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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우리 집으로 와 (23/84)


23화. 우리 집으로 와
2022.12.19.



“지금은 어떤데?”

그가 기다리지 못하고 대답을 재촉하자 나영은 발의 방향을 바꾸어 먼저 걸어가며 새침하게 말했다.


“오늘 어떤지 보고 대답해 드릴게요.”

하는 거 봐서 대답할 테니까 잘하라는 경고에 태혁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잠시 상어를 바라보다가 나영을 쫓아서 걸어갔다.


“그럼 내가 오늘 젠틀한 상어가 어떤 건지 보여줄게.”

독사 교수가 젠틀을 입에 올리다니.

병원 사람들이 저 말을 들었다면 독사가 미친 거 같다고 떠들었을 거다.


“저녁은 뭐 먹고 싶어? 네가 먹고 싶은 거 뭐든 말해.”

젠틀한 상어 씨는 그녀에게 식사 메뉴를 물었다.

그가 젠틀함을 보여주는 방식이 단순해도 너무 단순해서 나영은 속으로 혼자만 웃었다.


“저는 파스타요.”

나영은 무난한 메뉴를 골랐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서 나영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최태혁 교수는 그제야 말했다.


“그래, 내가 파스타 잘하는 가게 알아. 거기로 가자.”

말은 그렇게 하는데 그의 눈빛은 수족관 속 물고기를 볼 때처럼 편해 보이지 않았다.

마치 파스타에 사연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파스타 싫으시면 바꿔도 돼요.”

“나도 파스타 좋아해. 안 그럼 파스타 맛집을 어떻게 알고 있겠어.”

뭔가 최태혁 교수치고 너무 장황한 설명이었다.

평소보다 살짝 커진 눈도 부자연스러웠다.

그래도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나영도 굳이 바꾸지 않고 다른 말로 넘어갔다.


“밥 먹기 전에 갈 곳 있는데, 괜찮으세요?”

그녀의 말에 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쿠아리움을 나와서 나영은 최태혁 교수와 함께 물고기를 살 수 있는 수족관으로 향했다.


“제가 반려 물고기 사드릴게요. 좋아하는 걸로 골라 보세요.”

사달라는 게 아니라 사준다는 말에 태혁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한테 이걸 왜 사주는데?”

“교수님이 물고기를 키우면 성격이 좀 더 좋아지실 거 같아서요.”

그녀의 농담에 최태혁 교수가 뚱한 표정을 짓자 나영은 웃으며 그제야 솔직하게 말했다.


“은별 사건 저 많이 도와주셨잖아요. 그래서 고마워서 드리는 선물이에요.”

“그럼 난 받을 수 없는데.”

최태혁 교수가 거절할 줄은 몰랐던 나영은 살짝 당황했다.


“윤이나가 널 궁지에 몬 건 나 때문이야. 그러니 내가 해결하는 게 맞는 거였어. 그런데 그 일로 내가 어떻게 선물을 받겠어.”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라서 나영은 선물을 사주기가 애매해졌다.


“그래도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는 건 아깝잖아요.”

태혁은 수족관 속 물고기들을 둘러보다가 그녀에게 제안했다.


“그럼 서로에게 어울리는 물고기를 골라서 한 마리씩 키울래?”

나영은 한 번도 무언가를 키운 적이 없지만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최태혁 교수가 그녀가 선물하는 물고기를 기분 좋게 받을 거 같았으니까.

두 사람은 물고기를 고른 뒤 다시 만나기로 하고 반대 방향으로 흩어졌다.

나영은 여러 종류의 물고기를 둘러보다가 지느러미와 꼬리가 말 갈퀴처럼 멋지게 펼쳐진 검은색 베타 물고기 앞에서 멈추어 섰다.

나영은 직원을 불러서 검은색 베타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 검은색 물고기로 주세요.”

그녀가 물고기를 고르고 돌아가자 최태혁 교수는 이미 물고기를 골라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고른 건 옐로우허니구라미야.”

최태혁 교수가 보여준 물고기는 노란색의 예쁜 물고기였다.
 

 
태혁은 그녀가 고른 물고기를 보고 쯧 혀를 찼다.


“너한테 난 시커먼 놈인가 보지.”

“멋있어서 고른 거예요.”

그녀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꼬리가 얼마나 멋진지 어필했지만 최태혁 교수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안 좋아하는 걸 보니 진짜 닮은 물고기를 잘 고른 거 같았다.

물고기 이름은 ‘노랑’, ‘까망’으로 하기로 했다.

그녀를 닮은 노랑이를 최태혁 교수가 키우겠다고 해서 그녀는 까망이를 키우게 되었다.

***

수족관을 나와서 두 사람은 태혁이 알고 있다는 파스타 잘하는 가게로 향했다.


“교수님 진짜 파스타 좋아하세요?”

그녀가 또 묻자 운전하던 최태혁 교수가 크게 한 번 웃으며 말했다.


“좋아한다니까. 파스타로 하루 세끼 먹은 적도 있어.”

“…….”

그녀가 말없이 쳐다보자 최태혁 교수는 얼굴에서 웃음을 유지하며 서서히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루 세끼는 너무 심했나.


“사실 전 파스타 별로 안 좋아해요.”

그녀의 고백에 그가 빠르게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를 보았다.


“뭐? 그런데 왜 파스타 먹자고 한 거야?”

“무난하잖아요.”

태혁은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지으며 정면을 보았다.

나영이 파스타라고 해서 역시 그는 운이 없는 팔자라고 다시 한번 절감했는데, 그냥 무난해서 고른 거였다니.


“그러니까 교수님이 먹고 싶은 음식 있으면 그걸로 고르셔도 돼요.”

“안 돼. 아쿠아리움도 내가 가자고 한 거잖아.”

식사는 꼭 나영이 먹고 싶은 걸로 고르라고 한 차현의 신신당부가 그의 뇌에 콱 박혀 있었다.

자고로 차현 말 들어서 손해 볼 일은 절대 없었다. 그게 여자 문제라면 더더욱.


“아! 너 회 좋아한다고 했잖아.”

“노랑이 까망이가 있는데 회를 먹자고요?”

그녀가 몰상식한 사람 보듯이 쳐다보자 태혁은 쯧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또 뭐 좋아하는데? 말해봐. 아무거나 상관없으니까.”

그가 무조건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식사하겠다고 고집부려서 나영은 할 수 없이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식탐이 없는 편이라서 떠오르는 메뉴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게 있긴 한데 지금은 좀…….”

“괜찮아. 뭔데? 말만 해. 아무리 비싸도 내가 사줄게.”

최태혁 교수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나영은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떡볶이요.”

“…….”

“의대 공부하면서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승희랑 같이 먹었거든요.”

“지금 나랑 있는 게 스트레스받는다고?”

“아뇨. 떡볶이가 제 소울푸드라고요.”

최태혁 교수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어리다고.

나이 많은 최 교수님은 어떤 대단한 음식을 선택할지 궁금했기에 나영은 그에게 권했다.


“그러니까 교수님 드시고 싶은 걸로 고르세요.”

“아냐. 떡볶이 먹으러 가.”

“네? 진짜 가자고요?”

“못 먹을 게 뭐 있어. 먹고 싶으면 먹는 거지.”

둘 다 호텔 레스토랑에 식사하러 갈 차림으로 꾸미고 나와서 떡볶이 먹으러 분식집에 가면 굉장히 어색할 거라 나영은 이게 진짜 옳은 선택인지 쉽게 판단 내릴 수 없었다.


“진짜 괜찮으세요?”

“너야말로 솔직하게 말해. 파스타가 좋아? 떡볶이가 좋아?”

나영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떡볶이요.”

당연히 소울푸드를 선택했다.


“나도 파스타보다는 떡볶이가 좋아.”

이번에 최태혁 교수의 말은 순도 100%의 진심처럼 들렸기에 나영은 웃고 말았다.

신기한 게 그는 어른스러운 성인 남자인데도 가끔 소년 같을 때가 있다.

그럴 때의 그는 고양이 털처럼 그녀의 심장을 간지럽혔다.

그래서 두 사람은 나영이 잘 아는 분식집으로 가게 되었다.

낡고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태혁은 분식집의 메뉴를 거의 전부 주문했다.

테이블이 음식들로 가득 차자 나영은 먹지 않았는데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전 절대 이거 다 못 먹어요.”

“걱정 마. 내가 다 먹어.”

최태혁 교수는 빨리 먹는 대신 많이 먹는 거로 그녀와 식사 리듬을 맞추었다.

나영에게는 익숙한 장소였기에 대화하기도 편했다.

그래서 최태혁 교수에게 궁금한 걸 먼저 물을 수도 있었다.


“교수님은 차현 감독님이랑 어떻게 친해지신 거예요?”

“중고등학교 동창이야.”

어릴 때 친구가 없는 나영은 두 사람 사이가 부러웠다.


“그런 친구를 만난 거 보니 교수님 운이 좋으시네요.”

어릴 때도 그의 성격이 좋았을 리는 없으니, 그의 운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말에 그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왜 그런 표정 지으세요?”

“나보고 운 좋다고 말한 사람 네가 처음이라서.”

그가 그저 운명이나 행운 같은 걸 믿지 않아 그리 말했다고 생각해서 나영은 깊게 묻지 않았다.

분식집으로 들어오던 십 대 여학생 무리가 두 사람을 보고 대놓고 서로 쑥덕거렸다.


“교수님. 우리 빨리 먹고 나가요.”

“왜?”

“얘들이 이상한 사람 보듯 하잖아요.”

“이상해서 보는 게 아니라 선남선녀라서 보는 거야.”

그의 뻔뻔함에 나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째 병원을 나오니까 교수님이 레지던트보다 더 철이 없어진 거 같았다.

***

분식집에서 나와서 나영은 최태혁 교수에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헤어져요.”

두 번째 기회에서 드라마틱하게 두 사람 사이가 변한 건 아니었지만 태혁은 굳이 더 욕심내지 않고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중요한 건 마지막 세 번째 기회였으니까.


“집이 어디야?”

“그냥 택시 타고 갈게요.”

“내 차보다 택시가 더 안전하다고? 그건 나한테 너무한 거 아냐?”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기에 나영은 당황해서 해명했다.


“그게 아니라 여기서 우리 집까지 가면 너무 멀어서요. 교수님도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

나영이 병원 숙소에서 계속 지내는 걸 그도 알고 있었기에 기회가 왔을 때 물었다.


“집이 멀면 병원 근처에 자취 집을 구하는 게 낫지 않아?”

그녀의 아버지가 대기업 전무라고 했으니 돈 문제는 분명 아니었다.


“아버지가 허락 안 하세요.”

그녀의 아버지는 엄격한 편이었기에 아마 오늘도 늦게 들어가는 것 때문에 크게 잔소리를 듣게 될 거였다.

그러니 더더욱 최태혁 교수가 데려다주는 게 마음에 걸렸다.

혹시라도 아버지 눈에 띄게 되면 진짜 대형 사고였다.


“네가 시간 없다는 타령을 하는 건 레지던트 생활이 바빠서가 아니라 독립을 안 해서야. 그러니까 자취를 해.”

그래야 연애할 시간도 생기지.

태혁은 나영에게 강하게 자취를 권했다.

그녀를 위해서도, 그를 위해서도 그녀는 집을 나와야만 했다.


“병원에서 자면 되니까 괜찮아요.”

아버지 허락을 받을 자신이 없는 나영은 그냥 현실에 타협했다.

어차피 레지던트 1년 차는 집에 들어가기도 힘들었다.

전공의가 레지던트인 건 병원에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병원 침대가 집보다 편할 리가 있겠어. 그럼 내 집이라도 쓸래?”

그녀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태혁은 그의 집이 얼마나 좋은 조건인지 어필했다.


“병원 건너편 신축 오피스텔이야.”

그도 일부러 병원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골랐으니 거리상으로는 최상의 조건이었다.


“저한테 집 주시면 교수님은 어쩌시려고요?”

그가 그 정도로 희생적인 캐릭터인 줄은 몰랐는데, 역시나 최태혁 교수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우리 집 둘이 쓰기 충분할 정도로 넓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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