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마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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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마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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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마돈나
2022.10.17.
그의 전화를 받고 술집으로 나온 오승준은 태혁을 쳐다보며 빙글 웃었다.
“너 미국 있는 동안 성격이 변한 거야? 오늘만 유독 이상한 거야?”
갑자기 그한테 전화해서 여동생에 관해 묻지 않나, 여동생을 통해 자기 흑역사를 폭로하지 않나. 그리고 먼저 술 먹자고도 하고.
어느 것 하나 승준이 알던 최태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술만 마시던 태혁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과 레지던트 1년 차 문나영 알아?”
승준은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지. 예쁘고, 똑똑하고, 도도하고. 내 여동생이랑 동기인데, 그 학번 마돈나일걸.”
마돈나라는 거슬리는 호칭에 태혁은 미간을 구겼다.
“그래서 남자가 많았다고?”
승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 방면으로는 아주 칼 같았지. 고백해 오는 남자를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찼어. 자기 공부 방해된다고.”
그런데 레지던트를 시작하기 바로 전날에 그와 잤다.
결국 문나영은 처음부터 그와 하룻밤으로 끝낼 작정이었던 거다.
태혁의 턱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는 남은 술을 한 번에 다 마시고 빈 술잔을 내려놓으며 오승준에게 물었다.
“문나영한테 고백했던 남자들이 누구인지 알아?”
승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알아서 뭐 하게?”
그는 성인군자 타입이 아니라서 희생이 숭고하지도 않고 그저 손해 본 거 같았다.
그래서 스트레스 풀 구석이 필요했다.
***
그녀가 계속 간담췌 외과에 남겠다고 하자 박 과장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잘 생각했다고 말했다.
“최 교수가 입은 험해도, 정말 배울 게 많은 의사야. 그러니까 잘 적응해 봐.”
나영은 최태혁 교수 밑에서 수련하는 게 아직도 거북했지만, 그래도 도망치지는 않기로 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 남자한테 한심한 레지던트 취급받는 건 결코 참을 수 없었다.
반드시 그의 인정을 받아내고 싶어졌다.
레지던트 1년 차는 응급실 담당이기 때문에 당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남들 다 쉬는 주말 당직을 할 때는 심리적으로 특히 더 피곤한 거 같기는 했다.
잠시 짬이 나서 스테이션 의자에 앉았는데, 누군가 적어놓은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왔다.
<사자의 심장과 독수리의 눈과 여자의 손.>
훌륭한 외과 의사가 되려면 꼭 갖추어야 할 자질이었다.
그녀는 여자였으니 이미 하나는 갖추었다고 생각하며 실없이 웃고 있는데, 응급실 콜이 걸려왔다.
10대 남학생이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 실려 왔는데, 복부 팽만이 심하고 혈압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고 했다.
“어? CT 결과가 대동맥류 파열이면 이식혈관외과 환자 아닌가요?”
[지금 이식혈관외과 교수님이 외부에 있어서 당장 수술할 집도의가 없어요. 그쪽에 교수님 누가 계시죠?]
대동맥류 파열이라면 환자는 이식혈관외과 교수가 병원에 올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집도의를 찾아서 다른 병원으로 옮기면 이동하는 엠블런스 안에서 사망할 가망성이 컸다.
1분 1초가 급한 응급환자였기에 나영은 온몸의 신경이 올올이 일어서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다급히 지금 바로 수술 가능한 당직 교수에게 전화했다.
최태혁 교수였다.
그녀에게 설명을 듣자마자 최태혁 교수는 빠르게 말했다.
[바로 수술방 잡고 내가 가기 전에 수술 준비 다 끝내 놔.]
전화를 끊고 정신없이 수술방 어레인지하고 마취과에 연락하고 환자를 수술실로 이동했다.
최태혁 교수는 수술방에 들어오자마자 메스부터 잡았다.
그의 손에 들린 메스가 거침없이 환자의 복부를 가른 순간, 새빨간 피가 용솟음치듯이 솟구쳐 나와 사방으로 튀면서 그녀의 얼굴을 덮쳤다.
여전히 안경을 쓰고 있던 나영은 안경알이 피로 얼룩지며 시야가 시뻘겋게 변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지옥도 같았다.
“석션!”
최태혁 교수가 사납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영은 온몸이 굳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많은 피를 뿜어냈는데, 이 환자가 어떻게 산단 말인가.
환자의 혈압이 무섭도록 빨리 떨어졌다.
죽음의 공포가 그녀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밤에 시작된 수술은 해가 떴을 때야 끝이 났다.
그리고 환자는 죽지 않았다.
급하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이식혈관 외과 교수가 수술에 합류하여 파열된 대동맥을 박리하고 인조 대동맥으로 바꾸어 살아났다.
나영은 안경을 벗고 얼굴에 묻은 피를 천천히 닦아내었다.
그 작은 행동을 하는데도 남은 힘을 모두 써야만 했다.
겨우 얼굴만 깨끗이 씻고 나오던 나영은 복도 벽에 기대서 있는 최태혁 교수를 발견하고 멈칫하며 멈추어 섰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최 교수가 몸을 세우고 곧장 그녀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왔다.
나영은 다시 뒤돌아서 여자 화장실 안으로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아야 했다.
지금은 안경조차 없이 완벽한 맨얼굴로 그를 대해야 했다.
최태혁은 그녀의 앞에 버티고 서서 추궁하듯이 물었다.
“너 그 환자 죽을 거라고 생각했지?”
나영은 부정하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녀는 정말 그리 믿어서 수술 초반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최태혁 교수가 파열된 대동맥을 틀어막고, 환자한테 혈액과 하트만액을 쏟아부어서 겨우 혈압이 정상이 되었을 때야,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수술 어시스트를 할 수 있었다.
“내 수술에 들어와서 감히 그런 생각이나 하며 민폐 끼칠 거면 두 번 다시 들어오지 마!”
그래서 최태혁 교수가 못되게 몰아붙여도 나영은 부당하다고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모질게 혼을 내도 그녀가 계속 정신을 못 차리자 태혁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가 손을 앞으로 내밀며 명령했다.
“손 줘봐.”
설마 벌로 손바닥이라도 때리려는 건가 싶었다.
나영은 군말 없이 그녀의 왼손을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힘주어 쥐는 게 느껴졌다.
휙.
그녀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챘을 때, 그녀의 손은 최태혁 교수의 가슴 위에 놓여 있었다.
얇은 수술복 아래 그의 탄탄한 몸이 여실히 느껴졌다.
쿵 쿵 쿵.
심장이 뛰는 진동까지도 고스란히.
“잊지 마. 우리가 가진 것 중 제일 질긴 게 생명이야.”
나영은 눈가가 붉어졌다.
죽어도 잊지 못할 거 같았다.
수술실에서 느낀 죽음의 차가움과 그의 몸에서 느낀 생명력의 뜨거움을.
***
아침 회진 시간에 안경을 안 끼고 나타난 그녀를 보고 남호진이 굳이 한마디했다. 자기 딴에는 농담이라고.
“못생긴 문나영 오늘은 안 왔네.”
나영과 여자 의사들이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자 남호진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7시 50분이 되자 어김없이 최태혁 교수가 등장했다.
그의 시선이 잠시 안경 안 쓴 그녀에게 닿은 듯했지만 바로 시선을 돌리며 모두에게 말했다.
“회진 시작하죠.”
저 말을 들은 게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벌써 익숙해졌다.
나영은 가장 앞에서 걸어가는 최태혁 교수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진짜 잘하자고.
반드시 1년 차가 끝나기 전에 최태혁 교수의 인정을 받고 말리라.
나영은 최태혁 교수가 이 병원에 나타난 이후 처음으로 하룻밤의 기억을 내려놓고 의사 대 의사로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태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톡 톡 톡.
연구실 책상에 앉아 태혁은 데스노트를 노려보았다.
오승준이 알려준 문나영에게 고백한 남자 의사 리스트인데 많아도 너무 많았다.
어떻게 하면 합법적으로 이놈들을 모조리 처리할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교수님.”
치프 동건이었다.
“오늘 교수님 환영회 겸 회식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태혁은 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회식이면 문나영과 사적으로 대화할 기회가 있을지도 몰랐다.
태혁은 기회가 생기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알았어.”
최 교수가 흔쾌히 허락하자 동건은 바로 회식 공지를 간담췌 외과 전체에 뿌렸다.
간담췌 외과 소속의 참석은 무조건 의무였다.
그리고 최태혁 교수 정식 환영회였기에 다른 분과에도 참석하고 싶은 사람은 미리 알려달라고 전했더니 회식의 규모는 조금씩 커졌다.
***
“…….”
회식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최태혁이 가장 한가운데 앉아서 인상만 쓰고 있자 옆에 앉은 박 과장이 면박을 주었다.
“인상 좀 펴. 네 환영회다.”
그러니까 그를 환영해 주는 자리인데, 왜 문나영은 없는 건가.
회식에 온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짜증만 확 올라왔다.
이렇게나 많이 왔는데! 문나영은 왜!
“간담췌 외과 레지던트 중에 빠진 사람이 있는 거 같은데.”
결국 그는 먼저 말을 꺼내고 말았다.
오늘 나영과 당직을 바꾼 김영미가 대답했다.
“아! 문나영 선생은 당직이라 병동 지키고 있습니다.”
문나영이 오늘 당직이 아닌 걸 태혁은 미리 확인을 했기에 영미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영미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긴장했다.
마침 박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건배를 청해서 최태혁 교수의 독사 같은 눈빛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 잔들 드시고. 한강대학교 병원 외과 의사들이 이렇게 모이는 것도 드문 일이니 의미 있게 건배를 합시다.”
태혁은 포기하고 술잔을 들어 올렸다.
사실 문나영이 회식에 왔어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그날 밤처럼 대했다가는 큰일 나는 거고. 어쭙잖게 친절한 교수님인 척하면 더 경계를 살 게 뻔했다.
“그리고 오늘은 최태혁 교수의 환영회니까. 최 교수가 돌아온 걸 환영하며 한잔들 합시다.”
박 과장이 그의 이름을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이 거북하고 집중되는 순간에 앞자리에 앉은 윤이나가 웃으며 그가 들고 있는 잔에 자기 술잔을 부딪쳤다.
“환영해.”
그 모습을 구석에 앉아 있던 오승희가 재빠르게 핸드폰으로 찍었다.
회식 와서 큰 거 하나 건졌다는 생각에 혼자 굉장히 뿌듯했다.
***
“우어어어!”
흡사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는 의식이 혼탁한 간성혼수 환자가 사납게 몸부림치며 내는 소리였다.
그녀가 소리를 듣고 달려갔을 때 인턴은 제정신이 아닌 환자의 상태에 겁을 먹고 관장을 시도조차 못 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그녀가 같이 도와주었다.
억제대에 묶이고도 괴력을 보이는 환자의 몸을 붙들어 고정하기 위해서 두 사람이 온 힘을 다해 매달려야 했다.
겨우 관장 한 번을 끝내고 나영은 구석에 가서 쉬었다.
간성혼수 환자는 혈중 암모니아 수치가 떨어질 때까지 30분 단위로 계속 관장을 해야 했기에 에너지를 보충하려고 일부러 초콜릿 바를 꺼내 먹으려고 했는데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회식 간 승희가 보낸 것이었다.
최태혁 교수와 윤이나 교수가 술잔을 부딪치고 있는 사진이었다.
<내 말 맞지? 완전 메디컬 로맨스야. 흐흐흐흐.>
나영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녀는 더러움 참아가며 관장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저 남자는 옛 애인과 다정하게 술이나 마시고 있다니.
나영은 사진을 노려보며 초콜릿 바를 아그작 씹어 먹었다.
간성혼수 환자의 관장 뒷마무리는 인턴한테 맡기고 나왔을 때 이미 그녀의 몸에는 구린 냄새가 배어 있었다.
나영은 팔을 들어 올려 냄새를 맡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바로 탈의실에 가서 샤워하려고 했는데,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나영 선생.”
나영은 고개를 돌렸다가 최태혁 교수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걸 발견하고 흠칫했다.
뭐야? 환영회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있어?
그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오며 너무 빨리 가까워지자 나영은 서둘러 손을 뻗어 그를 저지했다.
“잠깐만요! 거기 멈추세요.”
우뚝.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설마 레지던트 1년 차한테 접근금지 명령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얼굴에 황당함이 가득했다.
“그냥 거기서 이야기하시면 안 될까요? 다 들리거든요.”
지금 그녀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그가 맡게 할 수 없었다.
이건 엄연히 의료행위를 하다가 얻은 거지만, 수치심은 그녀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행동이 태혁에게는 그저 그를 경계하는 태도로 보일 뿐이었다.
기껏 회식 자리에서 빠져나와 만나러 왔더니 가까이 다가오지도 말라니.
이거 완전 스토커 취급이다.
아무리 병원 안에서 그와 마주치기 싫어도 그녀는 이러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교수이고, 그녀는 레지던트였으니까.
“그건 내가 싫은데.”
태혁은 그녀를 향해 발을 떼었다.