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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개꿈과 꽃다발 (11/84)


11화. 개꿈과 꽃다발
202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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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입에서 나온 사진이라는 단어에 최태혁 교수의 표정은 순식간에 강철을 두른 듯이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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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문 선생이 사람들을 시켜서 내 사진을 찍게 했다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는 무얼 안다고 했던 거란 말인가.

설마 그냥 그녀를 떠본 거라고?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최태혁 교수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녀는 지금 독사 아가리에 제 발로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상처 없이 무사히 나가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나영은 긴장한 목소리로 천천히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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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지 환자가 교수님 사진을 보면 좋아할 거 같아서 기프티콘을 상품으로 걸었습니다.”

그녀의 자백을 듣고 태혁은 표정 관리가 안 되어 제멋대로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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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교수인 날 기프티콘에 팔았다고?”

최태혁 교수가 그녀를 꾸짖는 말은 꼭 그녀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부풀려졌다.

그를 판 게 아니라 그냥 사진을 찍은 거였다.

그것도 환자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딱 배신자를 보는 시선이었다.

그가 그런 눈으로 그녀를 보니 나영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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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이수지 환자한테만 보여줬어요. 정말입니다. 믿어주세요.”

꽈악 주먹 쥐어지는 그의 손에 튀어나온 힘줄은 그의 분노를 대변하듯이 사나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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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봐.”

무겁게 떨어진 그의 말이 나영은 반가운 게 아니라 더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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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는 리포트 쓰라고 안 하세요?”

그냥 사진 찍다 걸린 남호진도 리포트 50장이었다.

그녀가 주모자니까 남호진보다 더 엄청난 벌이 주어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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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나가.”

그가 살벌하게 뱉어내는 말에 위기감을 느낀 나영은 서둘러 몸을 돌려 연구실을 나갔다.

탁.

그녀가 문을 닫자마자 연구실 안에서 무언가를 세게 걷어차는 소리가 들려와서 나영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나 어떡해.

나영은 공포에 떨며 의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연구실 안에서 쓰레기통을 힘껏 걷어찬 태혁은 고개를 깊게 숙인 채 치솟는 수치심을 참아냈다.

살면서 이렇게 창피했던 순간은 처음이었다.

완전히 헛다리 짚어서 생각도 없는 여자한테 고백하기 직전이었다.

그것도 거만하게 그녀의 마음을 받아준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칠 듯이 수치스러웠다.

***

나영은 전공의 단톡방에 더 이상 최태혁 교수의 사진을 찍지 말라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꾸준히 올라오던 사진은 뚝 끊겼다.

최태혁 교수도 조용하고, 사진 찍던 사람들도 조용하니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나영은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어쩌면 이 일로 인한 그녀의 시련은 이제 시작인지도 몰랐다.

나영은 밤에 최태혁 교수에게 장문의 사과 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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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지 환자가 교수님의 1호 팬클럽이라서 교수님 사진으로 이수지 환자를 웃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교수님이 사진 찍는 거 허락 안 하실 거 같아서 몰래 찍게 되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깊이 반성하고 있으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최태혁 교수한테서 답변은 없었다.

과연 그는 그녀한테 어떤 엄벌을 내리려고 이리 침묵을 지키고 있는 건가 싶었다.

자기 전까지도 불안에 떨었기 때문인지 그날 밤 꿈에서 나영은 최태혁 교수의 어머니한테 구박받으며 시집살이하는 끔찍한 꿈을 꿨다.

잠에서 깨고 나서 가위눌린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뭐 이런 미친 개꿈을.

그녀는 최태혁 교수 어머니 얼굴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개를 키우고 있었으니 개꿈이 확실했다.

꿈 때문에 잠도 설쳐서 피곤한 얼굴로 아침 회진에 나갔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몰렸다.

모두 최태혁 교수에 관해 물어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아무도 선뜻 묻는 이가 없었다.

그녀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우선은 최태혁 교수님에게 용서를 받는 게 먼저인 거 같았으니까.

최태혁 교수는 평소처럼 정확히 7시 50분에 등장했다.

그녀는 그와 눈을 마주치려고 노력했는데, 최 교수는 그녀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회진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아무래도 최태혁 교수는 그의 초상권을 침해한 그녀를 역으로 투명 인간 취급하기로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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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교수님!”

그녀가 먼저 최태혁 교수를 쫓아가며 불렀으나, 그는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대로 떠나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지던트들은 한마디씩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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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나영이 누구 뒤꽁무니 쫓아가는 것도 처음 보고, 독사가 침묵으로 사람 괴롭히는 것도 처음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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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리포트 50장이 더 힘든 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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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제일 피해자야.”

남호진이 억울함을 토했지만, 그의 억울함에 동조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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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따라 괴로워하는 장르가 다른 거지. 문나영한테는 리포트 50장이 덜 괴로울걸. 마돈나가 언제 사람한테 무시당해 봤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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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그러네. 와. 최 교수님 엄청 지능적 독사였구나.”

풀이 죽어 돌아오는 그녀를 보니 확실히 독사 교수의 무시가 효과가 있는 듯 보였다.

다들 나영에게 신경 쓸 거 없다고 위로했다.

독사랑 멀리하면 오히려 좋은 거라고.

***

최태혁 교수의 무시는 3일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다행히 이수지 환자의 열이 떨어지면서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

요도관을 떼자마자 이수지는 다시 살아나서 조잘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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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제가 직접 최 교수님 사진 찍으려고요.”

사진 때문에 최태혁 교수한테 제대로 찍혔는데, 이수지가 나서서 사진을 찍겠다는 말에 나영은 할 수 없이 사실을 말했다.

사진 찍는 거 최태혁 교수한테 들켜서 금지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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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장미에는 가시가 있네요.”

온몸이 근육질인 최태혁 교수를 장미에 비유하는 말에 나영은 닭살이 돋아났다.

그런데 틀린 말도 아닌 거 같았다.

장미라…….

그날 나영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병원 밖으로 나가 꽃집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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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장미로 꽃다발 만들어 주시겠어요.”

빨간 장미는 구애할 때 주니까 사과할 때는 하얀 장미가 좋을 거 같아서 하얀색으로 골랐다.

카드도 한 장 사서 사과의 메시지를 정성스럽게 적고 꼼꼼하게 그녀의 이름을 썼다.

하얀 장미꽃이 청순하게 예뻐서 꽃을 산 그녀도 기분이 좋아졌다.

최태혁 교수도 꽃을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과에 진심인 그녀의 정성은 느낄 거로 생각했다.

이걸로도 그의 화가 안 풀린다면 정말 그의 성격에 문제가 있는 거였다.

그땐 그녀도 더 이상 그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고 일만 할 생각이었다.

꽃다발을 들고 걸어가는 그녀에게 평소보다 더 많은 시선이 몰렸다.

예쁜 여자가 예쁜 꽃을 들고 있으니 눈에 안 띌 수가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한 번 보고 지나가는 건 상관없었으나 병원 사람들이 꽃다발을 들고 있는 그녀를 보고 엉뚱한 말을 지어낼 거라고는 나영은 전혀 생각조차 못 했다.

머릿속에는 최태혁 교수의 기분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기에.

***

수술을 끝내고 수술방에서 나오는 그를 향해 남호진이 군기 바짝 든 자세로 리포트 50장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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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리포트 50장 완수했습니다.”

어차피 장수만 채우려고 했을 거라 안 봐도 내용은 별로일 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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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 갖다 놔.”

태혁은 연달아 한 수술 때문에 피곤했기에 남호진을 지나쳐 그대로 탈의실로 향했다.

남호진이 뒤에서 그를 향해 주먹질하는 시늉을 하다가 태혁이 휙 돌아보자 바로 파이팅하는 자세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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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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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혁이 말없이 계속 쳐다보자 남호진은 서둘러 몸을 돌려 도망쳤다.

그도 굳이 붙잡지 않았다.

저 성격에 분명 또 걸릴 일이 생길 테니까.

태혁은 탈의실로 걸어가 문고리를 돌려 열었는데 안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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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문나영한테 꽃다발 줬더라.”

멈칫.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그의 몸이 그대로 멈추었다.

아무래도 저 안에서 말하는 문나영이 그가 아는 그 문나영인 거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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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문나영이 그 꽃다발을 아주 소중하게 들고 갔다는 거지.”

순간 지독한 감정이 내장을 훑고 지나가며 그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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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나영이 남자를 거절하지 않고 꽃다발을 받았다고? 웬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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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잘난 놈이 대쉬했나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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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얼마나 잘나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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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나영 아버지가 태영 건설 전무래. 그러니 부잣집 인맥이 얼마나 많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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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칼같이 거절하더라니. 노는 물이 달랐던 거네.”

쾅!

갑자기 돌풍이라도 분 것처럼 문이 세게 열리며 태혁이 등장하자 수다 떨던 레지던트들은 화들짝 놀라서 대화가 뚝 끊겼다.

성큼성큼 탈의실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에 레지던트들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서둘러 갈아입던 옷을 챙겨서 탈의실을 도망치듯 떠나버렸다.

탈의실에 혼자 남은 태혁은 거칠게 수술복 상의를 벗어서 그대로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의 등 근육이 사납게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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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호진은 리포트를 제출하기 위해 최태혁 교수의 연구실에 들어갔다.

책상 위에 리포트만 놓고 바로 나올 생각이었는데, 하얀 장미꽃다발이 놓여 있는 걸 보고 호기심이 일어서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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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가족이 놓고 간 건가?”

꽃다발에 꽂힌 카드를 꺼내서 주인 허락도 없이 먼저 읽어보았다.

꽃다발을 보낸 사람이 문나영이라는 걸 알고 남호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똑같이 사진 때문에 최태혁 교수한테 찍혔는데, 그는 리포트를 50장이나 썼고 문나영은 아무런 벌도 받지 않았다.

그게 남호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했다.

남호진은 못마땅한 눈으로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예쁜 여자 레지던트가 사과의 의미로 꽃까지 주었으니, 아무리 최태혁 교수가 독사여도 남자는 남자였으니 바로 마음이 풀릴 거다.

남호진은 꽃다발로 손을 뻗었다.

그만 억울할 수는 없으니 이 꽃다발은 그가 가져가야겠다.

남호진은 그저 혼자 리포트 50장 쓴 게 억울한 마음에 작은 복수를 한 것일 뿐이었다.

지금 통쾌하면 그걸로 만족이었다.

어차피 금방 시들 꽃다발일 뿐이었으니까.

***

차현이 술집에 들어섰을 때 태혁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전투적으로 술을 들이켜는 모습이 딱 봐도 실연당한 남자 같았다.

차현은 태혁의 옆자리에 앉으며 쿨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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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벌써 차였어?”

태혁은 차현의 앞에 술잔을 놓고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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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 놈한테 꽃다발을 받았으면 내가 차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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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발을 준 남자가 어떤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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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못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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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남자가 준 건 확실하고?”

태혁이 고개를 돌려 차현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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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뜻이야?”

차현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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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줬을 수도 있잖아. 꽃은 꼭 남자가 줬다고 생각하는 것도 편견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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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떡.

태혁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술집에서 뛰어나갔지만, 차현은 굳이 붙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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