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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맞선 본다고? (24/84)


24화. 맞선 본다고?
2022.12.23.



 
훅 치고 들어오는 동거 제안에 나영은 잠시 머리가 멍했다.

최태혁 교수가 그녀와 함께 떡볶이를 먹어주었다고 잠시 그한테 방심했나 보다.

그의 앞에서 방심하면 큰일 난다는 걸 이리 가르쳐 주고 있었다.

세 번의 기회가 끝날 때까지 그녀는 그를 거절할 수도 없지만, 반드시 조심해야 했다.

그녀의 레지던트 1년 차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나영은 업무용 미소를 지으며 받아쳤다.


“남호진 선배도 집 구하고 있던데. 그럼 남 선배랑 같이 사시면 되겠네요.”

최태혁 교수는 바로 인상을 썼다.


“나보고 혈압 올라 죽으라는 거야?”

“그럼 저보고 아빠한테 죽으라는 소리세요?”

나영이 거듭 아버지가 엄격하다는 걸 강조하자 태혁은 팔짱을 끼며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만난 적도 없는 나영의 아버지가 두 사람의 관계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어쩌면 그녀가 레지던트 1년 차인 것보다 아버지 쪽이 더 어려울지도 몰랐다.

나영은 바로 다가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려 잡았다.


“그럼 전 택시 타고 갈게요.”

“아! 잠깐!”

태혁이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나영은 그 어느 때보다 잽싸게 택시를 타고 떠나버렸다.

태혁은 떠나는 택시를 보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날 버려두고 간다고?”

벌써 두 번의 기회를 써버렸는데, 그녀는 전혀 잡힐 기미가 안 보였다.

태혁은 자신이 도대체 뭘 실수한 건지 알아내기 위해서 바로 차현을 찾아갔다.

***



“떡볶이를 먹었다고?”

차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며 거듭 물었다. 분명 자신이 잘못들은 게 맞을 거라는 표정으로.


“문나영 먹고 싶은 걸로 먹으라며.”

태혁은 자신이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영이 데리고 간 분식점 떡볶이는 진짜 맛있기도 했다.

파스타보다는 몇 배나 나았다.


“그렇다고 여자랑 데이트에 떡볶이를 먹었다고?”

차현은 이제 웃음이 나왔다.

태혁은 원래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젠 문나영도 정상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너한테 정 떼게 하려고 일부러 떡볶이집에 데리고 간 건 아니고?”

차현이 부정적으로 하는 말을 태혁은 동의할 수 없었다.


“진짜 단골집이던데. 거기 주인이 문나영을 먼저 알아봤어.”

“그게 사실이라도 네 여자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떡볶이집에는 안 데리고 갔을 거 같은데.”

문나영이 그의 연인이 될 마음이 조금도 없어서 분식집으로 가자고 했다는 말에 태혁도 표정이 굳어졌다.


“왜?”

“떡볶이 먹으면서 내숭은 못 떨잖아.”

태혁은 얼굴을 찌푸리며 부정했다.


“문나영은 원래 내숭 없어.”

“원래 내숭 없는 여자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남자 앞에서는 자신을 포장하고 예쁘게만 보이고 싶어 해. 본능 같은 거야.”

태혁이 입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하자 차현은 그의 어깨를 손으로 두드리며 위로했다.


“아직 기회 한 번 더 남았다며.”

그도 알았다. 벌써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정말 문나영은 날 조금도 안 좋아하는 걸까?”

차현은 문나영이 아니라서 대신 대답해 줄 수 없었다.


“그럼 넌 왜 문나영이 좋아진 거야?”

차현은 그게 더 신기했다.

그녀가 예쁜 얼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정도로 예쁜 여자가 문나영뿐인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태혁한테 소개해 주었던 여자들이 더 예쁘고, 더 화려하고, 더 사교적인 성격이었다.

그런데 태혁은 그런 여자들한테 한 번도 눈빛이 흔들린 적이 없었다.

문나영이 의사라서 잘 통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 역시 태혁을 좋아한 여의사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녀들이 레지던트 1년 차인 문나영보다 더 숙련된 의사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아주 오래 알고 지낸 사람 같은 느낌이었어.”

“그래? 진짜 옛날에 만난 적 있어?”

태혁은 고개를 저었다.

만난 기억도 없는데 만난 거 같다고 하자 차현은 그저 웃고 말았다.

친구가 심각해 보였기에, 유치한 운명론이라고 놀리지는 않았다.

***

나영은 택시를 타고 본가로 갔다.

쉬는 날에도 집에 가지 않으면 정말 갈 시간이 없었기에, 시간이 늦었지만 일부러 병원이 아니라 집으로 갔다.


“어머. 이거 내가 사준 옷 맞지?”

나영이 처음으로 사준 옷을 입고 집에 온 걸 보고 어머니 연희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셨다.


“역시 잘 어울린다.”

어머니는 좋아하셨지만 아버지는 그녀의 옷차림을 보자마자 왜 병원에서 그리 꾸미고 다니는 거냐며 한소리 하셨다.

그래서 나영은 바로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어머니는 늦게 온 그녀를 위해 간단하게 저녁상을 차려주셨다.

나영은 전혀 배고프지 않았지만 식탁 앞에 앉았다.


“휘영이는요?”

나영은 보이지 않는 동생을 찾으며 수저를 잡았다.


“놀러 나갔어. 요즘 거의 집에 안 붙어 있네.”

곧 군대 가는 게 아니라 곧 세상의 종말이라도 오는 것처럼 사는 거 같아서 나영은 실소를 지었다.


“휘영이가 집에 안 들어와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 안 하세요?”

그녀가 그랬다면 분명 집안이 난리가 났을 거다.


“곧 군대 가잖니.”

평소였다면 그녀도 이해하고 넘겼을 일인데, 오늘은 최태혁 교수가 그녀의 거취에 대해서 딱 꼬집어 말했기 때문인지 말이 목에 걸렸다.

왜 남동생은 자기 멋대로 살아도 용납되고, 그녀는 직장 때문인데도 독립을 마음대로 못 하는 건가 싶었다.

나영은 젓가락으로 밥알을 몇 개 집어먹다가 결국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엄마, 나 독립하면 안 돼요?”

그 말을 꺼낸 순간 깨달았다.

그녀는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그녀가 하고 싶은 걸 부모님 앞에서 말해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



<점심시간에 도시락 받으러 와.>

아침을 명령 같은 최태혁 교수의 메시지로 시작했다.

멋대로 시간 변경한 게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굳이 토를 달지는 않았다.

이제 황 여사님 건강검진 받으러 오시면 도시락 받으러 갈 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점심시간에 최태혁 교수의 연구실로 찾아간 나영은 창가에 놓인 어항 속 노랑과 까망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까망이가 여기 있어요?”

그녀가 키우기로 했던 물고기였다.


“네가 잊어버리고 갔잖아.”

잊어버린 게 아니라 오늘 찾아갈 생각이었다.


“지금 저한테 주세요.”

“안 돼. 너 병원 밖에 집 구하기 전에는 못 줘.”

분명 그녀한테 키우라고 사준 거면서 이젠 조건을 달자 나영은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병원 숙소에서 키우는 것보다 내 방이 백 배는 나아.”

나영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병원 숙소는 잠만 잘 수 있게 마련된 공간이었다. 물고기를 키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럴 거면 왜 사주셨어요?”

“난 네가 집 구할 마음이 있어서 까망이 받은 줄 알았지.”

결국 그녀의 탓이라는 소리였다.

나영은 반박할 말을 못 찾아서 최태혁 교수의 얼굴을 조용히 노려보다가 테이블에 도시락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

나영은 놀라서 물었다.


“교수님도 점심 도시락 드셨어요?”

“아니, 오늘은 너랑 먹을 거라고 했더니 황 여사님이 만들어 준 거야.”

이젠 황 여사님 도시락도 익숙해졌고, 어제는 그와 병원 밖에서 만나기도 했지만, 나영은 여전히 이런 친근함을 경계하게 되었다.


“내일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앉기나 해.”

아직도 서 있는 그녀에게 태혁이 앉으라고 손짓했다.

나영은 그제야 그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으려고 했는데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호출콜인가 싶어서 그녀와 태혁은 동시에 멈칫했다.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한 나영이 안심하며 말했다.


“동생이에요.”

태혁도 안심하며 도시락통을 열었다.

나영은 창가 쪽으로 걸어가서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왜?”

[누나, 엄마한테 독립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어?]

어머니는 기회를 봐서 아버지와 이야기해보겠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그녀가 출근한 뒤 아침 식사 자리에서 그녀의 독립 이야기를 꺼냈나 보다.


“그래.”

[아빠가 누나 집 나가고 싶으면.]

동생은 뒷말하기 전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맞선보고 결혼해서 나가래.]

나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최태혁 교수를 보았다.

그는 젓가락으로 장어를 집어 올리고 있었다.


 


“……알았어. 그만 끊어.”

[알았다고? 진짜 맞선 본다고?]

“아니. 집 안 나간다고.”

뚝.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린 나영은 태혁의 곁으로 걸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아직도 장어를 먹지 않고 쳐다만 보고 있었다.


“왜 안 드세요?”

그러고 보니 도시락 반찬으로 장어가 나온 건 처음인 거 같았다.

장어가 스태미너 음식이라 나영은 좀 신경이 쓰였다.

설마 황 여사님이 이런 식으로 사심을 듬뿍 표출하실 줄은 몰랐다.


“너 먼저 먹어.”

최태혁 교수가 그녀의 밥 위에 장어를 올려주었다.

나영은 바로 장어를 집어 그의 밥그릇으로 다시 옮겨주었다.


“교수님이 많이 드세요.”

“난 많이 먹으면 큰일 나.”

서로 먼저 장어 먹으라고 실랑이하다가 결국 그녀가 졌다.

나영이 장어를 한 입 먹으려고 하는데 최태혁 교수가 물었다.


“네 동생은 왜 전화한 거야?”

“쿨럭!”

황 여사님의 장어를 하마터면 토해낼 뻔했다.

그녀가 갑자기 기침을 심하게 해대자 태혁은 바로 물병의 뚜껑을 열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나영은 물병을 받아서 물을 꿀꺽꿀꺽 넘겼다.

그제야 좀 진정이 되었다.

최태혁 교수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게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져서 나영은 할 수 없이 말했다.


“쿨럭. 아빠가 제 독립 허락 안 한다고요.”

맞선 이야기는 뺐다.

잘못한 것도 없이 괜히 찔렸으니까.


“그럼 우리 집밖에 없네.”

“거긴 제가 싫어요.”

“그럼 오승준을 우리 집에서 키울 테니까 거기로 가던가.”

그건 생각도 못 한 제안이라서 나영은 멈칫했다.

승희는 지금 오빠인 승준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보고 절친인 승희와 함께 살라는 소리였다.

그건 그녀한테도 전혀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오 교수님이 허락하셨어요?”

오승준 교수보고 멀쩡한 본인 명의의 집 놔두고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라는 건데, 과연 그걸 좋아할까?

제정신이 박혔으면 당연히 싫어할 거다.

최태혁 교수는 장어 한 조각을 또 그녀의 밥그릇 위에 올려놓으며 호언장담했다.


“내가 말하면 허락할 수밖에 없어.”

이쯤 되면 오승준 교수를 걱정해줘야 할 거 같았다.


“제 독립인데 왜 교수님이 그렇게 신경 쓰세요?”

그녀의 아버지는 반대하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설득할 힘이 없고, 그녀는 거의 포기했다.

최태혁 교수는 밥을 먹으며 쉽게 대답했다.


“네가 집이 있어야 까망이를 키우잖아.”

까망이 때문이라는 말에 나영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까망이를 볼 때마다 내 생각이 나겠지.”

나영은 웃음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처음엔 먹을 걸로 세뇌하더니, 이젠 반려 물고기까지.


“지금 절 길들이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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