽃이었는데, 오늘은 장미였다.
나영은 멍한 눈으로 그녀의 몸 위로 떨어지는 장미 꽃잎을 바라보았다.
벚꽃이 떨어진 지 한참 되었기에 설마 이걸 오늘도 보게 될 줄은 정말 상상조차 못 했다.
“사실 이거 사고 오느라 좀 늦었어.”
그의 말에 나영은 웃음이 터졌다.
막 고된 수술을 끝냈으면서, 배고파 죽겠다면서, 꽃을 사러 가다니.
그녀의 기준으로 봤을 때 제정신이 아니었다.
웃는 그녀의 머리 위로 그가 마지막 남은 빨간 장미 꽃잎을 뿌려 주었다.
“내 행운의 여신님께 이 정도 대우는 해 드려야지.”
여신님께 꽃을 바치는 건 올바른 신도의 태도였다.
나영은 웃느라 두 뺨이 그가 사 온 장미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정말 미치겠다. 이 남자 때문에.
덜컹.
그때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태혁과 나영은 동시에 움찔했다.
반사신경이 빠른 태혁이 먼저 나영의 손을 붙잡고 환풍구 뒤로 빠르게 피했다.
두 사람이 몸을 숨기자마자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 의사 세 명이 옥상으로 나왔다.
“뭐야? 누가 여기서 생일파티라도 했나 본데.”
태혁이 유일하게 남긴 음식이 케이크였다.
“이야. 샴페인에 장미까지. 누군지 팔자 좋네. 병원에서 연애질도 하고.”
환풍구 기둥 뒤에서 이걸 들은 나영은 낯빛이 창백해졌다.
여기서 들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니 아찔했다.
꼼짝도 못 하고 있는데 최태혁 교수의 손이 그녀의 턱을 살짝 잡고 그를 향해 들어 올렸다.
그가 할 말을 적은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내가 나가서 혼내줄까?>
나영은 절대 안 된다며 고개를 격렬하게 저었다.
태혁은 쯧 혀를 찼다.
그는 저 세 명이 전혀 무섭지 않았지만, 나영 때문에 할 수 없이 숨은 것이었다.
그때 세 명 중 한 명이 쓸데없이 날카로운 추리력을 발휘했다.
“설마 우리가 와서 다른데 숨은 거 아냐?”
“허. 그럼 아직도 옥상에 있다고?”
나영은 태혁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견딜 수 없이 심장이 뛰어대서 가장 안전하게 느껴지는 곳으로 본능적으로 숨게 되었다.
태혁은 한 손으로 그녀의 작은 몸을 보호하듯이 안은 채 주위에 있는 작은 돌을 집어서 반대편으로 힘껏 던졌다.
탁.
소리가 들리자 세 명은 곧장 그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저쪽에 있나 본데.”
“가보자. 도대체 누구야?”
“내 생각에는 분명 의사랑 간호사야.”
사람들이 그쪽으로 이동하자 태혁은 나영의 손을 끌어당겼다.
“지금 떠나야 해.”
나영은 여기서 움직이면 바로 들킬 거 같았기에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
걱정이 많아서 쉽게 행동할 수 없는 그녀와 달리 태혁은 행동파였기에 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아 들다시피 해서 옥상 문 쪽으로 돌진했다.
나영은 비명이 나올 거 같아서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태혁이 그녀를 먼저 옥상 문밖으로 밀어내자마자 반대편으로 갔던 세 명 중 한 명이 돌아오다가 그를 발견했다.
“어? 최 교수님.”
태혁은 바로 몸을 돌리며 그의 몸으로 옥상 입구를 막고 험악한 눈으로 레지던트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파티하고 놀고 있었던 건가? 병원이 학교인 줄 아나!”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가 한 것들을 레지던트 세 명에게 뒤집어씌웠다.
갑자기 옥상에 나타난 독사에게 야단을 맞은 레지던트 의사 세 명은 열심히 자신들을 변호했다.
정말 그들이 파티하고 논 게 아니었으니까.
“아닙니다. 저건 저희가 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한 겁니다.”
“여기 너희들 말고 또 누가 있어?”
“진짜 아닙니다. 저희는 그냥 담배 피우러 옥상 올라온 거예요.”
“변명 따위 그만하고 당장 치워!”
레지던트 세 명은 너무 억울했지만 병원에서 감히 교수에게 반항할 수는 없었기에 할 수 없이 음식 포장 쓰레기와 장미 꽃잎을 치우기 시작했다.
성공적으로 레지던트들한테 뒤집어씌운 태혁은 만족하며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나영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혼자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도망쳤나 보다.
행운의 여신님이 참 이기적이셨다.
태혁은 핸드폰을 꺼내 바닥에 떨어진 장미꽃잎 하나를 찍었다.
그리고 나영에게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네가 버리고 간 내 심장 어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