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제 이상형은 아니에요
(16/84)
16화. 제 이상형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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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제 이상형은 아니에요
2022.11.25.
나영은 이대로 그냥 나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지금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다면 병원 생활까지 영향을 받을 거다.
만약 두 사람의 사이를 병원 사람들이 눈치채게 되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우선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도시락은…….”
“먹어. 너도 나 꽃 줬잖아.”
내가 왜 꽃을 사서 바쳤을까.
나영은 이제야 죽도록 후회가 되었다.
“저는 꽃 한 번만 드렸잖아요. 그러니까 교수님도 도시락 한 번만 주세요.”
나영은 두 손 모아 빌지 않았을 뿐이지 거의 사정했다.
“황 여사님이…….”
최태혁 교수가 황 여사 이야기할 때마다 약한 표정을 지어서, 이젠 황 여사가 꼭 최종 보스처럼 느껴졌다.
“그럼 제가 직접 황 여사님께 말씀드려도 될까요?”
“우리 집에 오겠다고?”
집이라는 말에 나영은 불에 덴 듯 깜짝 놀라며 부정했다.
“아뇨! 그냥 전화로.”
“황 여사님이 돌발성 난청을 앓고 난 뒤 귀가 많이 안 좋으셔서.”
의사가 병으로 사기 칠 거 같지는 않았다. 그럼 진짜 나쁜 거였다.
“그럼 문자로.”
“그건 너무 예의 없잖아.”
나영은 저절로 손이 주먹 쥐어졌다.
그녀는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하며 최대한 예의 있게 물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교수님.”
“황 여사님 건강검진 받을 때 우리 병원 오실 테니까 그때 말씀드려.”
그가 진짜 대안을 제시하자 나영은 표정이 밝아졌다.
“언제 건강검진 받으시는데요?”
“12월.”
그녀의 표정이 급격히 안 좋아지자 태혁은 선심 쓰듯이 말했다.
“그럼 너무 늦으니 검진 날짜를 옮겨 볼게.”
“정말이시죠?”
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그때까지는 도시락 먹어.”
그녀가 안 먹겠다고 하면 그도 검진 날짜를 안 옮겨줄 거 같았기에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도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해결된 거 같으면서도 그녀가 엄청 손해 본 거 같은 기분이었다.
도시락은 그의 뜻을 많이 따랐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그녀의 의지대로 정리해야만 했다.
그래서 우선은 부드럽게 말을 시작했다. 그가 반감을 품지 않게.
“교수님 마음은 알겠는데요.”
사실 잘 모르겠다.
반했다는 말이 또 자고 싶다는 뜻인지, 진짜 좋아한다는 말인지.
“그래도 병원에서는 티 내지 않으실 거죠?”
“봐서.”
봐서라니!
이 건방진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순수하게 좋아한다고 고백한 게 아니다.
그냥 또 자고 싶다는 의미였나 보다.
나영은 강하게 그를 노려봐준 뒤 그대로 몸을 돌려 연구실을 나가버렸다.
쾅!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에 태혁은 미간을 좁혔다.
“왜 저래?”
사람 마음 숨기는 게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다는 뜻이었는데, 그게 저리 화낼 일인가?
***
논문 보조를 하게 되면서 그녀도 이식 수술에서 참여 자격이 있었기에, 황명순 환자 간 이식 수술 관련 회의에 참석했다.
정해진 시간 안에 간 절제 수술과 부분 간 이식 수술이 차질없이 진행되어야 했기에 의료진 간의 사전 협의가 굉장히 중요했다.
그녀가 컨퍼런스실에 들어오는 걸 보고 동건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영은 치프가 있는 자리로 걸어가다가 동건의 바로 앞에 최태혁 교수가 앉아 있는 걸 발견하고 멈칫하며 멈추어 섰다.
그는 공여자의 간 절제술을 할 우도한 교수와 이야기 중이었다.
“저는 여기 앉을게요.”
그녀는 일부러 반대편 쪽에 따로 앉으며 힐긋 최태혁 교수 쪽을 보았는데, 그는 그녀를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최태혁이 그녀한테 반했다고 말했던 게 꼭 꿈처럼 느껴졌다.
본분을 잘 지키고 있다고 칭찬해야 하는데, 서운한 마음도 드니 사람 마음이란 게 왜 이리 제멋대로인지 모르겠다.
그래, 나도 의식하지 말자.
나영은 들고 온 부분 간 이식 수술 관련 자료로 시선을 돌렸다.
보통 외과 수술은 집도의의 기술적인 면에 거의 의존하게 되는데, 이식 수술은 의사의 기술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유일한 수술인 듯했다.
다른 이의 희생으로 환자는 새로운 장기를 얻어 제2의 삶을 살게 되니, 어찌 보면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공여자의 간을 절제할 때 출혈량을 최소화해서 그만큼 수술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수술을 집도할 두 명의 의사가 환자의 간을 어떻게 안전하게 바꿀지 의논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영은 경외감을 느꼈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대단한 일을 하는데 두려움을 안 느낄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수술 경험이 쌓이면 그녀도 자연스럽게 이들처럼 될 수 있을까?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이 샘솟다가 고개를 돌리던 최태혁 교수와 눈이 마주치자 불똥이 엄한 곳으로 튀었다.
나영은 바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
며느리 공여자는 끝까지 마음을 바꾸지 않고 간을 시어머니에게 나누어주기로 했다.
똑같이 환자가 되어서 이동 침대에 누운 두 사람이 수술실로 이동하는 도중에 마주쳤는데, 시어머니인 황명순 환자가 먼저 며느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며느리는 잠시 누렇게 뜬 주름진 손을 바라만 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시어머니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잘 될 거예요. 어머니.”
그 한마디에 수많은 세월 동안 쌓인 감정이 느껴져서 옆에 있던 나영의 가슴도 묵직해졌다.
이 수술이 끝나고 황명순 환자가 건강해지면 두 사람의 사이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마주 잡은 손이 떨어지고 공여자와 수혜자는 각자의 수술실로 들어갔다.
나영은 최태혁 교수가 집도하는 수혜자의 수술실에서 어시스트를 했다.
최태혁 교수는 환자의 몸 안에서 검게 굳어 제 쓸모를 전혀 하지 못하는 간을 절제했다.
환자의 몸에서 꺼내진 거대한 간을 그녀가 받았다. 꼭 돌덩이 같았다.
그때 최태혁 교수가 힐긋 시계를 확인했고, 수술방의 문이 열리며 공여자한테서 떼어낸 간을 든 레지던트가 들어왔다.
“잘 부탁드립니다.”
간을 전달하는 레지던트가 하는 말이 긴 여운으로 남았다.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그 익숙한 말이 이 수술실에서만 오직 생명과 연관되었기에.
최태혁 교수는 바로 건강한 간을 환자의 몸 안에 집어넣고 담도와 혈관을 연결하였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분 1초의 낭비도 없이.
그리고 수술은 예정된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끝이 났다.
이식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해서 다 마무리된 게 아니었다.
이젠 면역 억제 치료를 잘해야 했고, 수술 후 생길 수 있는 감염을 철저하게 막아야 했다.
환자가 무사히 퇴원할 때까지 의사와 간호사들은 쉴 틈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이식 수술이 완벽하게 마무리된 것을 자축하며 소소하게 축하 파티를 하기로 했다.
이름만 거창하게 파티지, 그냥 삼겹살에 소주 먹는 회식이었다.
“이야. 최 교수님 수술 끝나고 이런 자리 갖는 거 처음이네.”
동건은 수술도 잘 끝나고, 회식도 해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처음으로 간 이식 수술 어시스트를 해본 나영은 기분이 복잡했다.
뭔가 엄청 대단한 일을 한 것도 같고, 그녀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도 같고.
수술을 집도한 최태혁 교수가 얼마나 대단한 외과 의사인지는 확실히 깨달은 수술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한테도 거침없이 다가올 수 있는 거 같았다.
그는 수술에 자신이 있어서 그녀 때문에 일에 지장이 있을 리 없다고 믿는 거다.
그게 부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다.
그녀는 분명 지장이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절대 쉽게 받아주지 말아야지.
그리 다짐하며 삼겹살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려던 나영은 반대편 자리에 있던 최태혁 교수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했다.
그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병원 안에서는 눈길 한번 안 주더니, 병원 밖이라고 아주 대놓고.
‘그럼 병원 밖에서는 키스해도 되나?’
갑자기 그 말이 떠오르며 그녀의 얼굴에 열이 화르륵 올랐다.
나영은 바로 그의 시선을 피하며 동건을 보았다.
동건은 손에 든 술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술 한 잔만 마시려고 했더니 최 교수님이 노려보네.”
그걸 그렇게 해석하다니.
이 양반도 참 눈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행이었다.
“병원 들어가서 황명순 환자 보셔야 하죠? 제가 할까요?”
동건은 안 된다고 손까지 내저었다.
“최 교수님이 알면 나만 죽어. 그냥 내가 할게.”
동건은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도 같이 술을 마시지 않았다.
병원 돌아가서 오늘 간 이식 수술에 대한 복습을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동건이 황명순 환자 보러 간다고 일어날 때 그녀도 같이 일어났다.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모두 그들보다 경력 높은 윗사람들뿐이었기에 두 사람은 허리 숙여 인사하고 고깃집을 나왔다.
나영은 동건과 함께 병원으로 향하는데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꺼내서 확인해 보니 자기주장 확실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병원 앞 편의점에서 기다려. -최태혁 교수>
웃기시네요. 누구 마음대로.
나영은 콧방귀를 뀌며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안 기다리면 내가 의국으로 찾아갈 수밖에. -최태혁 교수>
나영은 인상을 팍 쓰며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수술실에서는 그렇게 위대해 보이던 교수님이 병원 나오자마자 못된 남자처럼 굴었다.
사람이 중간이 없었다. 매우 훌륭하거나, 매우 나쁘거나.
“저는 편의점 좀 들러야겠어요. 치프 먼저 가세요.”
나영은 동건을 혼자 병원으로 보내고,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아서 최태혁 교수를 기다렸다.
가로등 아래에서도 화사한 벚꽃을 보니 완연한 봄이었다.
병원에 갇혀 살아서 봄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뚜벅뚜벅.
누군가 걸어오는 구두 굽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더니, 이쪽으로 걸어오는 최태혁 교수가 보였다.
우뚝.
그가 그녀의 앞에 멈추어 섰다.
하늘에서 떨어진 분홍 꽃잎이 나풀나풀 날아서 그의 어깨 위에 떨어졌다.
그녀를 쳐다보는 눈빛에서 이성을 유혹하는 페로몬이 숨김없이 분출되었다.
“옆에 앉아도 돼?”
잠시 흔들릴 뻔했지만, 다행히 그녀는 빨리 정신을 차렸다.
술을 안 마신 게 다행이었다.
그래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었다.
나영은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앉아서 손으로 앞자리를 가리켰다.
“아뇨, 앞에 앉으셔야죠. 교수님.”
그 말은 거리를 두자는 뜻이었기에 태혁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한마디 했다.
“지금은 병원 밖인데.”
그녀도 웃는 낯으로 정중하게 받았다.
“바로 병원 앞이잖아요.”
태혁은 짧게 혀를 차고는 할 수 없이 그녀가 가리킨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기껏 병원 밖으로 데리고 나왔더니 핑계를 대네.”
꼭 그녀 때문에 일부러 회식했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오늘 회식은 간 이식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낸 것을 자축하는 뜻깊은 자리일 뿐이었다.
두 사람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나영은 그가 먼저 그녀를 흔들어대기 전에 먼저 쐐기를 박기로 했다.
“사실 최 교수님이 딱히 제 이상형은 아니에요.”
그녀의 도발에 태혁은 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