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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어쩌라고 (15/84)


15화. 어쩌라고
202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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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응급실에 내원했던 윌슨병 환자에 관해 치프 동건이 먼저 그녀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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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책에서만 보고 진짜 환자는 본 적이 없는데. 문 선생이 직접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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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 환자였어요.”

그녀가 제일 먼저 나이를 말하자 동건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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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리긴 하다. 15살 이전에 발병하면 간 질환이 많다고 하더니, 그래서 간경변이 일어났나 보지.”

그녀가 윌슨병 환자의 병증을 치프에게 말해주고 있는데, 병실 밖을 걸어가는 간호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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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교수님이 왜 벌써 병동에 내려오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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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찾는 거 같던데.”

나영은 심장이 철렁했다.

설마 그녀가 도시락 받으러 안 갔다고 직접 찾으러 올 줄은 몰랐다.

교수씩이나 되었으면서 병원에서 여자 뒤꽁무니를 쫓다니!

그가 주위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인물이라는 걸 간과한 게 그녀의 실수였다.

나영은 다급하게 동건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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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프. 제가 배가 갑자기 아파서 그런데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그녀의 표정이 정말 안 좋아 보였기에 동건은 바로 허락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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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남은 환자는 내가 혼자 둘러봐도 되니까. 가봐.”

나영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서둘러 병실에서 나와서 여자 화장실 쪽으로 뛰어갔다.

어쩌다 보니 병원에서 최태혁 교수와 술래잡기를 하게 되었다. 어릴 때도 해본 적 없건만.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초조하게 핸드폰으로 시간이 가는 것만 확인하고 있었는데, 핸드폰 액정이 번쩍 켜지면서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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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비?>

나영은 순간 핸드폰을 집어 던질 뻔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건데!

그녀 혼자만 이리 안절부절못하고 화장실에 숨어 있는 게 억울하고 너무 바보 같아졌다.

나영은 변기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숨기만 하면 계속 최태혁 교수의 손바닥 위에서 아등바등하게 될 거다.

이건 레지던트와 교수 사이의 일이 아니라 여자와 남자 사이에 벌어졌던 일이니까 그녀는 오히려 그의 앞에서 당당하게 굴어야 했다.

벌컥.

마음을 굳힌 나영은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화장실 밖으로 나가던 나영은 복도 벽에 기대서 있는 최태혁 교수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몸을 돌려 다시 여자 화장실 안으로 도망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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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나영은 벽을 두 손으로 짚고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그녀는 도저히 그만큼 뻔뻔해질 수가 없을 거 같았다.

최태혁 교수는 하는 행동을 보니 남의 눈치 안 보고 살아온 게 확실해 보이지만.

나영은 너무 얌전하게만 살아왔다.

그녀한테 불리해도 너무 불리한 힘겨루기였다.

아무래도 이 상황은 한 번도 일탈한 적 없었던 사람이 갑자기 일탈을 저지른 부작용인 거 같았다.

사람은 선을 지키고 살아야 평탄하게 살 수 있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삑삑.

그녀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분명 또 최태혁 교수가 보냈을 거 같았기에 나영은 불안한 마음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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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도 돼.>

그러니까 이게 누구 때문인데!

나영은 속으로 불같이 화낸 것과 달리 소심하게 벽에 바짝 붙어서 눈만 빼꼼히 내밀며 조심스럽게 밖을 살펴보았다.

최태혁 교수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복도에 도시락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황 여사님이 만들었다는 바로 그 도시락.

도시락계의 미슐랭이 있다면 별 세 개는 거뜬하게 받을 거 같은 도시락.

나영은 그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화장실에서 나왔다.

최태혁 교수가 놓고 간 도시락을 향해 걸어간 그녀는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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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황 여사님은 아무 잘못이 없으시지.”

그녀는 도시락을 끌어안고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영은 최태혁 교수가 갑자기 이러는 게 순수하게 보이지 않았다.

최태혁 교수는 레지던트한테 인정사정없이 독해서 독사 교수였다.

그런데 그녀한테만 어떻게 순수할 수 있겠는가.

그날 밤의 최태혁이라는 남자는 흠 잡을 곳이 없긴 했지만, 그게 어쩌면 그녀를 꼬시려고 일부러 연기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높아졌다.

같은 사람인데도 차이가 너무 컸으니까. 지킬 앤 하이드처럼.

그러니까 병원에서 만난 최태혁 교수와 클럽에서 만난 최태혁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그냥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듯했다.

***

최태혁 교수가 이 병원에 나타난 뒤 회진 시간이 그녀에게 몇 번이나 고비였는데, 오늘이 가장 큰 고비였다.

나영은 그의 눈을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노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어떻게든 최태혁 교수와 눈을 안 마주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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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나영 선생.”

하지만 최태혁 교수는 언제든지 그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교수님이었다.

병원 내에서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 나영은 언제 어느 때고 그녀의 기분과 상관없이 기민하게 대답하며 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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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녀는 대답하면서 슬쩍 치프 동건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동건의 큰 머리에 가려서 최태혁 교수의 얼굴이 살짝만 보여서 안도감이 들었는데, 그가 굳이 자리를 옮겨서 그녀의 얼굴을 찾았다.

그와 눈이 똑바로 마주치자마자 나영은 심장에 심각한 무리가 왔다.

이러다 진짜 부정맥 올 것만 같았다.

그녀와의 하룻밤을 잊은 적 없다는 그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래서 이수지 환자에 관해 묻는 최태혁 교수의 말을 반이나 놓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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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다시 말씀해주세요. 교수님.”

그녀는 사실대로 말했고, 최태혁 교수는 그녀와의 하룻밤을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절대 그녀를 봐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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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들었다고? 수술실에서도 딴생각하다가 잠깐 놓쳤으니까 다시 하겠다는 소리 할래!”

최태혁 교수가 그녀를 혼내니까 오히려 안정감이 느껴졌다.

정상이 아니었다.

그날 나영은 본능적으로 최태혁 교수를 피해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며느리에게 간을 공여받는 황명순 환자의 병실에 와 있었다.

보호자 가족 간의 분쟁을 최태혁 교수가 그녀한테 떠넘긴 뒤 자주 황명순 환자의 병실에 찾아가서 살펴보았는데, 황명순 환자의 딸이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걸 보고 누군가의 편을 드는 게 참 애매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들 부부 쪽은 오랜 시간 시집살이시킨 시어머니에게 무조건 희생하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었고, 환자의 딸도 아픈 어머니를 걱정하는 마음에 수술을 재촉하고 있었다.

어느 쪽도 잘못하지 않았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항상 간호하고 있던 딸이 안 보이고, 공여자인 며느리가 병상을 지키고 있었다.

나영은 병실 안으로 들어가서 그녀에게 먼저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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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며느님이 계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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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애들 고모는 오늘 딸 학교 행사가 있어서요.”

나영은 잠이 든 황명순 환자의 나이 든 얼굴을 바라보며 며느리에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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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받고 관리만 잘하면 건강하게 오래 사실 수 있을 거예요.”

며느리는 아무런 표정 없이 황명순 환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수술을 결정한 이유가 시어머니는 아니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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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해 수술 결정하셨어요?”

나영은 충동적으로 물어보았다.

그녀는 지금 남자 문제 하나도 제대로 해결 못 해서 이리 도망 다니는 중인데, 이 사람은 어떻게 그 어려운 결정을 내린 건가 싶어서.

그녀의 질문에 며느리는 별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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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이요.”

그녀의 아들한테 할머니를 죽인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 이유 하나로 충분하다는 듯이 며느리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걸렸다.

이 여인이 선택해야 했던 문제에 비하면 나영은 자신의 문제가 참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침부터 널뛰던 마음이 조금씩 차분해졌다.

***

나영은 도시락 가방을 들고 먼저 최태혁 교수의 연구실로 찾아갔다.

계속 그를 피하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으니까.

그와 제대로 대화를 통해서 정리해야 했다.

똑똑.

노크하니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영은 심호흡하고 문을 열었다.

그의 연구실에 몇 번이고 찾아왔었지만, 지금 이 순간이 제일 긴장되는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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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도시락 잘 먹었습니다.”

그녀는 도시락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우선 감사 인사를 정중하게 했다.

태혁이 책상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나영은 서둘러 손을 뻗으며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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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앉아 계세요. 그래야 제가 말하기 편할 거 같습니다.”

반쯤 일어났던 태혁은 그녀한테 시선을 떼지 않고서 천천히 다시 앉았다.

그리고 팔짱을 끼며 그녀의 얼굴을 주시했다.

나영은 그와 시선을 똑바로 맞출 수 없어서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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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말하라고 앉았는데 왜 말 안 해?”

그의 재촉에 나영은 헛기침하며 전혀 편하지 않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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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병원에서는 교수님과 그냥 공적인 관계로 남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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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병원 밖에서는 키스해도 되나?”

생각도 못 한 순간에 날아온 엄청난 말에 나영은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여기서 무너지면 계속 그한테 끌려다닐 게 분명했기에 나영은 힘을 주어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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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트 1년 차는 너무 바빠서 병원 나갈 시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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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싫다는 건 아니네.”

그가 입꼬리를 올리니 그녀는 미간이 좁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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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이 레지던트한테 이러는 거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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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병원 밖에서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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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병원 나갈 시간이 없다고요!”

어느새 그녀의 얼굴은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태혁도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갑갑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상황을 그도 대놓고 무시하지는 못하는 거 같아서 나영은 그를 설득해 보려고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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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처음에 기억 안 나는 척하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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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선생이 먼저 마스크 쓰고 날 피했지.”

그녀의 탓이라는 말에 나영은 잠시 할 말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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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병원에 새로 오시는 교수님인 거 알았으면 그날 절대 안 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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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병원에서 처음 너를 만났으면 안 잤겠지.”

그도 똑같이 부정하자 나영은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가 먼저 한 말인데, 왜 상처는 그녀가 받는 건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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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거 다 만약이잖아. 이미 우리는 선을 넘었고. 나한테 문나영은 한강대학교 병원 레지던트 1년 차 선생이기 전에, 나와 하룻밤을 보낸 여자야.”

최태혁 교수가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심장은 더 격렬히 반응했다.

경계심인 거 같기도 했고, 전혀 다른 감정인 거 같기도 했고.

명확하지 않고 뒤엉켜 있었기에 그녀는 섣불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나영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만 보았다.

우뚝.

최태혁 교수는 한 걸음을 남겨두고 멈추어 섰다.

반듯하게 선 그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시니컬하게 웃었다.

마치 이 상황이 참으로 고약하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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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너한테 반했는데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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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은 얼이 빠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남자는 왜 이리 제멋대로란 말인가.

그런데 그게 싫지 않고 바보처럼 설레는 자신이 나영은 더 감당 안 되었다.

한 번의 일탈로 충분히 고초를 겪었으면서, 여기서 또 그의 말에 흔들리면 큰일이었다.

나 진짜 당신이랑 연애할 시간이 없다고.

그런데 나보고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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