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오해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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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오해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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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오해하지 마세요
2022.12.30.
검진센터로 간다는 최태혁 교수의 전화를 받고 나영도 준비한 선물을 들고 내려갔다.
최태혁 교수의 입을 통해서만 듣고, 미슐랭급 도시락으로만 만났던 황 여사님을 이제 곧 만날 생각을 하니 긴장되었다.
진짜 상견례라도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한 걸 최태혁 교수가 눈치라도 채면 정말 창피할 거다.
나영은 괜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엘리베이터의 계기판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나영은 내려서서 앞으로 걸어갔다.
검진센터 앞에 앉아 있는 최태혁 교수는 금방 발견했다.
그의 옆에 있는 중년 여인은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아주 귀여운 여사님이었다.
항상 미소가 걸려 있을 거 같은 부드러운 첫인상에 나영은 긴장했던 마음이 풀렸다.
가까이 다가간 나영은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최태혁 교수님 밑에서 전공의 수련하고 있는 문나영이라고 합니다.”
그녀의 인사에 황 여사의 얼굴에서 미소가 더 커졌다.
“호호호. 맞네. 맞아.”
뭐가 맞다는 건가 싶어서 나영은 힐긋 최태혁 교수를 봤는데, 그는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보통 이럴 때는 두 사람을 다 알고 있는 그가 나서서 소개를 해줘야 하는데,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나영은 먼저 들고 온 선물을 황 여사에게 내밀었다.
“이건 그동안 도시락에 대한 제 작은 성의예요. 받아주세요.”
“어머나! 이런 거 안 줘도 되는데. 나야 돈 받고 일하는 가정부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예요.”
“흠. 어차피 황 여사님 드리려고 산 거니까 받으세요.”
태혁이 대신 그녀의 손에서 선물을 받아서 황 여사님 손에 쥐여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도 몇 번 실랑이가 있었지만, 결국 황 여사는 선물을 받으며 난처한 듯 좋은 듯 미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고용인과 가정부라기보다는 정말 한 가족 같은 모습이었다.
최태혁 교수의 이런 친근한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나영은 기분이 묘해졌다.
사실 황 여사님을 만나면 앞으로 도시락은 만들 필요 없다고 말하려 했는데. 어쩐지 그 말이 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거 같아서 나영은 말이 쉽게 안 나왔다.
그녀가 그 말을 하면 진짜 황 여사님을 그냥 가정부 취급하게 되는 거 같아서.
그래서 나영은 도시락 칭찬만 했다.
“도시락 정말 맛있었어요. 요리를 엄청나게 잘하세요.”
황 여사님은 별거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겸손하게 말했다.
“아휴! 아니에요. 우리 어르신 입맛이 워낙…….”
“쿨럭!”
태혁이 옆에서 기침하자 황 여사는 갑자기 다른 말씀을 하셨다.
“내가 검진 때문에 아침을 걸렀더니 몸에 힘이 하나도 없네.”
“아! 내시경하셨으면 점심은 죽으로 드셔야 할 텐데.”
“그냥 밥 먹어도 괜찮아요. 오늘은 내가 직접 도시락 가져왔어요.”
황 여사님이 들고 온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며 활짝 웃으셨다.
나영은 어찌해야 하나 싶어서 최태혁 교수를 보았다.
“그럼 네가 식당으로 모시고 가서 같이 밥 먹어.”
“제가요? 교수님은요?”
최태혁 교수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일정이 있다고 했다.
“난 환자 가족들이랑 상담이 있어.”
“그런데 저도 중간에 콜 오면.”
황 여사님만 남겨두고 가야 해서 걱정인데, 태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럼 홍식이 부르면 돼. 편하게 모시고 가.”
“그래요. 홍식이가 운전을 잘해서 금방 와요.”
나영은 만난 적도 없는 홍식이란 사람도 꼭 이 자리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최태혁 교수는 진짜 먼저 떠나버렸다.
남겨진 두 사람은 몇 초 동안 웃으며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거 참. 굉장히 어색한데 은은하게 따뜻한 기분이, ……진짜 묘했다.
***
사실 최태혁 교수가 환자 가족 핑계를 대며 일부러 자리를 피한 거라는 걸 알았다.
그녀와 그가 함께 움직이면 분명 병원 사람들의 눈에 더 띌 테니까.
그래서 초면인 두 사람만 함께 식사하게 된 상황이 되었다.
두 사람의 공통된 화제는 최태혁밖에 없었기에 나영은 자연스럽게 그에 대해 황 여사에게 묻게 되었다.
“최 교수님 가족은 할아버지랑 또 누가 있어요?”
가족 이야기에 황 여사님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다.
“그게. 우리 최 교수가 좀 외롭게 컸어요.”
그리고 더 이상 부모님에 대한 말이 없어서 분위기가 좀 어색해졌다.
외롭게 컸다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었지만, 나영은 굳이 캐묻지 않기 위해서 장어 이야기를 꺼냈다.
“교수님이 그러는데, 그때 싸주신 장어 때문에 할아버님이 쫓아낼 수 있다고 겁을 주던데. 사실 아니죠?”
“아휴. 우리 어르신이 쫓아낸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요. 30년 동안 백 번도 넘게 들은 거 같아.”
1%의 거짓도 없다는 듯이 황 여사의 주름진 표정 속에 그 긴 세월 동안의 고생이 녹아들어 있었다.
나영은 놀라서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런데도 계속 그 집에 계시는 거예요?”
“내가 가버리면 두 사람이 밥도 못 먹을 게 뻔한데 어떻게 가겠어요.”
두 사람?
그게 할아버지와 최 교수를 말하는 거 같아서 나영은 잠시 표정이 굳었다.
그럼 부모님이, ……안 계시는 건가?
나영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교수님보다 더 독한 분이신가 봐요. 최 교수님도 병원에서 독한 성격으로 유명하거든요.”
황 여사는 그게 다 유전이라고 한탄하시면서 명란 계란말이를 하나 집어서 그녀의 밥그릇에 놓아주었다.
“많이 먹어요.”
나영은 계란말이를 집어서 크게 베어 물었다.
그런 나영을 황 여사가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어쩜 이리 먹는 모습도 예쁠까. 최 교수가 반할 만하네.”
혼잣말이 그녀가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기에 나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결국 끝까지 최태혁 교수의 부모님에 대해서는 묻지 못했다.
아마 최태혁 교수한테도 못 물어볼 거 같았다.
***
나영과 황 여사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배려한 태혁이 찾아간 곳은 또 오승준의 연구실이었다.
아직 집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었으니까.
“문나영 때문이지?”
화를 내며 따져 묻는 승준에게 태혁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맞아.”
“넌 양심이라는 게 있냐! 여자 때문에 나보고 집을 포기하라니!”
동생 승희한테 그가 나가면 문나영이랑 같이 살 거라는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최태혁이 이러는 이유를 깨달았다.
처음부터 알아챘어야 했다.
최태혁이 이상하게 굴 때는 언제나 문나영이 관련 있다는 걸.
“언제 포기하랬어. 잠깐 내 집에 와서 같이 살자고 한 거지.”
“그게 그거지! 내가 그 집 대출금 갚느라고 얼마나 뼈 빠지게 일하고 있는데.”
“그럼 내가 대출금 이자 내줄게.”
“됐어! 원금 갚아줄 거 아니면 말도 꺼내지 마.”
“그건 네가 도둑놈이지.”
“내가 아니라 네가 도둑놈이야!”
쾅!
오승준은 한껏 화만 내고는 문을 세게 닫고 떠나버렸다.
항상 실실 웃으며 사는 오승준도 집 문제에 대해서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태혁은 미간을 찌푸리고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오승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것도 안 통하면 진짜 답이 없었다.
<소개팅 시켜줄게. 차현 아는 여자 많아.>
메시지를 보내고 5분 정도 지나자 연구실 문이 다시 열렸다.
다시 돌아온 오승준은 자못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한 번으로는 안 돼. 성사될 때까지.”
태혁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출금 이자도 내줘.”
“…….”
태혁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밥도 해줘.”
“적당히 해라.”
그는 집을 옮기라고 했을 뿐이지, 호구가 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
[우리 오빠 집 나가! 너 당장 짐 들고 들어와.]
승희의 전화를 받은 나영은 얼떨떨했다.
이게 진짜 될 줄이야.
도대체 최태혁 교수가 어떻게 오승준을 설득한 건가 싶었다.
어른답게 해결했다고 믿고 싶을 뿐이다.
그녀가 같이 살 룸메이트를 구했다고 전하자 아버지도 그제야 강력하게 반대하지 못했다.
그래도 조건을 걸었다.
살면서 문제가 생기면 바로 집으로 돌아오기로.
병원 오프일 때는 반드시 집에 오기로.
그녀의 이사는 간단했다. 병원 숙소에 있는 짐을 가방에 넣어서 옮기면 되었다.
그녀가 오승희와 함께 살게 된 걸 안 동료들이 집들이하라고 한마디씩 건넸다.
“집주인 허락 받고.”
그녀가 웃으며 하는 말에 다들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집주인이 오승준 교수라는 걸 아니까.
오승준과 최태혁이 함께 살게 된 건 아무도 감히 축하하지 못했다.
가장 먼저 말 꺼내는 사람이 뼈도 못 추릴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나영한테는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생겼다.
독립할 수 있게 도와준 최태혁 교수한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너무 넘치지도 않고, 너무 모자라지도 않게 감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꽤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
나영은 내과에서 트랜스퍼한 환자에 대해 최태혁 교수에게 브리핑했다.
“메티마졸 때문에 간부전이 온 환자입니다.”
갑상선기능항진증 치료제의 복용으로 간독성이 발생하는 건 극히 드문 케이스였다.
최태혁 교수는 환자의 의료기록을 꼼꼼하게 확인하였다.
“갑상선 치료하기 전에 이미 간 쪽 기저질환이 있었네.”
“네, 간경화를 앓았습니다.”
그래서 약을 끊은 뒤에도 간 기능이 회복되지 못하고 최악의 상황이 되어 버렸다.
환자는 이제 간이식을 받아야만 살 수 있었다.
브리핑을 끝낸 나영은 힐긋 최태혁 교수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녀의 집을 구해준 뒤 최태혁 교수는 별말이 없었다.
도시락의 장어 한 마리에는 그렇게 티를 내며 황 여사님의 용기와 희생을 강조했던 사람이 정작 더 대단한 집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으니까 너무 이상했다.
결국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저기, 교수님. 집들이에 초대하고 싶은데 언제가 괜찮으세요?”
어떻게 보답할까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집들이에 초대하기로 했다.
집에 대한 감사니까 그게 제일 적당한 거 같았다.
환자 CT를 보던 최태혁 교수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집들이?”
끄덕끄덕.
최태혁 교수가 그녀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며 또 물었다.
“네가 나 초대하는 거야?”
끄덕끄덕.
“그러니까 병원 밖에서 만나자는 거네.”
이번에 그녀는 또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가 기대하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기에.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의미는 아니었다.
단지 고마운 일에 대한 감사를 표하려는 거였다.
“오해하지 마세요.”
“아! 내가 집들이 가면 오해하는 거구나. 그럼 가면 안 되겠네.”
나영은 그가 오해하는 것도 곤란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집들이에 안 오는 건 더 마음이 안 좋았다.
“제가 감사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으면 너무 염치없게 느껴져서 그 집에서 못 살 거 같아요. 그러니까 와 주시면 안 돼요?”
그녀가 사정하는 건 참 드문 일이기는 했다.
그런데 너무 정중해서 탈이었다.
“그러니까 넌 나한테 빚지기 싫다는 거지?”
그가 묻는 말에 나영은 입이 다물어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냉정해졌다.
“계산 정확하게 하자는 거잖아. 정 없이.”
나영은 속이 울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