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운명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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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운명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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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운명이라고 생각해
2022.10.28.
윤이나는 나영을 향해서도 인사했다.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갑다는 표정을 지으며.
“간담췌 외과 문나영 선생 맞지?”
나영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와 윤이나 교수 사이에는 지금껏 어떤 사적 감정도 없었다.
그녀한테 윤이나는 친절하고 실력 좋은 여자 외과 의사였기에, 그녀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윤이나가 이곳에 나타난 것만으로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최태혁과 윤이나 사이에 정확히 어떤 사연이 있는지 그녀는 잘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한 남자를 두고 다른 여자와 경쟁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건 너무 유치하고 시간 낭비였다.
그리고 나영은 이미 마음을 먹었다. 최태혁이란 사람을 그녀의 지도교수로 존중만 하기로.
다른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윤이나와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난 집에 가기 전에 여기서 가끔 혼자서 저녁 먹고 가.”
윤이나는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최태혁 교수에게 설명했다.
최태혁 교수는 별말 없이 물잔을 들어 물만 마셨다.
그런 그의 모습을 윤이나가 가만히 쳐다보았다.
마치 그가 같이 먹자는 말을 꺼내길 기다리는 듯이.
매정한 남자와 순정적인 여자라니.
나영은 이 상황을 참을 수 없어져서 벌떡 일어났다.
“윤 교수님. 여기 앉으세요. 저는 바로 병원에 들어가 봐야 해서요.”
“앉아.”
바로 최태혁 교수가 차갑게 그녀에게 명령했다.
나영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이 상황에 그녀를 붙잡는 건 그녀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었다.
두 사람의 일일 뿐인데 왜 그녀까지 불편하게 만드는가!
“진짜 병원에 중요한 일이 있어요.”
“그래서 레지던트 1년 차가 교수인 나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거야?”
이런 식으로 무시하면 나영은 순순히 순응할 수 없었다.
“제가 교수님처럼 수술실에서 사람 살리는 대단한 일은 아직 못 해도, 제가 하는 일도 환자들에게 꼭 필요한 일입니다.”
“아직은 하찮다는 거 본인도 안다는 거네. 그러니까 앉아. 네가 할 수 있으면 병원에 있는 아무나 할 수 있을 테니까. 다른 사람 시켜.”
독사 교수의 독한 혀에 제대로 당한 나영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너무 분해서.
“저는 오늘 호의로 교수님 밥 사드린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사람 무시하는 분이랑 도저히 같이 밥 못 먹겠네요. 밥은 혼자 드세요!”
나영은 가방을 챙겨 들고 그대로 식당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태혁은 화내며 가버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고개를 돌려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 윤이나를 쳐다보았다.
“너는 이제 만족해?”
윤이나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문나영은 네 말에 화나서 간 거야. 나 때문이 아니라.”
윤이나가 하필 이 시간에 이 식당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태혁은 그녀가 속내와 다르게 좋은 사람인 척 구는 게 짜증 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윤이나를 지나쳐 걸어가며 차갑게 말했다.
“넌 정말 하나도 안 변했네. 밥맛 떨어지게.”
그녀한테도 험하게 말하고 떠나버리는 태혁의 뒷모습을 이번엔 윤이나가 눈으로 좇았다.
왜 그는 그녀를 이리 모질게 대하는 건가 싶었다.
그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처연한 표정을 한 윤이나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착한 여자였다.
***
퍽!
갑자기 날아온 음료수 캔을 겨우 손으로 받아낸 승준은 기겁하며 외쳤다.
“야! 하마터면 머리에 맞을 뻔했잖아!”
화를 내는 승준을 태혁은 더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너지? 어제 윤이나 식당으로 보낸 거.”
승준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을 키웠다.
“무슨 소리야? 응급 수술 때문에 정신없었는데 내가 윤이나랑 뭘 해?”
승준이 아니었다는 말에 태혁은 더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승준이 그의 옆까지 걸어와서 물었다.
“설마 너랑 문나영 식사하는 자리에 윤이나가 나타났어?”
태혁이 대답하지 않아도 그의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승준은 태혁이 던진 콜라의 캔 뚜껑을 따며 말했다.
“윤이나는 아직 너한테 마음이 있나 보네. 그러지 말고 문나영 대신 윤이나랑 잘해 봐.”
“죽을래?”
태혁이 저승사자처럼 굴자 승준은 바로 뒤로 물러나며 그와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너는 왜 윤이나를 그렇게 싫어하냐? 내가 보기에는 윤이나나 문나영이나 비슷해 보이는데. 둘 다 예쁘지, 둘 다 의사지, 둘 다.”
“닥쳐! 네가 문나영에 대해 뭘 알아?”
태혁이 무조건 성을 내니 승준도 곱게 말이 안 나왔다.
“그래! 난 모른다. 그러는 넌 뭘 그리 잘 아는데? 미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적어도 사람을 좋아하는 방식이 윤이나처럼 옹졸하지 않았다.
‘야! 이나가 스토커 때문에 다쳤대! 우리가 이나 지켜줘야지!’
PK시절, 다친 윤이나를 지켜주기 위해 남자 동기들은 모여서 제비뽑기를 했다.
제비에 뽑힌 사람이 책임지고 윤이나의 퇴근길을 동행하여 스토커한테 그녀를 지켜주기로.
그게 그가 뽑혔을 때 태혁은 단지 우연인 줄 알았다.
나중에야 알았다.
윤이나가 그를 좋아하는 걸 알고 일부러 그가 뽑히게 제비뽑기를 조작했다는 걸. 바로 오승준 저 자식이.
그래도 스토커는 진짜 존재했고, 그녀가 다쳤으니 태혁은 뽑힌 책임을 다해 윤이나의 퇴근길에 동행했다.
결국 윤이나가 다친 게 스토커 탓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뒤로는 그녀에 대한 인간적인 신뢰마저 사라졌다.
그런데 그때 이미 병원에는 그와 윤이나가 사귄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태혁은 마지막으로 윤이나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서 침묵했는데, 윤이나는 끝까지 자기 입으로 잘못된 소문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걸 즐겼던 거 같다.
윤이나는 단 한 번도 그한테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 적조차 없었다.
오로지 주변 사람들이 그녀 대신 움직이게 하고, 말하게 하고, 오해하게 했다.
지금까지도 윤이나는 솔직해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게 윤이나가 사람을 좋아하는 방식이라면 태혁은 죽어도 사양이었다.
태혁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며 방을 나가자 승준이 걱정이 되어 물었다.
“어디가?”
“복수하러!”
“뭐? 누구한데?”
승준은 태혁이 윤이나한테 가는 줄 알고 놀라서 쫓아갔다.
***
나영은 연필깎이에 연필을 꽂고 열심히 돌리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생각할수록 열 받았다.
최태혁 교수는 아무리 존경해 주고 싶어도 그 막말하는 입 때문에 불가능했다.
‘내가 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래. 너 잘났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스테리였다.
이렇게 재수 없게 말하는 남자인데 처음 만났을 때는 말이 잘 통한다고 생각하다니.
이래서 술을 조심해야 하나 보다.
앞으로는 절대 남자와 술 마시는 일은 하지 않을 거다.
그녀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착각에 빠졌었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후회하며 남은 연필을 전부 깎아대고 있는데, 레지던트들이 들어와서 또 최태혁 교수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그의 사악한 독사 기운은 일반외과를 넘어 병원 전체로 퍼지고 있었다.
“이야. 최 교수님 이제 하다 하다 다른 과 레지던트까지 잡았대.”
“최 교수가 왜 남의 과 일에 간섭해요?”
“내 말이. 남의 과 레지던트가 잘못하면 거기 지도교수가 혼내면 될 일인데. 그걸 최 교수님이 한 거잖아. 이건 영역침범 아니냐?”
레지던트들은 그들의 지도교수가 못된 것으로는 넘사벽이라는 걸 깨닫고 몸을 떨었다.
“그래서 누가 최 교수님한테 당했는데요?”
“흉부외과 임재길, 내과 김호영, 안과 박태만. 흉부외과나 내과는 그럴 수도 있다 치고, 최 교수님이 도대체 안과는 왜 간 거냐?”
멈칫.
나영은 동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연필 깎는 걸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게 대화 중 나온 이름들이 익숙했다.
뭔가 공통점이 있는 거 같다는 느낌이…….
나영은 고개를 저으며 깎은 연필을 정리했다.
그냥 우연일 거다.
그녀와 잔 것도 기억 못 하는 남자가 그녀한테 고백한 남자들을 어찌 알고 찾아간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
미국에서 최태혁을 데려왔다고 함박웃음을 짓던 박 과장이 이젠 최태혁 때문에 울상을 짓고 있었다.
최태혁이 도장 깨기 하듯이 문나영에게 고백한 남자들을 찾아가서 진상을 떨어서 결국 다른 과에서 경고까지 먹었다.
남의 과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최태혁 교수가 과장실로 들어간 뒤 점잖은 박 과장이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모두 못 들은 척했다.
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가 혼나는 일은 흔하디흔했지만, 교수가 불려가서 혼나는 건 체면 깎이는 일이었기에.
그 어려운 일을 최태혁 교수가 병원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해냈다.
과장실에서 나온 최태혁 교수는 평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레지던트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거창하게 자기 논문 이야기를 했다.
“내 전공은 간이식 수술이다. 앞으로 이 병원에서 내가 하게 될 간이식 수술 사례들을 모아서 성인 생체 간이식에 대한 논문을 쓸 거다. 내가 아무나 골라도 되지만, 과장님이 레지던트들한테 잘하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이렇게 먼저 의견을 묻는 거다. 내 논문 보조하고 싶은 사람 있나?”
최태혁 교수의 목소리는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며 차분했지만, 레지던트들은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이 고요했다.
어째 막말을 뱉어낼 때보다 공평하게 기회를 주겠다는 지금 모습이 더 공포스러웠다.
최태혁 교수가 지금은 정상인처럼 굴고 있지만, 막상 손을 들고 지원하면 그때부터 악마로 변해서 괴롭힐 것만 같았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아무도 감히 먼저 나서서 지원하지 않았다.
“이 논문에 참여하면 앞으로 내가 하는 모든 간이식 수술에 참여할 수 있다. 그래도 없다고?”
쉽게 지원자가 안 나오자 최태혁 교수는 팔짱을 끼며 이 기회가 얼마나 좋은 건지 어필했다.
나영은 간이식에 대해 제대로 배울 기회라 솔깃했고, 딱히 그의 괴롭힘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와 가까이 엮이기 싫어서 가만히 있었다.
모두 그의 눈을 피하자 태혁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오케이. 그럼 운에 맡길 수밖에. 다들 자기 이름 적어서 내.”
결국 제비뽑기로 뽑히게 되었다.
레지던트들은 설마 자기가 뽑히겠어 하는 마음으로 쪽지에 이름을 적어서 제출했다.
나영도 이름을 적은 쪽지를 최태혁 교수의 앞에 있는 상자 안에 넣었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뽑힌 사람은 운명이라고 생각해.”
그리 말하며 최태혁 교수가 상자 안에 손을 넣어서 쪽지 하나를 뽑자 레지던트들은 긴장한 눈으로 최태혁 교수의 손만 바라보았다.
나영도 덩달아 긴장이 되었다.
절대 그녀는 아닐 거다.
그와 운명 따위일 리가 없다.
최태혁 교수가 뽑은 쪽지를 펴는 게 클로즈업되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손은 그녀의 얼굴을 다 덮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그리고 굉장히 따뜻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나영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름을 확인한 그의 입꼬리 한쪽이 슬쩍 올라갔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반대로 그녀는 굉장히 불안해졌다.
설마,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