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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기회를 줘 (17/84)


17화. 기회를 줘
2022.11.28.


대놓고 이상형이 아니라는 그녀의 말에 태혁은 마음이 상했지만, 그녀는 싸워야 할 상대가 아니라 유혹해야 할 상대였기에 차분하게 이유를 먼저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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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말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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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함부로 하세요.”

그가 묻자마자 나영이 1초의 틈도 없이 바로 말하자 태혁은 욱해서 진짜 말을 함부로 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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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거지.”

최태혁 교수가 포장해서 말하자 나영은 바로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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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말에 누군가 상처받는다면 함부로 말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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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가 이유 없이 인신공격한 적이 있었나?”

그건, ……그의 말이 맞았다.

최태혁 교수는 실수한 레지던트한테 독사 같은 혀를 휘둘렀지, 일 잘하는 사람한테 막말을 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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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건 교수인 나한테 마음에 안 드는 점이잖아. 난 교수로서 너한테 평가받고 싶은 마음 없거든. 날 남자로 봤을 때 마음에 안 드는 점을 말하라고.”

없으니까 교수 최태혁을 걸고넘어지는 거였다.

그를 남자로 보기 시작하면 그녀가 너무 많이 불리했다.

나영은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단호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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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교수님을 남자로 보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말에는 큰 허점이 있었다.

두 사람이 이미 밤까지 함께 보낸 사이라는 거다.

그날 그녀는 분명 그를 한 명의 남자로 대했다.

그러나 태혁은 그걸로 꼬투리를 잡지 않았다. 신사답게.

지금 당장 그를 받아달라고 하면 문나영은 무조건 무리라고 할 거다.

그렇다고 문나영이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는 건 태혁한테 무리였다.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을 줄일 수 있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 과정은 반드시 두 사람 모두에게 공평해야만 했다.

최태혁 교수가 말이 없자 나영은 은근슬쩍 그를 살펴보았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아까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벚꽃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봄이 그를 품어준 것인지, 그가 풍덩 봄에 뛰어든 것인지.

그는 봄이었다.

그녀도 잠시 홀린 듯 최태혁 교수의 나른한 자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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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렇게 하지.”

꽃을 감상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말해서, 나영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의 커진 눈을 보며 태혁은 짧게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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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세 번의 기회를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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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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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 번 도전한 뒤에도 문 선생이 여전히 날 거부한다면 내가 깔끔하게 포기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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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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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내가 세 번의 기회를 다 쓸 때까지 문 선생은 일부러 나 피하면 안 돼. 오케이?”

그를 피해 도망가는 게 습관인 나영에게 최태혁 교수는 확실히 못을 박았다.

그를 피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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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게 수락도 못 하지만, 거절도 못 하는 그녀한테서 태혁은 어떤 가능성을 봤다.

그녀가 지금껏 고백한 남자들을 모두 단칼에 거절했다는 건 이미 오승준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확실히 그를 거절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여지는 있는 거라고 여겼다.

탁.

최태혁 교수가 테이블에 두 팔을 올리고 좀 더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의 몸이 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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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나한테 기회도 주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네가 날 거절한다면 너도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나영은 말없이 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의 자신감이 얄미웠지만, 그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가 그녀한테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였다면 일생의 유일한 일탈을 그와 하지도 않았을 거다.

마음 같아서는 4년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호텔에서 잠든 그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런데 쉽게 그 말이 안 나오는 건, 그녀가 그 말을 꺼내는 순간 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걸 그한테 들킬 것이라.

그녀의 마음을 들키는 순간, 안 그래도 교수와 비교해서 한참 불리한 위치에 있는 레지던트인데 더더욱 불리해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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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거절하면 앞으로 교수님의 지위를 이용해서 절 괴롭힐 게 더 걱정이에요.”

그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나영은 일부러 그를 못된 교수처럼 말했다.

그래야 흔들리는 그녀의 마음을 그한테 안 들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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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거절 안 한다는 거네.”

그가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하자 나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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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해야 할 공부가 아직 많이 남아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교수님.”

일부러 교수님을 힘주어 불렀더니 그가 건조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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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 문 선생. 내가 잘해줄게.”

잘 가르쳐 준다는 것도 아니고 잘해준다니.

친절한 교수인 척하는 독사 교수는 더 위험해 보여서 나영은 서둘러 병원 쪽으로 걸어갔다.

먼저 병원으로 돌아가는 그녀를 태혁도 굳이 또 붙잡지 않았다.

이제 세 번의 기회가 생겼으니까.

그 정도면 충분했다.

태혁은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고 벚꽃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오기 전에 그녀가 넋 놓고 바라보던.

그는 살면서 꽃에 관심을 둔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녀 때문에 올봄에는 자주 꽃을 눈에 담게 되었다.

흰 장미, 그리고 벚꽃.

톡 톡.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태혁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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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식아. 나야.”

차현이 오랜 친구라면, 홍식이는 가족 같은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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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과 병동의 하루는 입원 환자들의 상태를 살피는 걸로 시작되었다.

아무 탈 없이 지나가면 가장 좋았지만, 환자들의 상태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몰랐기에 자주 문제가 발생했고, 그만큼 독사 교수가 레지던트들을 혼내는 일도 많았다.

지난밤에는 환자가 바이탈 사인이 불안정했었는데 당직인 남호진이 자느라고 놓친 일이 발생했다.

아침 회진에서 그걸 알게 된 최태혁 교수가 남호진을 쳐다보았다.

이제 남호진은 죽은 목숨이라서 다들 남호진의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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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피곤했나 보지?”

어쩐 일인지 최태혁 교수의 첫 마디가 꽤 친절했다.

레지던트들은 이제 곧 남호진이 작두에 태워질 거라고 생각했으나, 남호진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요즘 몸이 허해서 잠이 쏟아지고 있다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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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남 선생이 입원 환자보다 더 아플 리는 없잖아.”

분명 잘못을 지적하는 말인데 평소와 달리 너무 온화한 말투였다.

뭐지? 왜 독사가 갑자기 보살 흉내를 내는 거지?

다들 이제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최태혁 교수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아는 나영만이 혼자 헛웃음을 삼켰다.

어제 말을 함부로 한다고 지적했더니, 오늘 남호진과 함께 코미디를 찍고 있다.

과연 어디까지 하는지 지켜보았더니 최태혁 교수는 남호진의 어깨를 손으로 두드리며 격려 비스무리한 것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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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자.”

그리고 이를 꽉 무는 게 보였지만, 남호진은 이미 감동한 표정이었다.

지금껏 그가 실수했을 때 최태혁 교수가 이리 친절했던 적은 처음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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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 교수님!”

우렁찬 남호진의 목소리가 고막을 강타하자 최태혁 교수는 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남호진한테서 멀어졌다.

장담하건대, 3일도 못 가서 저 입이 다시 터질 거다.

그날 최태혁 교수는 레지던트와 인턴과 간호사들에게 한 번도 독한 말을 쏟아내지 않아서 독사 교수가 변했다는 소문이 병원에 빠르게 퍼졌다.

소문을 듣고 오승준도 일반외과까지 구경을 왔다. 희한한 구경거리가 확실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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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괜찮냐?”

의자에 깊게 몸을 파묻고 앉은 최태혁의 눈빛에서 총기가 없어서 승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혁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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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답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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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하루 말조심했다고 화병 걸렸냐?”

말조심하며 살아본 적이 없어서 태혁도 미처 몰랐다. 말 못 하는 고통이 이리 클 줄이야.

진짜 이렇게 계속 말조심하며 살면 화병 걸릴 수도 있을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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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위에서 시킨다고 조심할 놈도 아니고. 갑자기 왜 언행에 신경 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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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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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못 하는 거 보니 또 문나영이네. 이야. 너 별짓을 다 하는구나.”

오승준이 놀렸지만 태혁은 개의치 않았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가 알고 싶은 사람의 마음은 딱 한 명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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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난 문나영 이상형에 멀었나?>

최태혁 교수의 메시지를 받은 나영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고작 하루 말조심하며 살았으면서 이런 질문을 던지다니.

나영은 별 고민도 없이 바로 그에게 답문을 찍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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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교수님 모습, 꼭 AI 의사 같았어요.>

화 안 내려고 어찌나 기계적으로 말하던지.

나영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핸드폰을 책상 위에 뒤집어 놓았다.

삑삑.

그녀의 공부를 방해하기로 작정했는지 메시지는 금방 또 날아왔다.

나영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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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픈 걸 보니 확실히 AI는 아닌 거 같군.>

쿡.

웃음을 터트린 나영은 괜히 진 기분이 들어서 최태혁 교수의 메시지를 흘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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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식 좀 사와.>

야식을 사준다는 것도 아니고 사 오라니.

그녀는 배가 고프지 않다고 보내려는데 최태혁 교수의 메시지가 먼저 도착했다.

그녀가 거절할 걸 미리 짐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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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세 번 기회 줄 때까지 피하지 않기로 한 거 잊지 않았겠지?>

그래서 그 기회를 야식 먹는 데 쓰겠다고?

그가 이렇게 빨리, 이런 식으로 기회를 쓸 줄 몰랐던 나영은 못마땅한 눈으로 메시지를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번의 기회가 끝난 뒤에도 그녀의 마음에 변화가 없으면, 최태혁 교수도 자기가 뱉은 말을 지킬 거다.

그땐 그녀의 탓을 하는 게 아니라 기회를 이리 함부로 쓴 그의 탓을 해야만 했다.

나영은 병원 지하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음료수를 사서 옥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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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옥상으로 오라는 거야?”

멀쩡한 연구실 놔두고 굳이 옥상으로 불러낸 걸 투덜거리며 옥상으로 연결된 계단을 올라갔다.

덜컹.

문을 열고 옥상으로 나가니 탁 트인 서울 야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런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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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교수님?”

먼저 그녀를 불러놓고 어디 있는 건가 싶었다.

나영은 최태혁 교수를 찾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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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나영.”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나영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촤악.

분홍색의 하늘거리는 꽃잎이 그녀의 주위를 에워싸며 나풀나풀 떨어져 내렸다.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최태혁 교수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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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선물 좋아하는 거 같기에, 나도 준비했지.”

최태혁 교수는 다른 손에 있던 꽃잎도 하늘 높이 뿌렸다.

나영은 고개를 들어 꽃비가 되어 떨어지는 벚꽃잎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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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 너무 유치하잖아요.”

가슴이 간질거리는 게 낯간지러워서 그런 거라고 굳게 믿으며 그녀는 그한테 핀잔을 주었는데.

스윽.

최태혁 교수의 손이 다가와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진 꽃잎을 떼어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타인의 온기가 데일 듯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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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꽃이 잘못한 거야. 내 잘못은 아냐.”

그의 목소리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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