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영역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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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4.
쇄골 정맥에 중심 정맥관 삽입하는 건 레지던트 2년 차는 넘겨야 숙련되기에 아직은 CVC(중심 정맥관 삽입) 할 때마다 좀 긴장했다.
우선 리도카인으로 마취하고 쇄골 정맥으로 카테터를 넣어주기 전에 심호흡을 했다.
카테터를 놓치면 절대 안 되었다.
다른 내장을 잘못 찔러도 큰일이었다.
그런 주의사항들을 되새기다 보면 결국 긴장하게 되었다.
어떤 실수를 해도 환자한테는 치명적이었으니까.
이렇게 카테터 넣는 것에도 긴장하는데 직접 수술 집도를 하게 되면 그 중압감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아직은 감조차 안 왔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신중하게 카테터를 넣고 마지막에 혈전 예방하는 헤파린까지 넣어준 뒤 반창고를 붙여 마무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보조해 준 간호사에게 인사하고 중환자실을 나오던 나영은 이쪽으로 걸어오는 최태혁 교수를 발견하고 멈추어 섰다.
그의 손에는 그녀가 선물한 하얀 장미 꽃다발이 들려 있어서 더 눈에 띄었다.
그녀의 앞까지 멈추지 않고 걸어온 최태혁 교수가 불쑥 물었다.
“어젯밤 정문 앞에서 선물 준 남자 누구야?”
나영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 상황에서 그 질문이 왜 튀어나오는 건가 싶었다.
그녀도 최태혁 교수처럼 싸가지 없이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남동생과 이상한 사이로 오해받는 게 더 싫었기에 나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제 동생인데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최태혁 교수는 고개를 높이 들어 올려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더니 다시 그녀를 보며 꽃다발을 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젠 선물을 돌려주기까지 한단 말인가.
도대체 어디까지 재수 없게 굴 수 있는지 도전이라도 하는 사람 보듯 나영은 최태혁 교수를 쳐다보았다.
“꽃 싫어하시면 그냥 버리세요.”
그녀는 냉정하게 말하고 그냥 그를 지나쳐 가버리려고 했는데, 최태혁 교수가 다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영은 불쾌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젠 그녀도 그에게 화가 나려고 하는데 최태혁 교수가 말했다.
“이 꽃다발 방금 남호진한테서 받았어.”
뭐라고?
나영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남 선배도 교수님한테 꽃다발 선물했어요?”
이젠 별걸 다 따라 한다 싶었다.
“그게 아니라!”
이 상황에서도 오해가 생기자 태혁은 목소리가 높아졌다가 잠시 멈추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흥분하면 안 되었다. 그럼 잘 될 일도 망했다.
태혁은 차분해진 목소리로 다시 설명했다.
“문 선생이 준 꽃다발을 남호진이 중간에 가로채 갔었어.”
나영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하긴. 그도 윤이나가 그를 찔러보기 위해 꽃다발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절대 짐작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 꽃다발 난 지금 처음 봤다고.”
“…….”
나영은 그 말을 곱씹을수록 점점 눈이 커졌다.
“네?”
그녀는 당연히 그가 어제 꽃다발을 확인하고도 오늘 그 지랄을 떤 거로 생각해서 속으로 나쁜 놈이라고 엄청나게 욕했는데 말이다.
“…….”
“…….”
오해를 푼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길게 흘렀다.
나영은 그녀가 오해했다는 걸 알게 되니 굉장히 머쓱해져서.
그리고 태혁은 지금 그녀한테 솔직하게 모두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사실 그가 그녀와의 하룻밤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 하룻밤만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끝내기 싫다고.
“나 사실…….”
“전 교수님이랑…….”
침묵을 깨고 두 사람의 말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나영은 말을 멈추고 그에게 말을 양보했다.
“교수님이 먼저 말씀하세요.”
“아니야. 문 선생이 먼저 말해.”
얌전하게 양보하는 게 최태혁 교수답지 않아서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나영은 사양하지 않고 먼저 말했다.
“교수님이랑 계속 불편할까 봐 무서웠다고요. 안 그래도 레지던트 1년 차는 교수님 지도 많이 받아야 하는데, 지도교수님한테 찍히면 저만 엄청 손해잖아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을 누군가 손으로 꾹 누르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와 정반대의 말을 하려고 했으니까.
그녀가 더이상 그를 지도교수만으로 보지 못하게.
“그럼 문 선생은 원래 교수들한테 꽃 선물 자주 했어?”
그의 돌발 질문에 나영은 뜨끔했다.
처음이라고 하면 어쩐지 그녀가 그를 굉장히 특별하게 여기는 것처럼 들릴 거 같았다.
“네, 자주 해요.”
결국 그녀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거짓말을 해버렸다.
그녀의 대답에 태혁은 실망했다.
태혁은 손에 든 하얀 장미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빨간 장미가 아니라 하얀 장미였다.
그 차이를 이제야 깨달은 태혁은 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그녀가 그한테 꽃다발을 주었다고 해서, 그녀에게 그가 특별한 존재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건가 보다.
“교수님은 무슨 말씀하시려고 한 거예요?”
말간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태혁은 그날 밤 그녀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녀는 같은 얼굴이지만 전혀 다른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가 그날 밤에 집착할수록 실망도 커질 뿐이었다.
“내 사진 찍은 거 용서했다고.”
그의 말을 듣고 나영은 환하게 웃었다.
병원에 와서 본 그녀의 얼굴 중 가장 행복해 보이는 미소였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이제 마음이 편해졌겠지만, 그는 반대였다.
꾹꾹 눌러왔던 마음을 그녀가 준 꽃다발 때문에 더이상 가둬두는 게 불가능했다.
아무래도 그는 그녀를 가져야만 만족할 거 같았다.
참기만 하다가는 진짜 그가 병이 나고 말 거다.
사람 고치는 의사가 그렇게 사는 건 옳지 않다고 태혁은 마음대로 자기합리화했다.
“내일 봐.”
그런 위험한 생각을 하면서 인사는 세상 담백하게 건넸다.
“네, 내일 뵙겠습니다. 교수님.”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나영은 그에게 인사하며 안심했다.
내일부터는 아무 문제 없는 교수와 레지던트 사이로 돌아갈 거로 생각했으니까.
***
삑삑.
나영은 시계 알람이 아니라 메시지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손을 더듬어서 핸드폰을 가져온 나영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이른 아침부터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최태혁 교수였다.
<7시에 잠깐 내 방에 들러.>
그렇게 일찍부터 그녀를 부려 먹으려 하다니.
어제 우리 화해한 거 아니었습니까?
아무래도 말만 번드르르하게 했던 건가 보다.
나영은 원망의 소리가 나오려고 했지만, 꾹 눌러 참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최태혁 교수 연구실 들르는 것도 그녀의 아침 스케줄에 추가되었기에 평소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새벽 5시부터 병동을 돌며 수술환자들 드레싱을 꼼꼼하지만 아주 빠르게 하고, 아침 회진 전에 환자들 상태 빠짐없이 체크한 뒤에 뛰어서 최태혁 교수 연구실로 갔다.
“헉헉.”
연구실 앞에서 뛰어오느라 거칠어진 숨을 일단 정리하는데 그녀의 등 뒤에서 최태혁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 맞춰 왔네.”
“네, 좋은 아…….”
인사하며 고개를 돌리던 나영은 최태혁 교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말끝이 흐려졌다.
원래 잘 차려입고 다니긴 했지만, 오늘따라 더 꾸민 모습이었다.
꼭 클럽에서 만났을 때처럼.
그의 이미지가 패션잡지 남자 모델처럼 샤프하게 느껴져서 나영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쉽게 흔들리면 안 되는데, 나영은 잠시 방심하게 되었다.
최태혁 교수는 그녀의 옆을 스쳐 가며 연구실 문을 열었다.
“들어와.”
“!”
나영은 그한테서 평소와 다른 걸 또 발견하고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한테서 풍겨오는 이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향은 분명 향수였다.
세상에. 향수까지 뿌렸네.
뭐야. 오늘 맞선이라도 보나?
나영은 저도 모르게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최태혁 교수가 돌아보자 언제 노려봤냐는 듯이 예의 바른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시키실 일이 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저는 바로 가봐야 해서요.”
아침 회진 전에 치프와 함께 먼저 병동을 돌아야 했다.
최태혁 교수가 들고 온 도시락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가져가서 먹어.”
당연히 일 시키려고 부른 줄 알았는데, 아침을 주자 나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걸 왜 절 주세요?”
그것도 굳이 따로 불러서.
“꽃다발 준 거 보답이야. 받아.”
그럼 그녀는 더 당황스러웠다.
꽃다발은 그녀가 잘못한 일에 대한 용서를 빌기 위해 준 것이었으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저 용서해 주신 걸로 진짜 충분해요.”
그녀가 손까지 내저으며 거절하자 최태혁 교수는 바로 눈매가 매정해지며 평소처럼 말했다.
“그럼 이거 버리라고?”
“버리긴요! 교수님 드세요.”
“버려야겠군.”
최태혁 교수가 진짜 도시락을 들고 쓰레기통 있는 곳으로 걸어가자 나영은 깜짝 놀라서 서둘러 도시락을 붙잡았다.
“그냥 제가 먹을게요.”
그제야 최태혁 교수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잘해준다고 해야 하는 건지, 괴롭히는 건지 나영은 순간 잘 판단이 안 되었다.
***
나영은 오전 내내 바빠서 최태혁 교수가 준 도시락을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먹을 수 있었다.
도시락 뚜껑을 연 나영은 눈이 커졌다.
집에서 직접 만든 거 같은 정성이 들어간 도시락이었다.
시간 없어서 대충 때울 생각으로 먹으려고 했는데, 생각도 못 한 훌륭한 도시락 때문에 나영은 기분이 좋아졌다.
한 입 먹어보니 맛있기까지 했다.
보답이라는 최태혁 교수의 말은 진심이었나 보다.
외래 진료 끝나고 온 최태혁 교수와 마주쳤을 때 나영은 잊지 않고 도시락 잘 먹었다는 인사를 건넸다.
“도시락 정말 맛있었습니다. 교수님.”
최태혁 교수는 당연히 그럴 거라는 표정을 짓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걸 나영은 잠시 말없이 쳐다보았다.
“…….”
“왜? 초콜릿 안 좋아해?”
그게 아니라, 왜 오늘은 만날 때마다 그녀한테 먹을 걸 주는 건가 싶어서.
그리 비싸지도 않고, 너무 사소한 거라 이번엔 따로 묻기도 그래서 나영은 손을 뻗어 그가 준 초콜릿을 받았다.
“잘 먹겠습니다.”
나영은 최태혁 교수와 헤어지고 응급실로 내려가기 위해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마침 응급실 가던 오승준 교수와 마주쳤다.
나영은 최태혁 교수에게 받은 초콜릿 중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교수님. 초콜릿 드세요.”
“오! 땡큐. 마침 당 떨어졌는데.”
“저도 최 교수님한테 얻은 거예요.”
먹으려고 초콜릿 봉지를 까던 승준은 도로 초콜릿을 포장해서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녀가 의아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최태혁이 준 거라며.”
“그게 왜?”
“내가 살면서 최태혁이 누구 먹을 거 챙겨주는 걸 본 건 최태혁이 키우던 개뿐이야.”
뭐, 뭐야? 지금 날 개 취급하는 거라고?
승준은 쯧 혀를 차며 당부했다.
“영역 표시하는 거라고. 조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