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꽃다발의 주인
(12/84)
12화. 꽃다발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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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꽃다발의 주인
2022.11.11.
나영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쯤 최태혁 교수는 수술이 끝났을 테니까 연구실에 그녀가 놓아둔 꽃다발을 발견할 때가 되었다.
‘꽃 보고 기분이 좀 풀렸으려나?’
그게 계속 신경이 쓰였다.
꽃 잘 받았다고 문자라도 한 통 보내주면 좋으련만 감감무소식에 서운함이 밀려오려고 했다.
Rrrrrrrr Rrrrrrrr-
전화벨이 울리자 나영은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야. 누나.]
동생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나영은 바로 실망했다.
남동생 휘영은 대학생인데, 군대 영장이 나와서 휴학하고 지금은 노는 중이었다.
[엄마가 누나 새 옷 산 거 가져다주라고 해서 왔어. 나 곧 병원에 도착해.]
어머니가 외출했다가 또 그녀의 옷을 샀나 보다.
“병원에만 있어서 새 옷 필요 없다니까.”
[나한테 말하지 말고 엄마한테 직접 말해. 이거 때문에 나도 친구 약속에 늦었잖아.]
나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그러지 못할 거란 걸 뻔히 알면서 그녀를 타박하는 남동생이 좀 야속했다.
***
태혁은 술집에서 나와서 택시를 타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차현의 말을 듣고서야 그가 너무 편파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레지던트들이 가십거리 떠들듯이 함부로 하는 말만 듣고 철석같이 믿어버리다니.
소문만 듣고 그를 나쁘게 말하던 사람들과 똑같은 짓을 해버렸다.
문나영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가장 정확하고 떳떳했다.
만약 그녀의 입에서 진짜 다른 남자 이야기가 나오면 그땐 더 기분이 나쁠 거 같기는 했지만, 그녀한테 제대로 물을 용기도 없는 자신의 모습이 더 꼴 보기 싫었다.
택시가 병원 진입로에 들어섰을 때 막 정문에서 나오는 문나영의 모습이 보였다.
꼭 마음이 통한 거 같아서 태혁은 표정이 밝아졌는데, 그녀가 다가가는 남자를 발견하고 눈빛이 굳었다.
훤칠한 키에 시원시원한 마스크를 가진 20대 청년이었다. 여자라면 누구나 좋아할 그런 부류였다.
남자는 문나영에게 백화점 마크가 찍혀 있는 종이가방을 건넸고, 그녀는 거부의 기색도 없이 그걸 받았다.
돌아서서 떠나려는 남자의 손을 문나영이 먼저 잡는 걸 보자 그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었다.
“손님. 안 내리세요?”
병원에 도착했는데도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는 태혁을 의아하게 여기며 택시 기사가 물었다.
태혁은 문나영이 병원 정문으로 들어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택시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
달칵.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간 태혁은 곧장 소파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책상에는 남호진이 가져다 놓은 리포트 50장이 놓여 있었지만 태혁은 그걸 확인할 생각조차 없었다. 어차피 짜깁기했을 게 뻔했으니까.
지금은 그런 하찮은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정문에서 봤던 문나영과 낯선 남자의 모습이 떠오르며 그의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가 병원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 피한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룻밤 보낸 남자를 아무렇지 않게 교수로 대하는 게 힘들었을 테니까.
그래서 그도 기억이 안 나는 척했다. 그녀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제야 알았다. 그를 거부한 게 전공의 수련에 방해되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걸.
그는 단지 그녀한테 하룻밤 자고 끝낼 일회용품 같은 존재밖에 안 되었던 게 그를 화나게 하고, 상처받게 하였다.
태혁은 처음으로 그녀와의 하룻밤이 후회되었다.
그냥 병원에서 처음 마주치는 게 나을 뻔했다.
그랬다면 그가 문나영을 여자로 보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그럼 오늘 그가 이렇게 초라해지는 일도 없었겠지.
태혁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지금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을 뿐이었다.
***
다음 날.
나영은 평소보다 더 일찍 나와 회진 준비를 했다.
이제 최태혁 교수도 꽃다발을 보았을 테니까 분명 태도가 달라졌을 거로 생각했다.
딱히 고백 같은 걸 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나타날 시간이 가까워지자 긴장감이 조금씩 높아졌다.
저 멀리 최태혁 교수가 걸어오는 걸 보고 나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시선이 마주친 순간 차갑고 무정한 눈빛에 그녀의 미소가 사라졌다.
아무래도 꽃다발도 실패인가 보다.
마치 그녀가 애쓰면 애쓸수록 그는 더더욱 그녀를 싫어하게 되는 것만 같았다.
나영은 솔직히 이젠 최태혁 교수가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태어나 처음으로 꽃다발까지 사서 안겨주었는데도, 최태혁 교수의 태도는 오히려 그 전보다 더 쌀쌀맞게 변했다.
만약 두 사람이 공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적인 관계였다면 그녀는 바로 그와 절교했을 거다.
사람이 어쩜 이리 인정머리가 없나!
그가 그녀의 옆을 스치듯 지나갈 때 나영은 욱하는 마음에 충동적으로 그를 불렀다.
“최 교수님.”
그의 건조한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저는 정말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만 용서해 주시면 안 되나요? 앞으로 계속 같이 일해야 하는데.”
“지금 교수인 나보고 레지던트 1년 차한테 맞추어 달라는 건가? 문나영 선생 일하기 쉬우라고.”
그가 다정하게 말하는 스타일은 절대 아니었지만, 오늘은 더 지독하게 권위주의적으로 느껴졌다.
말이 전혀 안 통한다고 느낀 나영은 시선을 거두다가 남호진이 그녀를 보고 히죽이는 걸 발견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저 인간은 또 왜 저래.
그녀 때문에 리포트 폭탄 맞았다고 짜증 내더니, 그녀가 교수한테 혼나는 걸 보니 신난다는 건가?
하여튼 못된 심보다.
나영은 아침 회진이 끝나고 안 좋은 기분으로 중환자실로 향했다.
그냥 열심히 일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승희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이 기집애! 남자한테 꽃다발 받았으면서 나한테 말도 안 해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녀가 꽃다발 들고 병원에 온 것을 보고 사람들이 멋대로 소문을 만들어 낸 거 같았다.
나영은 한숨을 내쉬며 승희에게 답 문자를 보냈다.
<최태혁 교수님한테 용서 빌려고 샀던 거야. 그런데 소용없네.>
삑삑.
승희의 답 문자는 바로 날아왔다.
<최 교수님 딱 봐도 꽃 안 좋아하게 생겼잖아. 술을 줬어야지.>
그녀의 선물 선택이 문제였다는 말에 나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내가 너무 낭만이 넘쳤네.
이수지 환자가 최태혁 교수를 가시 있는 장미로 표현한 순간 그냥 장미를 선물하고 싶어졌었다.
그게 참 순진한 생각이었다는 걸 이제는 알았다.
하지만 또다시 최태혁 교수에게 선물 주면서 빌고 싶은 마음은 안 생겼기에 나영은 핸드폰을 그냥 주머니에 집어넣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0분 뒤에 승희의 문자가 또 날아왔는데, 내용을 확인한 나영은 뒷목을 부여잡게 되었다.
<내가 윤 교수님한테 최 교수님 선물 뭐가 좋은지 물어봤는데 역시 꽃보다는 술이래.>
왜 내 허락도 없이 그걸 물어봐!
점점 점입가경이었다.
윤이나 교수가 그녀를 최태혁 교수한테 점수 따려고 환장한 레지던트로 볼 거 같아서 혈압이 확 올랐다.
정말 이젠 모든 게 싫어졌다.
그냥 집에 가고 싶은 심정이다.
***
태혁은 오늘 평소보다 일찍 의사 가운을 벗고 퇴근했다.
육체적인 피곤함보다 감정적으로 지치는 날이었다.
문나영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앞으로 그녀와 함께 일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라리 솔직하게 꽃다발을 준 남자가 누구인지 물어봤어야 했을까?
그런 자신의 모습은 구차해서 더 못 견디겠다.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가.
다시 빼앗아 오기라도 하겠다고?
태혁은 억지로 생각을 끊어내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하네.”
하필 이런 날 윤이나까지 마주쳤다.
태혁은 일부러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윤이나는 그의 옆에 와서 멈추어 섰다.
가능한 한 말을 섞지 않으려고 했는데,
“난 그래도 너한테 문나영이 좀 특별한 줄 알았어.”
그녀의 입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이름이 나오자 태혁은 고개를 돌려 윤이나를 쳐다보았다.
윤이나는 입가에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더라.”
“그래도 너는 아니겠지.”
그가 딱 잘라 부정하는 말에 윤이나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그녀는 바로 평상심을 되찾았다.
윤이나는 타인을 동정하며 자신의 자존감을 지켰다.
“문나영이 불쌍해.”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싶었다.
일회용품 취급당한 건 그인데, 왜 문나영이 불쌍하다는 건가?
띵.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태혁은 윤이나와 빨리 헤어지고 싶었기에 손으로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먼저 타고 내려가. 난 다음 거 탈 거야.”
윤이나는 엘리베이터도 같이 타기 싫다는 그를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떼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몸을 돌리고 다시 그를 쳐다본 윤이나가 물었다.
“꽃다발은 버렸어?”
태혁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어서 뚱한 표정을 짓다가 점점 눈이 커졌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남호진의 리포트가 떠오르며.
‘저는 정말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침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문나영의 말.
자신이 무언가 크게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달은 태혁은 몸을 돌려 서둘러 뛰어갔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뛰어가는 태혁의 뒷모습을 본 윤이나는 미간을 좁혔다.
***
쾅!
갑자기 당직실 문이 세게 열리며 최태혁 교수가 나타나자 쉬고 있던 레지던트들은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호진 지금 어딨어?”
최태혁 교수가 살벌하게 묻자 레지던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물었다.
남호진이 또 사고 쳤어?
나도 몰라.
그때 화장실에 다녀온 남호진이 시원함을 휘파람으로 표현하며 당직실로 들어오다가 최태혁 교수를 발견하고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바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그의 어깨는 최태혁 교수의 아귀 같은 손에 붙잡혔다.
그대로 벽치기를 당한 남호진은 벽과 최태혁 교수 사이에 갇혔다.
보고 있던 레지던트들은 경악했다.
남호진이 남자만 아니었어도 오해하기 딱 좋은 자세였다.
“너 어제 내 방에서 무슨 짓 했어?”
남호진은 최태혁 교수한테 들켜도 천연덕스럽게 받아쳤다. 어차피 꽃다발일 뿐이었으니까.
그가 중요한 논문을 훔친 것도 아니었다.
“아! 꽃다발이 시들해서 제가 물을 주었습니다. 깜빡하고 제자리에 안 가져다 놓았네요.”
진짜 남호진이 가져갔다는 말에 태혁은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가 하찮다고 무시했던 리포트가 설마 원흉이었을 줄이야.
남호진은 바로 숨겼던 꽃다발을 가져와서 태혁에게 내밀었다.
하얀 장미 꽃다발이었다.
태혁은 살면서 장미와 그가 지독하게 얽힐 일이 생길 줄은 상상조차 못 했었다.
“카드도 그대로 있습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남호진은 직접 카드까지 꺼내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사진을 허락도 없이 찍은 건 정말 죄송합니다. 깊이 반성하고 있으니 제발 이 꽃 받으시고 용서해 주세요. -문나영>
꽃다발은 문나영이 그한테 주려고 산 거다. 다른 남자한테 받은 게 아니라.
이제야 사실을 다 알게 되어서도 태혁은 울컥했다.
이 꽃다발이 그를 위한 거라는 걸 그가 무슨 수로 짐작을 하느냐고!
왜 하필 꽃…….
갑자기 당직실에 나타났던 최태혁 교수는 또 갑자기 꽃다발을 들고 서둘러 떠나 버렸다.
지은 죄가 있기에 남호진은 배웅까지 착실하게 했다.
“교수님. 살펴 가십시오!”
그런데 어딜 저리 급하게 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