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옥상으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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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옥상으로 오세요
2023.01.20.
최태혁 교수가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차현은 잡고 있던 나영의 손을 바로 놓았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카페테리아로 달려온 최태혁 교수는 당장 싸움을 벌일 거 같은 얼굴로 차현을 향해 매섭게 삿대질했다.
“너!”
태혁한테 한 대 맞을 거 같은 상황에서 차현은 그녀를 보며 느긋하게 물었다.
“문나영 씨. 혹시 최 교수가 집들이 때 화장실에서 뭐 했는지 이야기했나요?”
“네?”
이 상황에서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묻는 거고, 그건 또 어떻게 아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방금까지 화난 고릴라처럼 분노를 표출하던 최태혁 교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분해져 있었다.
나영은 차현과 최태혁 교수를 번갈아 보았다.
최태혁을 이리 짧은 시간 안에 제압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절친이 맞긴 맞았나 보다.
“차 감독. 우리 둘만 이야기하자.”
태혁은 이를 꽉 물며 차현에게 말했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가야 마음 편히 때릴 수 있을 테니까.
문나영 앞에서는 차현이 입을 놀리는 순간 그가 망했다.
잠시 꼭지가 돌아서 차현이 얼마나 영악한지 까먹고 있었다.
절대 혼자 죽을 놈은 아니었다. 그랑 같이 죽으면 죽었지.
“문나영 씨도 방금 만났어. 아직 제대로 이야기도 못 나눴는데.”
차현이 그녀 핑계를 대며 안 일어나자 태혁은 그의 어깨를 손으로 꽉 잡으며 나무라듯이 말했다.
“넌 예쁜 여자만 보면 들이대는 그 버릇 좀 고쳐.”
“그거야 어릴 때부터 네가 예쁜 여자한테 고백 편지 받을 때마다 다 나한테 떠넘기는 바람에, 읍!”
태혁은 바로 차현의 입을 큰 손으로 틀어막고는 힘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녀한테 쫓아오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거듭 당부했다.
나영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입을 벌리고 쳐다보았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사회적 지위도 쌓은 만큼 쌓은 성인 남자들이 꼭 10대처럼 구는 모습은 참 놀라웠다.
이래서 남자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이라는 말을 하나 보다.
***
태혁은 차현을 끌고 건물 밖으로 나와서야 팽개치듯이 그를 놓아주었다.
차현은 휘청이며 넘어질 뻔하다가 겨우 균형을 잡고 똑바로 섰다.
태혁은 주먹을 풀며 차현에게 단단히 경고를 날렸다.
“네가 오늘은 제대로 선을 넘었어. 나한테 맞아본 지 오래됐지?”
매일 싸움만 해댔던 10대 시절 남자들 간의 우정은 주먹으로 다져진 게 팔 할이었다.
태혁이 위협적으로 나와도 차현은 웃었다.
“멀쩡히 화낼 수 있는 거 보니 멀쩡히 수술도 할 수 있겠네.”
수술이라는 말이 차현의 입에서 나오자 태혁은 꽉 움켜쥐었던 주먹에 절로 힘이 빠졌다.
지금 이 순간도 간 기능이 70%나 망가진 아기는 생명이 조금씩 갉아 먹히고 있는데 그는 친구의 질투 유발 작전에 홀라당 넘어가 이러고 있다는 게 환멸이 느껴져서 태혁은 몸을 돌려 벤치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문나영한테 들었어?”
“그래.”
차현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태혁의 표정을 살폈다.
“수술이 자신 없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태혁은 말없이 병원 건물을 쳐다보다가 입을 뗐다.
“내가 간담췌 외과 선택한 이유는 이 과가 어린 환자가 제일 적기 때문이야.”
간담췌 외과는 보통 나이 많은 성인 환자가 대부분이었다.
어릴 때 간이 나빠도 수술까지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아기의 CT 사진을 보는데 자꾸 내 어릴 때 기억이 떠올라. 그 아기 환자와 나의 공통점은 태어날 때부터 지지리도 재수가 없었다는 거지.”
“하지만 너한테 수술받아서 괜찮아지면 그 아기는 그런 거 모르고 성장할 수 있겠지.”
날씨는 이제 더워지고 있는데, 태혁은 추운 사람처럼 몸을 웅크렸다.
“내 말은 내가 내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수술 중에 실수할 수 있다는 거야. 그 작은 몸은 내 실수 한 번으로 끝장날 수 있고.”
태혁은 연구실에서 혼자 수술 과정을 시뮬레이션해 보았다.
그런데 자꾸만 사념이 끼어들어서 끝까지 해내지 못했다.
이 수술에서 태혁은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다고 한 거였다.
“그건 네가 극복해내야 할 일이지.”
“네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할래!”
태혁은 버럭 성을 냈다.
그런 태혁을 보며 차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너도 문나영한테 쉽게 말하면 안 되지. 너와의 감정 문제 때문에 레지던트 1년 차인 문나영이 실수하면 넌 그걸 극복 못 한 문나영 탓이라고 할래?”
태혁은 할 말을 잃은 눈으로 차현을 쳐다볼 뿐이었다.
나영도 그가 수술을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에 실망이라고 말했는데 차현까지 이 일을 나영과 연관시키며 그를 몰아가니 견디기 힘들었다.
차현은 구구절절하게 태혁을 설득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최태혁은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태혁이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일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몸을 돌리며 마지막으로 태혁에게 충고했다.
“네가 수술 안 한다고 대한민국에 그 아기 수술해줄 의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네 의사 인생이 끝장나는 것도 아냐. 그런데 너 그 아기 수술 못 할 거 같으면 너도 문나영한테 손 떼. 네가 못 하는 걸 그 여자한테 강요하지 말라고.”
태혁은 떠나는 차현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꼼짝할 수 없었다.
차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를 아프게 찔러댔다.
이럴 때는 친구가 아니라 원수다.
***
나영은 얌전히 앉아서 기다릴 수 없어서 병원 정문까지 나와서 두 사람이 돌아오길 서성이며 기다렸다.
그런데 갈 때는 두 사람이었는데, 돌아온 건 차현 혼자였다.
나영은 당황해서 물었다.
“최태혁 교수님은 어디 계세요?”
차현은 무심한 손짓으로 응급실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그만 갈게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래서 그가 최태혁 교수를 잘 설득했다는 건지, 아닌지 판단이 안 되었다.
나영은 차현이 이곳에 왔을 때처럼 폼나게 포르쉐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최태혁 교수를 찾아서 뛰어갔다.
그녀가 최태혁 교수를 발견했을 때 그는 전에 만났던 응급실 근처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교수님.”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최태혁 교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영을 올려다보았다.
나영은 그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수술은 집도의로 들어갈 교수님이 결정할 문제인데 제가 말이 너무 심했어요. 죄송해요.”
“아냐. 네 말 틀린 거 없어. 지금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최태혁 교수가 자신에 대해 이리 가혹하게 평가하는 건 처음이라서 나영은 죄책감을 느꼈다.
결국 그가 그리 생각하도록 그녀가 몰아간 거 같아서.
나영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가 입을 열었다.
“저한테도 죽어도 떠올리기 싫은 과거가 하나 있어요.”
나영이 이 이야기를 남에게 먼저 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젠 괜찮다고 생각했는데도 말하는 순간 그 꽉 막힌 트렁크 속이 다시 떠올라 숨이 버거웠다.
그래도 나영은 끝까지 말했다.
“그 일 때문에 우리 가족 전체가 영향을 받았어요. 어머니는 죄책감에 시달리시고, 아버지는 병적으로 절 보호하려 하시고, 마냥 장난꾸러기였던 남동생은 이제 부모님이랑 내 눈치 보는데 도가 텄어요.”
그리고 그녀는 사람에게 방어적인 성격을 가지고 되었다.
아마 그가 이리 약해진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그녀의 입으로 이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데 정말 고마운 사람도 있어요. 그때 저 구해준 사람. 한 번은 꼭 다시 만나서 구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태혁은 멍하니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는 나영이 이런 이야기를 먼저 해줄 줄은 몰랐었다.
그녀는 항상 그가 다가가려고 해도 거리를 두려고 애썼으니까.
먼저 그에게 성큼 다가온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가장 여린 부분을 두드렸다.
“교수님도 어머니한테 고맙지 않으세요? 어머니가 교수님을 살려주셨으니까 이렇게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셨잖아요.”
나영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서로의 아픈 살을 내보이는 이 순간이 견딜 수 없이 쓰라리면서도 한없이 서로의 마음이 투명하게 느껴졌다.
이제야 겨우 육체적인 관계로 시작된 사이를 넘어서 마음과 마음이 닿은 것만 같았다.
태혁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결정해줘.”
“네?”
나영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의 눈을 마주했다.
“네가 수술하라고 하면 할게.”
엄청난 결정이 그녀에게 돌아오자 나영은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하지만 그녀는 그처럼 고민하는 데 시간을 쓰지 않았다.
“그럼 하세요.”
그녀의 확실한 대답에 최태혁 교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그를 절벽 끝으로 밀었다는 듯이.
하지만 그녀는 대답을 번복할 수 없었다.
의사로 살면서 평생 이런 환자를 만날 때마다 피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건 의사의 도리가 아니었다.
나영은 의사 최태혁이 그의 실력에 걸맞게 떳떳하길 바랐다.
“전 교수님이 수술 성공할 거라고 믿어요.”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외과 의사 최태혁은 무적이라고.
***
최태혁 교수가 생후 12개월 아기의 간이식 수술을 집도하기로 결정 나자 병원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역시 최태혁이라고 믿어주는 쪽과 그가 실력 없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억지로 수술하는 거로 의심하는 쪽으로.
누가 뭐라고 하든 수술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기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이 별로 많지 않았기에.
수술대 앞에 선 태혁은 작아도 너무 작은 환자를 내려다보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이 수술이 끝난 뒤 넌 건강해지고, 난 문나영이랑 바다 가고.’
좋은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문나영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어쩌면 그가 살면서 처음으로 가지게 된 행운인지도 몰랐다.
그녀가 행운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날 그가 그녀를 놓치지 않고 만날 수 있었겠나.
그러니 그의 운을 믿을 수 없다면, 그녀가 준 행운을 믿어보기로 했다.
태혁은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며 냉정해진 눈빛으로 마취과 의사에게 물었다.
“환자 상태 어떻습니까?”
“안정적입니다. 수술 시작하셔도 됩니다.”
메스를 손에 잡자 그의 마음은 평소 수술할 때처럼 고요해졌다.
그때 느꼈다.
문나영의 말이 맞다는 걸.
그는 이 수술에 성공할 거다.
의사 최태혁은 인간 최태혁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다.
***
태혁이 보호자 대기실로 갔을 때 아기의 아버지이면서 공여자의 남편인 남자는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오늘 가족이 모두 수술에 들어갔으니 그의 마음이 어떨지는 그 자신밖에 모를 거다.
“한울 보호자 맞으시죠?”
아기 이름을 듣고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제가 아빠입니다. 수술 어떻게 됐나요?”
태혁은 평소 하던 대로 간단하게 수술의 결과를 알렸다.
간이식은 잘 되었고, 수술이 끝난 후 집중치료실로 옮겨져 회복하게 될 거라고.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는 말에 아기 아빠는 눈물을 쏟아내며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제야 태혁도 이 수술에 대한 마음의 매듭을 제대로 맺을 수 있었다.
앞으로 간담췌 외과의 의사로 근무하면서 또 어린 환자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안 생겼지만, 그래도 다시 마주하게 되었을 때 좀 더 의사의 마음으로 환자를 대할 수 있을 듯했다.
이젠 그가 해야 할 일을 끝냈으니까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나영에게 연락하기 위해서 핸드폰을 손에 잡았는데 그녀가 보낸 메시지가 먼저 와 있었다.
<옥상으로 오세요.>
태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네, 오라면 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