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1호 최태혁 팬클럽
(10/84)
10화. 1호 최태혁 팬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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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호 최태혁 팬클럽
2022.11.04.
태혁은 정형외과 레지던트를 아슬아슬하게 붙잡는 데 성공했다.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하지.”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온 최태혁 교수가 진짜 독사처럼 목을 휘어 감으며 말하자 정형외과 레지던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교, 교수님. 전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곧 하게 될 것이다. 그것도 그에게 아주 불쾌할 짓을.
그래서 태혁은 정형외과 레지던트를 질질 끌고 외과 병동을 벗어났다.
“민호준?”
태혁이 목에 건 직원 카드를 보며 이름을 말하자 민호준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내가 말이지 그쪽 교수님이랑 사이가 아주 안 좋아.”
민호준은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인지 알 수가 없어서 눈만 크게 뜨고 태혁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정형외과와 일반외과가 사적으로 엮이는 일이 1도 없었으면 하는데,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최태혁 교수가 엄숙하게 말하며 점점 다가오니 민호준은 점점 압박을 느끼며 이젠 숨쉬기가 불편해졌다.
“그게 전…….”
왜 하필 그가 문나영에게 고백하기로 한 날, 두 교수 사이가 안 좋아진 건지 민호준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민호준이 대답하기를 미적대자 최태혁 교수의 눈빛은 단번에 독사처럼 번뜩였다.
“대답을 안 하는 건 내 말이 우습다는 건가?”
“절대 아닙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민호준은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외쳤다.
성공적으로 마돈나를 지켜낸 태혁은 몸을 돌리다가 윤이나를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다.
그는 그대로 윤이나를 지나쳐 걸어가 버렸다.
윤이나는 떠나는 태혁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그에게 혼난 레지던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민호준은 한껏 억울한 목소리로 그가 당한 일을 시시콜콜 윤이나에게 보고했다.
***
스무 살의 간암 환자가 새로 입원하였는데, 공식적으로 1호 최태혁 교수 팬이 되었다.
본인 입으로 말했다. 자기가 얼빠라고.
하필 그녀가 담당이라 만날 때마다 최태혁 교수 외모 찬양하는 소리를 계속 들어야 했다.
“진짜 로맨스 드라마 남자 주인공처럼 생겼어요.”
성격은 극한직업에 딱 어울린다는 걸 모르니까 하는 소리였다.
레지던트들에게는 독사 같은 혀를 남발하는 최태혁 교수는 그래도 환자들한테는 말을 가려가면서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딱히 다정한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네, 최 교수님이 잘생기시긴 했죠.”
나영은 대충 동의하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미열이긴 하지만 열이 계속 떨어지지 않고 있어서 신경이 쓰이는 환자였다.
“제 첫키스 상대는 최 교수님 같은 남자였으면 좋겠어요.”
움찔.
나영은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
전에 페톨 헤파티쿠스 환자 앞에서 안 좋은 표정 지었다가 그녀한테 한 소리 들은 PK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첫키스라잖아.
어떻게 안 놀랄 수 있겠는가.
나영은 서둘러 병실을 나와서 이동하다가 창밖으로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추어 섰다.
두 사람이 말싸움하고 있었는데 분명 한 명은 간이식 받을 황명순 환자 딸이었고, 다른 한 명은 공여자의 남편으로 알고 있다.
두 사람이 언성을 높이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심상치 않게 느껴져서 나영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최태혁 교수한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이 통화 중이니 다음에 다시 걸어주시기…….]
하필이면 통화 중이었다.
나영은 직접 최태혁 교수를 찾기 위해서 서둘러 뛰어갔다.
최 교수가 연구실로 가는 걸 봤다는 말을 듣고 연구실까지 온 나영은 급한 마음에 문부터 벌컥 열었다.
“교수님! 꺄악!”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던 태혁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서 비명을 지르는 그녀 때문에 덩달아 몸이 경직되었다.
“노크할 줄도 모르나?”
“죄송합니다!”
나영은 허둥지둥 사과하며 서둘러 몸을 돌렸다.
심장이 쾅쾅쾅 가슴에 망치질하듯이 뛰어댔다.
이쪽은 쳐다도 보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태혁은 혼자 피식 웃었다.
어차피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왜 저리 유난인가 싶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태혁은 셔츠의 단추를 마저 채우며 물었다. 나영은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설명했다.
“아! 황명순 환자 딸과 아들이 지금 병원 밖에서 싸우고 있는 걸 목격했어요.”
“그래서?”
그의 담담한 반응에 나영은 울컥해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식수술 때문에 싸우는 걸 테니까 교수님이 만나서 잘 해결을…….”
“내가 할 일은 이식수술이야.”
“하지만!”
“의사는 신이 아냐. 모든 걸 다 통제하고 해결할 수는 없어. 할 필요도 없고.”
저벅저벅.
말을 하는 동안 최태혁 교수는 점점 그녀와 가까워졌다.
우뚝.
그가 그녀의 바로 뒤에 멈추어 선 게 느껴졌다.
“그리고 사람이랑 말할 때는 눈을 봐. 벽을 보지 말고.”
지적을 당한 나영은 어깨가 움찔 떨렸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그녀의 모습이 바보 같았기에 나영은 몸을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교수님이 중재하실 생각이 없다면 그럼 누가 합니까?”
“네가 해보던가.”
나영은 눈이 커졌다.
“제가 해도 되나요?”
“그래, 그런데 본인 담당 환자 먼저 챙겨야 하지 않겠어?”
“네?”
“이수지 환자 계속 열 안 떨어지지?”
최태혁 교수가 지적하자 나영은 마치 그녀의 잘못인 것만 같아서 무겁게 대답했다. 그렇다고.
***
열이 내리지 않아서 걱정되었던 이수지의 상태가 결국 더 안 좋아졌다.
그녀는 더 이상 최태혁 교수에 대해 떠들지 않게 되었다.
떨어지지 않는 고열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는 거뿐이었다.
화장실 가는 것조차 쉽지 않아서 요도관을 꽂아야 했다.
무기력한 스무 살 아가씨를 보니 이젠 1호 최태혁 교수님 팬이라고 잔망을 떨 때의 그녀가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이러다 합병증이 생기면 최악의 상황까지 될 수 있기에 그녀의 상태를 주시하게 되었다.
“네? 최태혁 교수님 사진을 찍으라고요?”
그녀의 지시에 인턴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 사진이라도 이수지 환자한테 보여주면 좀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그건 그러겠지만 만약 몰래 사진 찍다가 최태혁 교수한테 들키면 엄청난 재앙이었다.
인턴이 어려워하자 나영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나도 기회 될 때 사진 찍을 테니까 우리 같이 이수지 환자가 또 웃게 해주자. 알았지?”
인턴도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의료진이 할 필요가 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이것도 사람이 하는 일이었기에 이렇게라도 이수지 환자에게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최태혁 교수한테 사실대로 말하고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부탁할까도 싶었지만, 간이식 수술 환자 보호자의 불화도 모른 척하는 그가 이수지를 위해 해줄 거 같지 않았다.
그리고 대놓고 거절당한 뒤 몰래 찍는 건 더 힘들 거라 그냥 처음부터 몰래 찍기로 했다.
그는 잘난 얼굴 기부하는 셈 치면 될 거다.
몇 시간 뒤 인턴이 자신이 찍은 최태혁 교수 사진을 보내왔는데 뒷모습이거나 아주 먼 곳에서 찍어 얼굴이 작게 나온 사진뿐이었다.
인턴이 이 사진을 찍을 때 얼마나 쫄았는지가 사진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변 간호사님이 사진 왜 찍냐고 묻기에 이수지 환자 보여줄 거라고 했더니, 도와주겠대요.>
그녀가 먼저 부탁도 안 했는데 사진 찍어주겠다는 사람이 생기자 나영은 판을 제대로 키워보기로 했다.
<제일 멋진 사진 찍어오는 사람한테 커피 기프티콘 준다고 해.>
자고로 사람은 상이 있으면 더 열심히 하게 되는 본능적인 동물이었으니까.
그렇게 병원이 최태혁 파파라치 양산소가 되었다.
이 일의 주동자가 그녀라는 걸 최태혁 교수한테 걸리면…….
으. 상상하기도 싫다.
***
찰칵.
셔터 소리가 들리자마자 태혁은 휙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어제오늘 그의 주위에서 심심찮게 들리는 소리였다.
요즘은 핸드폰으로 사진 찍는 사람이 사방에 널렸기에 처음엔 별로 신경 안 썼는데 들리는 횟수가 늘어나니 청각 쪽이 예민해졌다.
꼭 그를 찍고 있는 느낌이었다.
태혁은 예리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는데, 사람들이 일부러 그의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병원 안에서 뭔가 그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예감이 들긴 했지만, 그게 정확히 뭔지 알 수가 없어서 짜증이 살짝 올라왔다.
태혁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려 걸어가다가,
찰칵.
그 소리가 또 들리자 아까보다 더 빠르게 돌아보았다.
누군지 걸리기만 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다짐하면서.
***
포토 상품을 건지 이틀 만에 최태혁 교수한테 걸리는 사람이 나타났다.
평소에도 조심성이 없는 2년 차 남호진이 근거리에서 최태혁 교수를 찍으려고 욕심내다가 딱 걸려서 핸드폰을 빼앗겼단다.
이대로 모든 사람의 노력이 수포가 되는 건가 싶었는데, 다행히 의리는 있어서 본인 혼자만 죽고 끝났다.
남호진이 벌로 리포트 50장을 받은 걸 보고 이탈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커피 기프티콘 좀 타보자고 도전하기에는 벌이 너무 크다는 거다.
이수지 환자를 위한 작은 이벤트가 안 좋은 쪽으로 변질되는 거 같았지만, 나영은 멈출 수 없었다.
상품을 거니 좋은 사진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으니까.
그녀가 이수지에게 최태혁 교수 사진들을 보여주었더니 간만에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나중에 이 사진 중에 제일 좋은 거 한 장 수지 씨가 뽑아줘야 해요.”
그녀의 부탁에 이수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그녀가 반응을 보이니 나영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나영은 생체 간이식에 대해 정리한 논문 자료를 최태혁 교수한테 가져다주는 길에 그에게 줄 커피 한 잔을 샀다.
아무래도 몰래 사진 찍은 게 마음에 찔려서 뇌물이랄까.
“교수님. 커피 드세요.”
처음으로 커피를 사 온 그녀를 최태혁 교수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한테 부탁할 거 있나?”
그는 이미 사진 모델로서 충분히 많이 내주고 있었다.
나영은 뻔뻔하게 부정했다.
“아뇨. 제가 마시는 김에 교수님 것도 같이 샀어요.”
태혁은 그녀를 안 지 한 달도 안 되었지만, 그 말이 참 그녀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영은 함부로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잘 마실게.”
커피를 가져가는 그의 손을 보며 나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진 백 장보다 저 손으로 이수지 환자 손 한 번 잡아주는 게 더 효과 있기는 하겠네.’
사진 이벤트에서 끝나지 않고 그녀도 점점 팬클럽 회원의 마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다 그녀가 2호 최태혁 교수 팬클럽 회원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커피잔을 잡은 그의 손을 뚫어지게 보자 태혁은 눈을 좁혔다.
어째 오늘은 커피만 이상한 게 아니라 그녀의 행동도 이상했다.
“나한테 뭐 할 말 있나?”
최태혁 교수가 먼저 묻자 나영은 움찔하며 그의 손에서 서둘러 시선을 떼었다.
“아! 그게…….”
말이라도 해볼까.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거절당할 게 불안해서 나영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사진 찍어도 되냐는 말도 못 했었는데, 손잡아달라는 말이 더 쉬울 리가 없었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태혁도 예민해졌다.
뭔데 이리 뜸을 들이는 거야?
쉽게 말하지 못하는 걸 보니 병원 일은 아닌 듯했다.
평소보다 더 빨리 깜빡이는 그녀의 눈빛에서 수줍음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 설마…….
그의 심장이 기대감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긴. 그가 하룻밤으로 깔끔하게 잘라낼 수 있는 그런 남자가 아니긴 했다.
이런 그를 존경심만으로 대하기는 당연히 어렵겠지.
그녀는 아직 한마디도 떼지 못했는데 그는 이미 머릿속으로 너무 멀리 가버렸다.
그리고 그걸 거의 확신까지 해버렸다.
“흠. 문 선생이 말하기 힘들면 내가 하지. 다 알겠으니.”
갑자기 그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폼을 잡자 나영은 화들짝 놀랐다.
“네? 사진 찍기 주모자가 저인 거 이미 알고 계셨어요?”
“…….”
“…….”
“뭐?”
싸늘한 기운이 그녀를 휘감았다.
아무래도 망한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