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잊은 적 없어
(14/84)
14화. 잊은 적 없어
(14/84)
14화. 잊은 적 없어
2022.11.18.
수술에 들어가기 직전에 태혁은 오승준한테서 메시지를 받았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의사들이 가장 미련하게 생각하는 게 환자들이 아픈 걸 참다가 병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만 자꾸 참으래.
태혁은 핸드폰을 라커 안에 그대로 처박아두고 스크럽(외과적 손씻기)을 하러 갔다.
베타딘 액체 비누가 묻은 스크럽 솔로 손과 팔을 구석구석 닦아내며 잡념을 지워 냈다.
적어도 수술실 안에서까지 얼빠진 놈처럼 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스크럽과 함께 문나영 생각은 깨끗하게 내려놓고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건만, 환자의 배를 여는 순간 태혁은 미간이 찌푸려졌다.
간뿐만 아니라 췌장까지 암이 전이된 결절이 보였다.
태혁은 동결절편을 어시스트에게 전달하며 병리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악성인지 아닌지 결과를 기다리는 10분 동안 태혁은 썩어들어가고 있는 환자의 내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Rrrrrrrrrr Rrrrrrrrrr-
수술실의 전화가 시끄럽게 울려댔다.
조직검사를 끝낸 병리과 의사가 건 전화였다.
[악성입니다.]
태혁은 깊게 두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닫겠습니다.”
수술실에 들어왔지만,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그냥 나가야만 했다.
수술실에서 나와 환자 가족들에게 환자의 절망적인 상태를 알려야 하는 것도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의 앞에서 오열하는 가족들을 보는 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위로는 그가 가장 못 하는 거라 고개를 숙여 인사만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
나영은 최태혁 교수가 준 초콜릿을 먹지 못하고 바라보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자기가 키우는 개처럼 애정해서 줬다는 거야?
아니면 날 개처럼 먹을 걸로 길들이겠다는 거야?
한 끗 차이로 의미가 완전히 갈라졌다.
어떤 의미이든 둘 다 개와 비교당해서 그런지 나영은 기분이 썩 개운하지 않았다.
‘그런데 영역표시는 주인이 아니라 개가 하는 거 아냐?’
그렇게 따지면 최태혁 교수가 개라는 소리인가?
나영은 고개를 저으며 초콜릿을 가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지금은 많이 생각할수록 이상한 답만 나오고 있었다.
오승준의 한마디에 너무 깊게 생각하는 자신이 좀 바보 같이 느껴져서 그만하기로 했다.
고작 초콜릿일 뿐이었다.
최태혁 교수가 그녀한테 고백한 것도 아닌데 이걸로 고민하는 걸 최 교수가 안다면 오히려 그녀를 비웃을 거 같았다.
응급실에 들어섰는데 고성이 들려왔다.
“분명 우리가 먼저 왔는데 왜 계속 기다리게 하는 거냐고!”
응급실은 방문 순서대로 치료해 주는 게 아니라 환자의 상태가 위급한 순서대로 치료를 받았기에 대기하는 환자와 가족들의 컨플레인이 가장 거센 곳이기도 했다.
다혈질 아빠가 아픈 아이 때문에 몹시 화가 난 듯 보였다.
안 된 일이지만 그녀가 도와줄 수도 없는 일이기에 조용히 지나쳐 갔다.
“문 선생. 와서 이 환자 좀 봐줘.”
내과 레지던트 1년 차 박희선이 그녀를 불렀다.
나영이 다가갔더니 박희선이 그녀를 붙잡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 환자 윌슨병 같거든.”
윌슨병은 구리 대사의 이상으로 간질환이나 신경질환이 나타나는 유전병이었다.
쉽게 보기 힘든 희귀병이었기에 나영은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박희선을 쳐다보았다.
박희선도 의사 생활하면서 한 번 볼까 말까 한 환자를 레지던트 1년 차에 만났기에 확신을 얻기 위해서 그녀한테도 환자를 봐달라고 하는 거였다.
“정말?”
“책에 나온 대로 황록색의 각막환이 있어.”
박희선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환자한테 시선이 옮겨졌다.
10대로 보이는 환자였다. 이수지 환자도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보다 더 어렸다.
저 환자가 진짜 윌슨병이라면 평생 약물에 의존해서 살아야만 했다.
치료를 멈추는 순간 치명적인 간 손상이 발생하게 될 거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
나영은 응급실을 나와서 잠깐 바깥 공기를 쐬었다.
그래야 답답한 가슴이 좀 뚫릴 거 같았기에.
벤치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던 나영은 먼저 와서 앉아 있는 남자 의사의 뒷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의사가 아니라 운동선수를 해야 할 것만 같은 저 넓은 어깨는 아무리 봐도 최태혁 교수 같았다.
그런데 그가 이런 곳에서 휴식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냥 갈까 하다가 그녀가 피할 이유는 없을 거 같아서 나영은 다시 걸음을 떼었다.
그녀가 반대편 벤치에 앉아도 최태혁 교수는 전혀 알지 못하고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보니 그도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분명 그녀한테 초콜릿 줄 때만 해도 괜찮았기에 그 차이가 확실히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최태혁 교수는 수술이 잡혀 있었다.
만약 그 수술이 제대로 진행되었다면 그는 지금 수술실에 있어야만 했다.
“수술 환자 상태가 안 좋았나 봐요?”
그녀가 불쑥 묻자 그의 턱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와서 닿았다.
나영은 인사 대신 가볍게 웃었다.
“저도 응급실에서 희귀병 환자 봐서 마음이 좀 그랬거든요.”
“그딴 걸로 공감하고 싶지 않은데.”
차갑게 선을 긋는 그의 말에 나영은 입을 일 자로 다물었다.
이렇게 쌀쌀맞은데 먹을 걸로 영역표시를 했다고?
퍽이나.
나영은 괜히 헛다리 짚은 오승준을 속으로 욕하면서 몸을 작게 웅크렸다.
좀 쉬러 나와서도 교수 눈치 봐야 하는 그녀의 처지가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깨 위로 무언가 덮였다.
나영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옆에 온 최태혁 교수는 푸른 수술복만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의사 가운은 그녀의 어깨 위에 걸쳐져 있었다.
방금까지 냉정했던 교수가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어 보여준 친절에 나영은 눈만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최태혁 교수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내일 아침도 도시락 받으러 와.”
또 도시락을 준다는 말에 나영은 화들짝 놀라서 거부했다.
“아뇨! 안 주셔도 돼요!”
그녀가 도시락을 격렬하게 거부하자 최태혁 교수는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황 여사님이 새벽 4시부터 일어나서 만드는 도시락이야. 그런데 그걸 그냥 버리라고?”
도대체 황 여사는 누구란 말인가?
절대 누나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황 여사님이 누군데요?”
“나한테 30년 동안 밥해준 사람.”
아무리 최태혁 교수가 말을 함부로 해도 어머니를 저렇게 말할 거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가정부를 말하는 거 같은데, 그녀가 듣기로는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들렸다.
“그럼 황 여사님한테 제 도시락은 만들지 말아 달라고 해주세요.”
“그럼 황 여사님은 자기 요리가 맛없어서 그런 줄 알겠지. 올해 환갑인 어른한테 꼭 그런 상처를 줘야겠어?”
갑자기 그녀가 만난 적도 없는 환갑의 황 여사한테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논리란 말인가.
나영은 애써 차분하게 설명했다.
“황 여사님 도시락은 정말 맛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그걸 계속 먹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왜?”
“전 교수님이 키우는 개가 아니니까요!”
그녀는 강하게 말했다. 이보다 확실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쳐다보는 최태혁 교수의 두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
“내가 문 선생한테 개상이라고 했었나?”
“아뇨!”
나영은 개상이란 말에 발끈했다.
강아지상이라고 했으면 이렇게 울컥하지 않았을 거다.
나영은 시선을 돌려 바닥을 내려다보며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저는 그냥 교수님 밑에 있는 수많은 레지던트 중 한 명일 뿐인데, 왜 교수님이 일부러 도시락을 챙겨주시냐고요. 그건 이상하잖아요.”
그가 특별대우해주는 거 바라지 않았다.
그럼 애써 정리했던 그녀의 마음이 다시 혼란스러워질 뿐이었으니까.
머리 위로 최태혁 교수의 묵직한 저음이 떨어져 내렸다.
“병원에 레지던트는 넘쳐나지만, 나랑 잤던 레지던트는 문나영 하나뿐이지.”
나영의 눈이 번쩍 커졌다.
그녀가 벌떡 벤치에서 일어나자 최태혁 교수가 어깨에 덮어주었던 의사 가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금 뭐라고?”
분명 그는 술을 많이 마셔 필름이 끊겼다고 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리 믿기로 했고, 일부러 캐묻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다.
때로는 그가 잊어서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가 기억 못 하기에 안심한 게 더 컸다.
그래야 그녀의 레지던트 생활이 영향받지 않을 테니까.
그녀의 흔들리는 동공을 내려다보며 태혁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날 밤 너랑 있었던 일 잊은 적 없어.”
그가 사실대로 말해버렸으니 예전 같을 수는 없었다.
이제 그녀한테 그는 하룻밤 잔 교수가 되어버렸으니까.
그녀는 또 몸을 돌려 그를 피해 달려가 버렸다. 이번이 세 번째였다.
탁 탁 탁.
태혁은 도망치는 그녀를 굳이 붙잡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숙여 그녀가 떨어뜨리고 간 그의 가운을 집어 들었다.
툭 툭.
흰 가운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털어내고는 가볍게 어깨에 걸쳤다.
“내일 보자고.”
이미 도망가서 들을 수 없는 그녀에게 혼자 인사하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쌀쌀함과 포근함이 공존하는 봄밤이었다.
***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나영은 이불 속에서 내적 비명을 질렀다.
그가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거랑 그의 입에서 직접 기억하고 있다는 걸 들은 충격은 절대 같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최태혁 교수 얼굴을 본단 말인가!
‘그날 밤 너랑 있었던 일 잊은 적 없어.’
최태혁 교수의 말과 하룻밤의 기억이 뒤엉키며 몸에 열이 화르륵 올랐다.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나 어떡해!
혼자 광란의 시간을 보낸 뒤에야 나영은 제풀에 지쳐서 조용해질 수 있었다.
“…….”
그래도 그와 한 달을 같이 일했기 때문인지 처음 병원에서 그를 마주쳤을 때보다는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또 과장실 찾아가서 전과하고 싶다고 철없이 굴 수는 없었다.
그건 그녀의 인생만 망치는 길이었으니까.
최태혁 교수가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그녀까지 거기 휘말릴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녀한테 최태혁은 이제 그냥 교수일 뿐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영은 각오를 다지듯이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할 수 있어. 문나영.”
심장이 깃털 날리듯이 파들파들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나영은 계속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해내야만 했다.
영역 침범당하면 그녀의 주권은 사라질지도 몰랐다.
어느새 그녀는 독립운동하는 사람처럼 결연해져 있었다.
사실 최태혁 교수가 그녀에게 요구한 건 그냥 도시락 가져가라고 한 거뿐인데 말이다.
그녀의 몸이 아니라.
***
다음 날 아침.
톡 톡 톡.
태혁은 책상에 걸터앉아서 손목시계의 시간이 일곱 시를 넘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약속대로라면 연구실 문을 열고 문나영이 도시락을 가지러 왔어야 했으나,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안 오시겠다.”
태혁은 가볍게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그럼 내가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