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내 방으로 와
(6/84)
6화. 내 방으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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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내 방으로 와
2022.10.21.
최태혁 교수가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고 다시 다가오자 나영은 기겁하며 몸을 돌려 도망쳤다.
또 달아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태혁은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그를 피해 달아나는 게 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가!
태혁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사람의 심리라는 게 도망치면 더 붙잡고 싶어지는 법이다.
제대로 인내심 테스트 당하는 기분이었다.
나영은 최태혁 교수한테서 도망쳐 곧장 샤워실로 가서 몸을 몇 번이고 씻었다.
평소 5분 만에 끝내던 샤워를 15분이나 걸려서 끝내고 나온 나영을 기다리고 있는 건 살벌한 호출 콜이었다.
<내 밑에서 무사히 레지던트 하고 싶으면 10분 내로 내 방으로 와.>
이건 그냥 협박문이었다.
그런데 무섭게도 그 메시지가 온 게 이미 10분이 넘었다.
갈까 말까 망설이던 나영은 불안해하며 최태혁 교수의 연구실로 향했다.
이 정도면 도주 상습범이라 가중처벌이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와 엮이면 자꾸 도망칠 일이 생기는데.
최태혁 교수의 이름이 걸린 연구실 앞에 도착한 나영은 심호흡하고 노크했다.
똑똑.
달칵.
문을 연 나영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이 커졌다.
무서운 협박문으로 그녀를 연구실로 부른 최태혁 교수는 소파에 기대앉아서 잠이 들어 있었다.
‘뭐야? 진짜 자는 거야?’
그녀가 연구실 안으로 들어와도 눈을 뜨지 않는 걸 보니 잠이 든 게 맞나 보다.
그래도 안심하지 못하고 나영은 거리를 유지하며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마치 가까이 가면 물리기라도 할 사나운 동물을 대하듯이.
몇 분이 지나도 그가 눈을 뜨지 않자 나영은 경계심을 풀고 최태혁 교수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호텔에서 마지막으로 본 잠든 얼굴과 비슷해서인지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그의 몸에서 알싸한 알코올 향과 고기 향이 섞여서 풍겨왔다.
그녀가 그의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면 그도 충분히 그녀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았을 거라, 아까 도망친 건 정말 잘한 거 같았다.
비록 최태혁 교수한테 더더욱 찍힌 거 같지만.
“교수님?”
나영은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열심히 깨우지 않은 건 어차피 그가 깨어나 할 일은 그녀를 혼내는 거라.
나영은 허리를 숙여 그의 얼굴에 좀 더 다가갔다.
이젠 촘촘하게 뻗어 있는 속눈썹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잠든 그의 얼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인지 잘 만들어진 조각상같이 보였다.
날렵한 콧대와 깊은 눈매가 어우러진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갑자기 절정의 순간 그가 지었던 표정이 떠오르며 나영은 서둘러 몸을 뒤로 물렸다.
나영은 그를 깨우지 않고 그냥 떠나기로 했다.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가던 나영은 멈추어 섰다.
이대로 그냥 가면 그녀가 그의 지시대로 연구실에 왔다는 증거가 안 남기에 나영은 책상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포스트잇에 글을 남기면 될 거다.
그의 책상 위에 펜은 있는데, 포스트잇이 보이지 않아서 나영은 책상 서랍을 열어 보았다.
멈칫.
그녀가 찾던 건 포스트잇이지만 다른 걸 보고 그녀의 동작이 멈추었다.
서랍 안에 작은 벨벳 상자가 있었다. 꼭 반지가 들어갈 크기의.
나영은 고개를 들어 소파에서 여전히 자는 최태혁 교수를 다시 쳐다보았다.
이젠 그를 그냥 지도교수로 대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이건 또 어떤 여자 주려고 준비한 건지.
열이 확 올라왔다. 자격도 없이.
***
눈을 뜬 태혁은 자신이 연구실 소파에서 잠든 걸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술 마시고 아무 곳에서나 자는 건 딱 질색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잔 거야?
태혁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두 발을 바닥으로 내렸다.
툭.
종이 밟는 소리가 나자 태혁은 구두 밑창을 확인했다.
지익.
구두 밑창에서 떼어낸 건 포스트잇이었다.
<주무셔서 그냥 돌아갑니다. 문나영.>
그녀가 이미 왔다 간 걸 알고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그가 다가갈 때는 그녀가 도망치고, 그녀가 먼저 찾아왔을 때는 그가 술기운에 잠들고.
뭐가 하나같이 이따위인가 싶었다.
태혁은 그가 밟아서 구겨진 포스트잇을 보며 서서히 미간이 좁아졌다.
“…….”
그런데 이걸 왜 구두 밑창에 붙여놓은 거야?
어쩐지 그게 굉장히 찝찝했다.
태혁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는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 넣어둔 포스트잇과 문나영이 글을 쓴 포스트잇이 같은 걸 확인한 태혁은 그 서랍에 같이 넣어두었던 벨벳 상자를 꺼냈다.
달칵.
상자를 열자 한 짝뿐인 귀걸이가 나왔다.
‘설마 이걸 봤나?’
태혁은 귀걸이와 포스트잇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도 왜 구두 밑창에 붙여두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그가 발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자서?
하지만 그는 교수인데.
포스트잇이 보여준 정중함과 무례함의 경계가 모호해서 태혁은 한참이나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러라고 구두 밑에 붙여두고 갔나 보다.
***
대동맥 치환술을 받은 환자가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옮겼다고 해서 나영은 찾아가 보았다.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환자가 멀쩡하게 앉아서 스스로 밥을 먹는 모습을 보니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저렇게 건강해질 수 있는 사람을 포기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차마 병실 안으로 들어가서 인사할 수는 없었다.
뚜벅.
누군가 그녀의 바로 옆에 와서 서자 나영은 불편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가 최태혁 교수인 걸 알고 눈이 커졌다.
“교수님도 저 환자 보러오셨어요?”
이식혈관외과 환자이지만, 그가 살린 환자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니, 난 문 선생 쫓아왔는데.”
최태혁 교수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직선으로 쳐다보며 하는 말에 나영은 잠시 멍해졌다.
“문 선생이 나 보면 도망가는 게 습관이 된 거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난 문 선생 쫓아가는 습관을 들이려고.”
족집게로 사람을 막 꼬집는 것 같은 말이었다.
나영은 바로 잘못을 빌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럴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사과도 반복되면 습관이고.”
여유롭게 그녀의 말을 모두 비틀어 버리는 그를 나영은 속으로 몰래 욕했다.
그래, 너 잘났다.
“그런데 내가 문 선생한테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의학 관련 질문은 아닐 거 같아서 나영은 살짝 긴장했다.
설마 기억이 났나?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건 아니었다.
“그날 포스트잇을 왜 내 구두 밑에 붙이고 간 거야?”
최태혁 교수가 정말 궁금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묻자 이번엔 나영이 표정 변화 없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전 테이블에 놓아두었는데요. 아마 바닥에 떨어진 포스트잇을 교수님이 밟으셨나 봐요.”
그녀가 발뺌하자 최태혁 교수는 눈빛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 일로 그녀를 더 야단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진짜 했다는 증거가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내 포스트잇이 잘못했네. 제대로 붙어 있지도 못하고 떨어졌으니.”
나영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느라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 이식혈관외과 레지던트가 두 사람에게 다가와 먼저 인사했다.
그날 수술실에 들어왔던 레지던트였다.
“류상민 환자 보러 오셨어요? 안 그래도 두 분한테 꼭 인사하고 싶다고 했거든요. 저랑 같이 들어가시겠어요?”
환자에게 감사 인사를 받으라는 말에 최태혁 교수는 몸을 돌리며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내 환자도 아닌데 굳이 왜.”
그는 정말 그냥 걸어가 버렸다.
굳이 왜라니.
대동맥 파열 환자가 수술실에서 살아날 확률은 50% 미만이었다.
그리고 그날 최태혁 교수 손에서 환자가 죽었으면 그는 이식혈관외과 교수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의료소송을 당했을 거다.
모든 것이 그에게 불리한 것만 있는 상황에서 수술실에 들어와 메스를 잡았으면서도 자기 환자 아니라고 저리 가버리다니.
나영은 이식혈관외과 레지던트에게 인사하고 최태혁 교수의 뒤를 쫓아갔다.
아까는 최 교수가 그녀를 쫓아서 왔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녀가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최 교수님!”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앞서 걷던 최태혁 교수가 멈추어 서서 돌아보았다.
“점심 드셨어요?”
태혁은 나영이 먼저 다가와 묻자 좀 얼떨떨했다.
“아직 안 먹었는데.”
밥 먹으러 가던 길에 그녀를 발견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그럼 제가 사드릴게요.”
그를 피하기 바쁘던 그녀가 먼저 밥을 사 주겠다고 하자 태혁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설명을 바라고 있었기에 나영은 반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환영회 못 갔잖아요. 정식으로 교수님 환영하는 의미로 밥 사드릴게요.”
그와 그녀의 사이를 교수님과 레지던트로 못 박는 그녀의 말에 태혁은 왼쪽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녀가 그 때문에 레지던트 생활을 망치지 않길 바라서 기억이 안 나는 척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이렇게 빨리 그날 밤을 잊길 바란 것도 아니었다.
교수인 최태혁과 남자 최태혁은 결코 한 마음이 될 수 없었다.
그녀도 겉으로만 완벽하게 적응한 척하는 건지, 정말 마음까지 그런 건지 묻고 싶었지만, 그는 물어볼 수 없었기에 말은 퉁명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래서 교수한테 아부하는 건가? 난 그런 거 딱 질색이야.”
사실 그가 이렇게 성격 나쁘게 말할 때면 나영은 자꾸 그날 밤의 그가 떠올랐다.
그가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는지.
하지만 이젠 정말 그를 지도교수로만 보고 싶었기에 나영은 끝까지 교수한테 잘 보이고 싶은 레지던트처럼 행동했다.
“제가 교수님한테 실수 많이 해서 이렇게라도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두 번이나 교수인 그를 피해 도망쳤으니 제대로 된 사과가 필요하긴 했었다.
최태혁 교수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그럼 밥은 다음에 사.”
“네?”
“30분 뒤에 수술 있어.”
“30분이면 충분하지 않나요?”
병원에서 의사들 급하게 밥 먹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30분이면 밥 먹고 후식까지 해치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니야. 시간이 부족해.”
최태혁 교수는 단호히 말하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나영은 멀어지는 최태혁 교수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설마 나랑 밥 먹기 싫어서 핑계 대는 건가?
나영은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할 수 없이 혼자 점심을 먹으러 갔다.
***
간경화 환자는 복수가 차면 심폐를 압박하여 호흡곤란이 오기에 복수를 빼주어야 했다.
나영은 복수 배액을 해본 적이 없다는 인턴에게 방법을 알려주었다.
“타진하면 이동탁음이 들릴 거야.”
타진으로 복수의 위치를 확인한 뒤 드레싱을 하고 18게이지의 굵은 바늘을 환자의 몸에 꽂았다.
게이지가 높은 바늘일수록 고통이 크기에 환자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일부러 환자가 아니라 관에 차오르는 노란 복수만 쳐다보았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무슨 일을 하든 경력이 쌓이면 익숙해지고 무덤덤해진다고 했다.
그런데 과연 고통스러워하는 환자의 모습이 익숙해지는 날이 올까?
나영은 자신이 없었다.
환자 처치를 끝낸 뒤 차팅하고 있는데,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메시지 확인을 하던 나영은 발신자가 ‘최태혁 교수’인 것을 보고 멈칫했다.
<그래서 밥은 언제 살 거지?>
어라? 다음에 밥 사라는 말이 진짜였나 보네.
그녀는 같이 밥 먹기 싫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었다.
나영은 바로 답 메시지를 보냈다.
<저녁도 괜찮으세요? 전 오늘 아니면 다음 주 월요일 저녁 시간 되는데.>
식사 시간으로 30분도 부족하다고 하시니 최태혁 교수한테 맞추어 식사하려면 저녁을 사야 했다.
그리고 다시 차팅을 이어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최태혁 교수의 답변이 도착했다.
<그럼 오늘 저녁 7시 30분에 정문 앞에서 봐.>
꼭 데이트 신청 같은 메시지에서 나영은 한동안 시선을 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